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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장. 악녀와 사냥꾼 (615/1,284)

618장. 악녀와 사냥꾼

“요즘 세계 경제와 국내 경기가 좀 나아지고 있지만 언제 다시 위기가 닥칠지 모릅니다. 각 지점별로 여신관리 철저히 하세요. 정부에서는 가계대출을 장려하고 있지만 마지막 책임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다는 걸 명심들 하십시오.”

슥슥.

회의장에 착석한 이들 모두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필기를 했다.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하시고 회의 마치겠습니다.”

우리들 은행 오전 행장과 임원, 중요 지점장의 오찬회의가 마무리 됐다.

행장 현준규는 대출 리스크 관리를 필히 당부했다.

지난 정부 때 겪었던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당시 모든 은행들이 살얼음 판 위에서 식겁했다.

IMF 시절 수많은 은행들이 도산하고 팔려 나가고 인수 합병이 됐다.

순간적인 자금 흐름의 막힘이 돈(?)맥경화를 일으킨 사태.

미국발 서브프라임 위기도 IMF 못지않았다.

다행히 연방은행이 돈을 풀면서 위급했던 상황이 빠르게 진정됐다.

다급했던 위기가 한풀 꺾이자 정부 압박이 심해졌다.

은행들은 언제나 보수적으로 자금을 빌려주는 곳.

정부의 부동산 대출 장려 정책에 은행들은 근심이 많았다.

‘근시안적인 정책이야.’

행장 현준규는 현 정부 정책에 생각이 많았다.

수십 년 동안 은행에서 잔뼈가 굵어온 현준규.

수없이 반복되는 경제 위기를 겪어 왔지만 요즘처럼 변화가 극심한 시절은 없었다.

하루 앞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금융계 변화가 태풍급 수준이다.

다행히 우리들 은행은 공적자금으로 연명이 가능한 국가 소유였다.

민영화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덩치가 너무 커 정치적 리스크로 연속 실패했다.

그 과정 속에서도 부실한 은행과 카드 회사, 투자 회사들을 합병해 가며 덩치를 키운 우리들 은행.

커진 덩치와 달리 과거에 장착했던 명성을 많이 잃어버렸다.

100년도 더 된 역사에 한때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정치권 술수로 명성에 큰 금이 갔다.

“행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임원들이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휴우.”

현준규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은 하는 건지……. 원.”

내부적으로는 리스크 관리를 지시했지만 현실은 정부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민간은행들도 관치금융을 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우리들 은행은 대부분의 지분이 산업은행 소유다.

정부가 가장 큰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입장.

원론적인 말만 앵무새처럼 내뱉어야 하는 입장이다.

만약 정부 방침을 어기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근본적인 원칙도 정의도 없는 현 정부.

“부동산 버블이 발생하면 당장 경기 지표는 좋아지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모두 공멸하는 걸 왜 모르는지……. 그걸 알고도 이렇게 밀어붙인다면…… 놈들은 미친 게야.”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유럽도 부동산 버블로 큰 곤욕을 치렀다.

부동산이 활황이 되면 등록세와 취득세, 농어촌특별세와 교육세 등이 증가한다.

그렇게 해서 재정 여력이 늘어나면 국가는 여러 정책을 펼 수 있었다.

전제 조건은 세금이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최병박 정부 때처럼 눈 먼 세금이 될 경향이 컸다.

거기다 한순간 버블이 꺼지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국가 정책을 믿고 우후죽순 아파트 가격이 치솟게 되고 국민들은 집값이 오른 만큼 넉넉하게 돈을 끌어다 쓰게 된다.

그 모든 상황이 당장은 달고 좋겠지만 말 그대로 버블은 영원할 수 없는 법.

중동 전쟁이나 미중 경제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먼저 부동산이 큰 타격을 받는다.

당장 현금화할 수 없는 부동산.

가장 먼저 심리가 무너지면 치솟던 집값이 반값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깡통 주택은 당연한 수순.

상당수의 매수자들은 하루아침에 수억씩을 떠안은 빚쟁이가 된다.

덩달아 이자로 수익을 내던 은행도 개인들의 파산 여파로 덩달아 영향을 받는다.

바젤협약과 여러 경제 조약 체결이 발목을 잡아 정부도 선뜻 지원을 할 수 없는 악조건.

빚이 쓰나미가 되어 순식간에 서민의 삶을 휩쓸어 버린다.

개인들이 빚더미에 앉게 되면 대한민국 거의 모든 산업이 마비가 된다고 봐야 했다.

첫 IMF 당시에는 개인들의 저축 자금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소비가 미덕이 된 시대.

저축 자금이 없는 개인들의 통장에 돈이 돌지 않는 순간부터 몇 달 안에 부동산 경매가 폭발한다.

“누가 있어 이들을 구원하리요…….”

행장의 자리까지 오면서 수없이 경기 사이클을 경험한 현준규.

대책 없는 이 사안 때문에 저절로 신을 찾았다.

파멸 뒤에는 새로운 창조의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이런 시절이 다시 올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과거처럼 부족한 것 없이 따뜻한 밥을 어디서든 먹고 살 수 있는 시절.

최소 일본의 버블처럼 족히 20년은 대한민국의 전체 세대가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도 몰랐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알짜 기업들부터 외국 투기 자본에 넘어갈 게 뻔했다.

한 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IT 시대.

이 위기에 처해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위해 진정 누가 나서줄 것인가.

현준규는 적어도 황금과 기술, 달러라는 천부인을 들고 단군신 정도는 임해야 해결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띠이이잇.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일입니까?”

부하 직원들에게도 깍듯하게 경어를 사용하는 현준규.

[행장님. LOR 투자법인 도도희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LOR!’

현준규는 상상 밖의 소식에 깜짝 놀랐다.

일반 사람들은 모르지만 금융권 인사들 사이에서 LOR은 신화였다.

그들이 굴리는 자회사와 투자회사 자금이 수조를 넘었다.

국내 대기업 인수합병을 수시로 추진하는 한국 내 금융계의 큰손.

“바로 연결해 주세요!”

현준규 목소리가 격양됐다.

[여보세요.]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들 은행의 행장 현준규입니다.”

[LOR 투자 도도희 대표입니다.]

“대표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규모가 큰 자금을 굴리고 있는 은행의 장이라고 해도 여기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부채 같은 건 하나도 없고 순수 자본만 굴리고 있는 알짜 중의 알짜 LOR 투자 회사.

그 뒤에 월가에 전설로 통하는 로버트 라이언이 버티고 있다.

[바쁘신 것 같은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현준규는 살짝 긴장했다.

사실 LOR 투자 회사가 굴리는 자금 상당수가 우리들 은행에 예치되어 있었다.

그 자금을 빼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회장님이 행장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네…… 회장님요!”

대충 그가 누군지 알고 있는 현준규 행장.

[장소는 비서실로 연락해 놓겠습니다. 오늘 오후 시간 내주십시오.]

사적인 안부를 전하는 대화 같은 건 없었다.

짧고 간단한 목적형 대화.

“알겠습니다! 연락 주십시오.”

현준규는 최대한 공손하게 답했다.

여당 고위 정치인이나 VIP가 전화를 해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인들이야 쥐었던 권력을 잃게 되면 그 순간 수명이 끝나 버린다.

하지만 대형 투자자는 돈이 마르지 않는 한 영원했다.

현준규가 볼 때 LOR은 망할 일이 없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보통 인간의 능력 이상의 뭔가를 소유한 LOR 투자 회사의 회장.

띠이이이.

인터폰이 끊겼다.

“이거 잘만 하면…….”

장태산 회장이 이렇게 현준규를 부를 때는 그 이유가 몇 가지 안 됐다.

요즘 증권 찌라시를 통해 돌고 있는 내용.

동룡과의 전쟁.

기회가 온 만큼 머리를 굴리는 현준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어때 맛있지?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애들 밥은 잘 챙겨준다. 이게 다 유기농이야.”

황연태는 구내식당에서 침을 튀겨가며 자랑했다.

“네? 네에…….”

“언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이 하얘졌어. 입에 안 맞아?”

오수연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합니다’.

첫 인사로 건넸던 장태산의 말과 그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직후부터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듯 기운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마치 저주에라도 걸린 듯했다.

“체한 것 같습니다. 제 방으로 가시죠. 특효약이 있습니다.”

‘오수연! 정신차려!’

장태산의 호의 가득한 말에 다시 한 번 오수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늘 목표는 장태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게 분명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바로 일어나시죠.”

손을 내미는 장태산.

“꺄아아악!”

“이사님이 오수연 씨 손을 잡았어.”

“흐잉. 역시 매너 짱 이사님!”

식당에서 숨을 죽이고 오수연을 바라보고 있던 연습생들과 직원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그림에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우상이 절세미녀인 아파보이는 여배우의 손을 잡았다.

휘청.

순간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는 오수연.

그런 그녀를 안듯 붙잡아주는 장태산.

“으아아!”

“아, 안겼어!”

“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소란스런 주변 상황에도 불구하고 황연태가 눈치 없이 나섰다.

“금방 치료됩니다. 예서 씨랑 걱정 마시고 식사하고 계십시오.”

장태산 이사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수연을 부축해 자리를 옮겼다.

‘뭔가 있어!’

강예서는 짐작했다.

어젯밤 이사님에게 오수연과의 일을 모두 고백했다.

장태산 이사는 그 사실을 다 알고도 오수연을 마중했다.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다.

오수연은 장태산 이사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뭐냐? 예서야~ 둘이 무슨 사이야? 설마 오늘 처음 봤는데 사귀고 그러는 거 아니지?”

황연태가 장난 섞인 걱정을 내비쳤다.

오수연이 가진 연예계 바닥 파워 때문에 방문을 허락했지만 사실 황연태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쫙 퍼져 있는 연예계 내의 오수연의 갑질.

“걱정마세요. 그런 사이 아니에요.”

단언하듯 말하는 강예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딱 보면 느낌 오잖아요.”

“어떤 느낌?”

“악녀와 사냥꾼?”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악녀는 누구고 사냥꾼은 또 뭐야?”

“기다려 봐요. 그런데 오늘따라 제육볶음이 정말 맛있어요. 고기 진짜 좋아요.”

“제주도 무항생제 흑돼지잖아. 이거 우리 처갓집 농장에서 가져오는 거야.”

“어쩐지…….”

강예서는 능숙하게 황연태 대표의 정신을 식탁 위로 돌려놨다.

오수연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강예서 역시 이 바닥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여배우라는 걸.

오수연이 보는 만만한 여배우가 아니었다.

***

“앉아요.”

“감사합니다.”

오수연을 이사실로 데려와 가죽 소파에 앉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그녀.

제대로 선빵에 얻어맞았다.

나를 찾아온 목적이 빤히 보였다.

반짝이는 렌즈 뒤에 감춰져 있는 사악한 악녀의 본성.

또로로록.

이사실에 구비된 레드 와인을 두 잔 따랐다.

“마셔요.”

“아니……. 제가 술은 잘…….”

“내숭 그만 떨고 마셔요.”

“네?”

당황한 그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오수연에 관련한 기사.

말술을 마시는 바람에 강철 체력 영화 스텝들도 그녀의 대적이 될 수 없다는 에피소드였다.

털썩.

그녀 앞쪽 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와인 잔을 들었다.

“이 정도면 눈치챘을 것 같은데…… 가면 벗죠.”

“…….”

파르르 떨리는 오수연의 눈동자.

꿀꺽.

들고 있던 와인을 쭉 마셨다.

“제법이네. 애송인 줄 알았는데.”

정체가 드러난 영화 속 악녀처럼 딱 어울리는 말을 내뱉는 오수연.

“오수연 씨도 제법이었습니다. 저주나 마찬가지인 말을 듣고도 그렇게 버티는 걸 보면 말입니다.”

노는 물은 같아도 격은 달라야 했다.

말은 짧아져도 격조는 지켜야 하는 법.

반토막 친 오수연의 말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했다.

“저주?”

의아해 하며 묻는 오수연.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고.”

“……그게 저주라도 된다는 말이에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녀.

“아참! 모르죠? 제가 주술을 좀 겁니다.”

“!!!”

“모르시겠어요? 신빨이 좀 좋다구요.”

신빨이 좋다는 말끝에 격하게 흔들리는 오수연의 눈빛.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쫄아서 두려워하는 말, 신빨.

별말 아닌데 협박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뭐가 궁금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을까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몹시 떨고 있는 오수연.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고 있는 그녀.

그럼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부드러운 눈빛에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장침 하나.

“전문수! 얼마면 됩니까?”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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