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장. 악녀
“이게 뭔가?”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고!”
오정 그룹의 회장실.
어둠이 짙게 내리고 있었지만 오정 그룹 본사 건물만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임성철 회장의 목소리가 회장실 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오른팔 장안수가 비밀 보고서를 임성철 회장에게 올렸다.
보고서를 살피던 임성철 회장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룹 내 사장단과 중요 임원들에 대한 동향 보고.
상당수 임원들이 임성철 회장의 말이 아닌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움직이고 있었다.
“임원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으면……. 그놈들이 역모라도 꾸민다는 게야?”
임성철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물었다.
과거 겪었던 오정 그룹에서 벌어졌던 형제의 난.
그 당시 있었던 사건으로 오정은 암암리에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아직도 백부와 사이가 좋지 않는 임성철이다.
그룹 분할 당시 서로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전력이 있었던 만큼 임준형과 딸들에 대한 재산 문제를 일찍 정리해 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은밀히 각자에게 계열사를 일찍 쪼개줄 거라 약조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재벌의 승계 작업.
순탄하게 진행되던 일과 달리 생각지 못한 다른 문제가 터졌다.
부회장 임준형이 사고를 쳤다.
“비서실 말이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장한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뭐라고?”
임성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정 그룹의 비서실은 임성철 회장의 분신과 같았다.
그룹의 중요 사항에 대해 모조리 파악하고 대처하며, 만사에 대응 준비를 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서실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준형이 어딨어! 그놈 지금 어딨냐고!!!”
“……지금 부회장실에 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당장!”
“알겠습니다.”
장한수가 대답하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끄응…….”
임성철 회장은 억눌렀던 신음을 간신히 토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혈압이 올라 화병에 뒤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장태산, 그 녀석은 지금 허대부를 만나고 있는데. ……아들 녀석은 되도 않게 황제 노릇이나 하려고 들다니……. 하아.”
장태산과 아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속이 답답해지는 임성철.
장태산은 날이 갈수록 범접하기 힘든 거물이 돼갔다.
생명 연장을 위해서는 장태산의 손을 잡아야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 사실을 임성철 회장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번에 장태산이 부탁한 일도 고민 없이 흔쾌히 들어줬다.
빚을 만들어 놔야 나중에 계산하기에 용이했다.
하지만 아들이 문제다.
아직도 아들 임준형은 장태산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화해하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누가 갑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저지른 어리석은 짓.
막상 장태산이 감춰 둔 패가 무엇인지 임성철 회장도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오정의 해외 주주들 일부가 장태산의 사람이라는 확신은 들었다.
그런 입지를 갖춘 장태산이 대한민국의 어둠 속 재력가 중 한 명인 허대부와 조우했다.
동룡 문제 때문인 것까지는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다.
장태산의 매력을 허대부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구미가 당기는 장태산을 잡기 위해 임성철 회장은 막내딸까지 던졌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넙죽 받아먹지 않았다.
녀석 주변에 딸 말고도 여자가 많았다.
그건 허대부도 마찬가지.
그에게도 어디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딸이 있었다.
만약 이런 시점에 두 사람이 손이라도 잡는다면…….
“멍청한 놈!”
아들을 생각하다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른 임성철 회장.
아들의 마음을 아주 모르지 않았다.
한때 임성철 회장도 지금의 이 자리를 노렸던 순간이 있었다.
욕심이 아주 안 난다면 남자가 아니었다.
말 한 마디에 해외 근로자까지 100만 명을 움직일 수 있는 오정의 회장 직책.
계열사 사장단과 임원들만 수백 명이다.
1년 매출액만 400조에 이르는 규모.
과거 대륙인 중국의 황제도 부럽지 않을 만큼의 권력을 누리기도 했다.
임성철 회장은 심난했다.
장한수가 이 야밤에 들고 온 비밀 보고서는 역모나 마찬가지였다.
임성철 회장의 권력 누수 현상.
시시각각 죽음이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는 임성철 회장이었다.
남은 시간이 적어질수록 마음이 복잡했다.
IT 업계는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했다.
경쟁하던 대형 휴대폰 기업이 단 1년 만에 무너졌다.
한순간만 방심해도 아웃이었다.
제아무리 오정이라 해도 입장은 다를 바 없었다.
경영자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상상할 수 없는 리스크를 일으켰다.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엘자 그룹처럼 각처에서 다른 소리가 나면 일순간 그룹은 난파되기 십상이다.
그런 마당에 다른 곳도 아닌 내부에서 총질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가장 위험한 경영 위기 신호.
똑똑.
“들어와!”
끼이익.
회장실의 두툼한 문이 열렸다.
“회장님 부르셨다고…….”
회사 내에서는 깍듯하게 회장님이라 호칭하는 임준형.
임성철 회장에게 다가오다 말고 걸음이 멈칫했다.
가족만이 알 수 있는 임성철 회장의 지극한 분노의 신호.
저벅저벅.
손에 한 뭉치 서류를 들고 임준형에게 다가오는 임성철 회장.
쫘아아아아악!
“!!!”
임준형의 뺨에서 들려오는 격한 타격음.
한 뭉치의 서류가 그대로 임준형의 뺨을 강타했다.
“아, 아버지!”
당황해 아버지라 부르고 만 임준형.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분노를 어리둥절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히……. 내 왕국에서 나를 몰아내려고 해?”
‘헙!’
임준형은 숨이 턱 막혀왔다.
몰아내려고 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라인이 형성됐을 뿐이다.
어차피 미래 오정의 주인이 될 게 확실한 임준형.
그를 향해 그룹 사장들과 임원들이 자연스럽게 뭉쳤다.
최대한 몸을 사리며 조심했지만 예기치 않게 정보가 새어나간 듯했다.
아버지 곁에서 수족처럼 움직이는 장한수 실장.
그를 통한 게 틀림없었다.
이럴 때는.
털썩.
임준형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오해십니다! 전 결코 회장 자리를 탐하려는 게 아닙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버지에게 보고하지 않고 그룹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느꼈던 쾌감.
재계 황태자가 아니라 진짜 황제가 된 듯한 맛을 느꼈다.
“……멍청한 놈.”
한심하다는 듯 임준형을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의 시선.
“아버지…….”
“됐다. 당분간 쉬어라.”
“아, 아버지!!!”
“나가라.”
화를 내고 손찌검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휴식 명령.
“이 자리의 무게, 그 무서움을 넌 아직 모른다.”
씁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 눈빛에 임준형은 눈을 질근 감았다.
“너보다 한참 나이도 어린 장태산이 지금 누굴 만나는 줄이나 아느냐? 어리석은 놈…….”
‘장태산! 장태산! 장태사아아아안!!!’
귓속을 파고드는 떠올리기도 싫은 놈의 이름.
임준형은 이가 갈렸다.
자꾸 비교 대상이 되고 있는 장태산.
놈을…….
조만간 손을 한번 봐야 이 화병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
띵띠동~ 띵동~♪.
법금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이 대단했다.
애월 아줌마가 들려주는 가야금 연주는 뭔가 달랐다.
귀가 제대로 호강했다.
허대부 방으로 한상 거하게 요리가 차려졌다.
애월 아줌마와 가정부가 차린 전통 요정집 정식.
맛 또한 기가 막혔다.
짧은 시간 동안 신선로를 비롯해 구절판과 열구자탕 등등이 준비됐다.
옛 요정에서나 나왔을 법한 요리들이 한 상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놈의 산삼주.
임성철 회장님과 먹었던 녀석보다 연식이 더 된 산삼이 커다란 유리병 속에서 영롱한 자태를 뽐냈다.
최소 수백 년 묵은 녀석.
마실 때마다 아주 기가 찼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옆에 앉아 있던 허보영이 술잔을 내밀었다.
기분이 좋은지 벌써 몇 잔째 연거푸 마시는 그녀.
“공부 안 해요?”
연수원 졸업한 법조계 선배로서 따끔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술도 인생 공부라고 배웠습니다.”
허대부 딸이 맞았다.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잔을 내미는 허보영.
조심해야 할 여성 명단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래요. 하루 공부 쉰다고 달라질 인생이 아니죠.”
한국대 로스쿨에 들어올 정도면 이미 합격은 따 논 당상이다.
쪼로록.
유리잔에 가득 산삼주를 채워줬다.
허보영 덕분에 산삼주 맛을 제대로 봤다.
“두 사람 보기 좋구나~. 보영이 시집갈 때 개봉하려던 녀석을 네 녀석이 작심하고 마시는구나. 흐흐흐흐.”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딱 막힐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도 허보영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보통 이럴 때는 부끄러워해야 정상이건만 허보영은 달랐다.
“어르신 오늘은 밤이 깊었습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새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적당한 때에 물러남이 미래를 위해서 좋았다.
“자고 가.”
“네???”
언제 봤다고? 오늘 초면이라고요!
“음주운전 하시면 안 되죠. 자고 가세요.”
허보영! 당신까지 왜 그래!
“그래. 차타고 나가면 단속하라고 내 직접 경찰서장에게 전화해 버릴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자고 가.”
협박 수준이 사채왕다웠다.
“대리운전 부르면 됩니다.”
“우리 동네는 안 와.”
“방 많아요. 그리고 내일 오전에 전공 과목 없잖아요.”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비밀~.”
누가 날 팔아먹었다.
“그래도 잠은 집에서…….”
뚝.
그때 가야금 소리가 멈췄다.
나를 서운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제자 애월 아줌마.
또! 또! 마음 약하게!
나 밖에서 막 외박하고 그러는 남자 아니다.
강단 있게!
“자도 되지만…… 가끔 외박도 좋죠~. 총각이 왜 총각이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지! 태산 군. 아주 마음에 들어. 어여 마셔. 나한테 시베리아 야생에서 50년 동안 야생꿀과 약초 먹고 굴러먹은 불곰 웅담주 있어. 그게 그렇게 죽여!”
우, 웅담주!
귀가 확 쏠렸다.
“어머! 아빠. 그건 사위 주신다고 했지 않아요? 산삼보다 귀한 거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흐흐흐. 내가 우리 태산 군이 사위 같아서 그래~. 그렇지 태산 군?”
“네? 아니 저…….”
“나 죽으면 이거 다 보영이 거야. 이것저것 합쳐서 큰 거 열장 밖에 안 되는데. 그 정도면 손주들 분유 값은 될 거야.”
사채업자 큰 거라면……. 기준이 최소 조 단위다.
손주들 분유 값이 아니라 손자에 고손자까지 다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
“기저귀 값은 안 되겠죠?”
“미안하다……. 애비가 무능하다.”
“실망이에요. 아빠.”
“다음 생에는 부자 아빠 만나거라.”
뭐야? 두 사람 지금 만담해?
“그러게 말입니다. 그 정도면 자식에게 줄 게 아니라 노후 자금으로 쓰셔야죠. 괜히 자식들에게 손 벌리고 그러면 요즘 세상에 욕먹습니다.”
“응?”
허대부 어르신 눈동자가 커졌다.
수조 단위 큰 자금이 졸지에 노후 자금으로 전락했다.
“보영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키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아빠 재산까지 노리면 양아치죠. 맞죠?”
“그, 그렇죠…….”
허보영의 표정도 볼만해졌다.
두 눈은 극구 부정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흡흐으읍.”
애월 아줌마가 그런 허보영의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는 유쾌하게 흘렀다.
처음 방문한 곳이지만 자주 마주치는 가까운 이웃사촌 같았다.
띠리리리리리리.
그때 울리는 평범한 스마트폰 벨소리.
저장되어 있던 번호지만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떴다.
“장태산입니다.”
- 대표님, 저예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