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장. 악녀 (2)
“허대부라…….”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정보에 전문수는 구미가 확 당겼다.
원수나 다름없는 놈의 행보를 짐작 할 수 없었다.
연수생 시절 자신과 아들, 손주까지 한순간 쓰레기로 전락시켜 버린 놈.
놈이 오늘은 대한민국 지하 자금의 큰 흐름을 쥔 사채계 거목을 만났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허대부는 선친 때부터 인연이 닿아 있던 자다.
다급하게 큰 공사나 정치 자금이 필요할 때 허대부의 자금을 끌어다 요긴하게 사용했다.
전문수가 계열사 분리를 할 때도 허대부 쪽 아랫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톡톡.
손바닥으로 턱을 받치고 검지로 코를 매만지는 전문수 회장.
한때 대권 주자로 뛰어들었던 그도 이제는 하나둘씩 자리를 내놓고 있는 신세였다.
화가 고개를 들었다.
좀 더 기세 좋게 뜻하는 바를 추진해 보고 싶었지만 가진 세력이 약했다.
재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름 철학 있는 삶을 추구하고 스스로 매력이 있는 인생을 살아왔다.
품은 자부심과 달리 막상 전문수를 따르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큰일을 도모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자신의 삶.
마음은 아직도 20대 때 품었던 그대로.
그러나 마음과 달리 하루하루 늙어가는 육신.
이런저런 화를 다스리던 자신의 뺨을 때린 격인 장태산.
“동룡 문제겠지……. 동룡.”
장태산에 대한 정보는 상당수 수집됐다.
흠잡을 것 없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누구나 약점은 존재했다.
재벌가라면 피해갈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유산 싸움.
허대부가 동룡 주현태와 거래했다는 건 이 바닥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일가의 주식 전부를 담보로 허대부로부터 거대 자금을 수혈받았다.
실세 중의 실세 주순자의 손을 잡은 주현태.
언론과 정치권, 행정부까지 나서서 손을 걷고 동룡의 인수 건에 도움을 주고 있다.
“재미있게 됐어……. 훗.”
다 늙어서까지 형님에게 꾸중을 듣고 사는 신세인 전문수.
놈 때문에 새끼들도 제대로 못 챙기는 한심한 재벌이로 전락해 버렸다.
행운처럼 찾아온 번뜩이는 잔꾀에 오랜만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적의 적은 벗이라고 했던가. 주현태 너 복 받은 거야.”
레벨이 달라 자주 마주칠 일이 없었던 주현태 회장.
전문수는 그를 돕기로 마음 먹었다.
일명 흑기사.
“그건 그렇고…… 수연이는 잘 하고 있겠지…….”
공격은 한 곳에서만 시작되지 않았다.
세컨드인 오수연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흔들기가 진행 중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좋은 소스가 가장 많이 널려 있는 연예계.
장태산의 또 다른 약점이 될 수 있었다.
“넌 내가 찍었다. 천천히 다 무너뜨려 주마.”
아직 세상 물정 다 겪어 보지 못한 어린놈이었다.
재력 면에서 가진 바 능력은 높이 샀지만 권모술수까지 익힐 만한 인생 경험은 부족한 때였다.
그래도 정치권에서 구를 만큼 구른 전문수.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경영도 아니고 오직 장태산뿐이었다.
***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입니다.”
귓속을 파고드는 듣기 좋은 목소리.
“네~”
강예서가 활짝 웃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두 번이나 구해준 삶의 은인이나 진배없는 남자.
회사 이사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만남이 항상 엇갈렸다.
지금까지 겨우 얼굴 몇 번 본 게 다일 정도.
최근까지 사법연수원에 있다고만 들었던 장태산 이사.
그가 앞에서 웃고 있었다.
‘든든해.’
언제 봐도 따뜻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장태산 이사는 강예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MTS의 빵빵한 지원 덕분에 주연 자리를 몇 번 꽤찼다.
과거처럼 지저분한 날파리 같은 이들은 끌지 않았다.
‘더 멋있어졌어.’
장태산 이사는 과거에도 어려만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제법 남자 냄새가 풍겼다.
드라마나 영화 세트장에서 만났던 주연 남자 배우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멋진 남자 배우들을 실제 만나보면 생각보다 키도 그렇게 크지 않고 얼굴도 작았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몸도 보기보다 왜소하고 남자다워 보이는 장태산 이사보다 못했다.
허락된다면 언제든 품에 안겨 기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희망사항일 뿐.
강예서는 진작 사적인 감정과 마음을 접었다.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는 항상 범접하기 힘든 미녀들이 존재했다.
그냥 인연이 닿아 있는 든든한 인생의 조력자로 여겨야 마음이 편했다.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
“늦은 시각인데 소문나는 거 아닙니까?”
장태산이 웃는 얼굴로 농담을 던졌다.
“전 괜찮은데 이사님이 걱정이죠~. 아직 제대로 펴지도 못한 팔팔 청춘이잖아요.”
“저 보기보다 많이 늙었습니다.”
“에이~ . 농담도 잘하셔.”
대화는 편하게 이어졌다.
어차피 MTS 이사실 안이라 누가 볼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시간은 밤 11시 30분.
아무리 소속사 이사와 배우 관계라지만 단둘이 만나고 있기에는 애매한 시각이었다.
“저 그게…….”
강예서는 잠시 망설였다.
중요한 일인 건 부인할 수 없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가…… 괴롭혀요?”
“아니요~.”
“너무 착하게 살지 마십시오. 선량함에도 가시가 필요한 법입니다.”
“와아……. 그거 진짜 좋은 말인 거 같아요. 제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나보다 어린데…… 왜 오빠 같지?’
강예서에게 많은 위로와 필요한 조언을 날려주는 장태산 이사.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스스로 자존감을 세우고 자아 중심의 행복을 찾으십시오. 그래야 강인해질 수 있습니다.”
“네! 이사님 덕분에 요즘 강하게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충성!”
강예서는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하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사님, 오수연 씨 아시죠?”
“당연히 알죠.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 아닙니까. 앞에 계신 강예서 배우님에게는 훨씬 못하지만~.”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요.”
“그런데 오수연 씨 얘기는 여기서 왜……?”
“……그게 수연 언니가 좀 수상한 것 같아요.”
“언니라고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입니까?”
“네에……. 그게 얼마 전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 언니 동생 하자고. 얘기가 그렇게 됐어요.”
“그래요?”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장태산의 눈빛과 말투.
“언니가……. 자꾸 회사 일을 물어오는가 하면 이사님에 대해 관심을 보여요.”
“저를요?”
“네에…….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뭔가 수상해요. KM에서 연습생들에게 접근한다는 말도 돌고 있어요.”
“흐음……. KM이라.”
“뭔가 있는 거죠? 수연 언니, 내일 사무실에 온다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오는 걸까요? 이상하게 느낌이 안 좋아요.”
강예서는 계속되는 찝찝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장태산 이사에게 전화를 했다.
오수연은 노골적으로 장태산 이사에 관해 몇 번씩 물어봤다.
뭔가 목적이 있는 게 확실했다.
“오수연 씨가 내일 회사에 옵니까?”
“오전에 방문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죠.”
“네? 이사님이요?”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장태산 이사.
“오수연 씨 같은 대단한 여배우를 제가 어디서 보겠습니까. 확실히 눈도장 찍어야죠.”
“눈…… 도장요?”
뜻밖에 오수연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장태산.
‘태산 씨도…… 남자니까…… 수연 언니가 좋겠지…….’
강예서는 마음속으로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누가 봐도 매력이 넘치는 오수연.
“예서 씨, 그거 모르죠.”
씨익 미소를 짓는 장태산.
“뭐, 뭘요?”
“제가…… 악녀 감별사입니다.”
“네? 아, 악녀 감별사요???”
***
끼이이익.
MTS 주차장.
오전 11시 미니밴 한 대가 주차장에 멈췄다.
슈퍼 연예인들이나 타고 다닌다는 최고급 블랙 미니밴.
스르륵.
자동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자체발광의 여배우 한 명.
아이보리 커버의 앵글부츠, 하체굴곡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밀착 하얀 면 팬츠.
가슴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동일 색상 터들넥에 민트 색깔 구스다운 롱패딩으로 한껏 멋을 냈다.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연예인의 옷차림.
“언니!”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미리 기다리고 있던 강예서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섰다.
“예서 안녕~.”
“네~.”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린 오수연.
“오수연 씨 아냐?”
“와아아……. 화면보다 더 예뻐.”
“근데 우리 회사에 무슨 일로?”
회사 규모가 커진 만큼 바쁘게 주차장 이곳저곳을 오가던 이들 눈에도 오수연은 금세 포착됐다.
“언니 올라가요.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황 대표님이? 바쁜 분을 괜히 귀찮게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간 오수연.
말과 달리 태도는 당연히 대접 받아야 할 것처럼 행동했다.
“이사님도 계세요.”
“이사? 그 장태산 이사?”
“네~. 제가 언니 온다고 말씀드렸더니 회사에 출근하셨어요.”
“호오. 그래?”
‘드디어 만나게 되네. 장태산……. 후훗.’
오수연은 기대가 컸다.
전문수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꼭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소문에 의하면 남자 아이돌도 무릎 꿇어야 할 정도로 외모가 대단하다고 했다.
게다가 머리까지 좋았다.
한국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
“올라갈까? 대표님하고 이사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는데.”
“네~.”
강예서가 오수연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인도했다.
“그런데 예서 너 얼굴빛이 다르다. 얼굴에 뭐 했어? 아니면 애인이랑 진하게 사랑이라도 한 거야?”
“어, 언니! 저 남자 안 만나요.”
얼굴을 붉히며 강하게 부정하는 강예서.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 너 어제 누구랑 있었어? 설마…… 너, 그 잘생겼다는 이사님……?”
“아……니에요.”
“맞네~ 맞아. 순진한 강예서 아니랄까 봐 표정에서 그걸 못 감춰~. 언니 밑에서 더 배워야겠다. 남자란 말이야 순진한 여자보다는 여우처럼 눈치 빠른 그런 여자를 더 좋아하는 법이야.”
오수연은 한 수 가르쳐 준다고 강예서를 놀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지이잉.
빠르게 대표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띵.
금세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대표님! 이사님!”
강예서가 화들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미리 마중을 나와 있는 황연태 대표와 장태산 이사.
‘저…… 남자가 장태산?’
오수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소문으로만 들었던 MTS 이사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정말…… 잘생겼다.
잘났다는 동료 남자 배우들 상당수와 호흡을 맞춰온 오수연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꽤 놀랄 만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짧은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상남자 스타일의 미남.
포멀과 캐주얼의 조합에 지금 한창 유행하는 트렌드를 더한 스타일.
절로 호환성이 터질 정도였다.
화이트 셔츠와 쉽게 소화할 수 없는 지퍼장식 캐시미어 패딩 스웨터.
편한 블랙 팬츠에 마운틴 셔츠를 너무 자연스럽게 코디했다.
거기에 유니크 하고 엔틱 한 손목시계까지.
남자 프로 모델들보다 더 각이 잘 나왔다.
사르르륵.
오수연은 완벽한 장태산 이사의 얼굴과 스타일에 저절로 활짝 핀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한눈에 화려함을 쫓아 내달리는 여배우의 눈을 만족시켰다.
“오수연! 네가 이곳까지 웬일이야. 온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황 대표님. 우리 사이에 웬 황송한 마중~”
“아는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지. 대한민국 대표 최고 여배우님이 납시셨는데~.”
“나 아직 계약 기간 많이 남았거든~.”
“나 상도덕 아는 남자다. 들어가자. 커피 한잔하고 회사 구경시켜 줄게.”
“그 전에…… 여기. 이 멋진 남자 분 먼저 소개해 주셔야지.”
“하하. 잊고 있었네. 여기 이분은…….”
“장태산입니다.”
황연태가 막 소개하려던 찰나 먼저 손을 내밀며 오연수 앞으로 나서는 장태산.
“오수연입니다.”
오수연이 최대한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찌릿.
손이 닿는 순간 느껴지는 스파크.
허공에서 부딪힌 두 사람의 눈빛.
그 순간.
“…….”
“!!!”
오수연은 전신에 전류가 흐른 것처럼 놀랐다.
황연태와 강예서를 등 뒤쪽에 세우고 마주선 장태산.
그의 입술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장태산의 입술이 전하는 말의 뜻은.
- 지.옥.에.온.걸…….
“환영합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