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장. 대부의 조건 (2)
끼이이익.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밀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허보영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사고라도 난 듯 도로는 꽉 막혔다.
강남을 지나쳐 동작대교를 건너는 사이 1시간이 훌쩍 지났다.
퇴근 시간과 겹쳐 1시간 30분이 넘게 걸려 집에 도착했다.
머릿속이 복잡해 지쳐 파김치가 다 됐다.
“응?”
평소와 달리 경호원들이 대문 밖으로 달려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 호칭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래도록 익숙해진 상황.
“어!”
뿐만 아니었다.
집 앞에 떡 하니 주차돼 있는 눈에 익은 빨간 스포츠카.
자신의 차와 같은 기종이 집 대문 앞에 보란 듯이 주차되어 있었다.
“오늘 별일이네.”
장태산과 자신의 차에 이어 오늘만 세 번째 보는 같은 차량.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경험.
타다닥.
경호원들이 한발 늦게 다급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다른 때 같지 않게 번호판을 세심하게 확인하는 그들.
“아가씨! 오셨습니까!”
“네…….”
차에서 내리며 차키를 건넸다.
“집에…… 손님 왔나요?”
허보영은 평소에도 경호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친엄마 없이 자랐지만 애월이를 친엄마처럼 따르며 성장했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안정됐기에 모난 데 없이 무난하게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대부업자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방황했다.
그도 잠깐으로 짧았다.
아버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았다.
“네.”
“누구요?”
“어르신을 찾은 젊은 청년입니다.”
“청년요? ……아빠가요?”
요즘 들어 사람을 잘 만나지 않았던 아버지다.
“성함이…… 장태산……. 네, 장태산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네! 장태산요???”
허보영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바뀌었다.
오늘 학교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장태산이 자신의 집에 방문해 있다는 말이었다.
‘왜? 무슨 일로?’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이들 대부분 비밀을 가진 자들이었다.
장태산도 사업을 한다고 했으니 아버지와 만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로웠다.
허보영은 복잡한 심사와 눈길로 장태산의 차를 바라봤다.
“들어가십시오.”
경호원이 대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허보영.
자신의 집이었지만 오늘따라 옮기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인연이지…….’
이제는 인연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릴 만한 나이가 됐다.
그동안 허보영 인생에 없었던 남자와의 연이은 만남.
두근두근.
허보영의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띠링~? 띵~♬ 띵띵~♪.
그때 정원까지 들려오는 맑은 소리들.
‘애월 엄마가?’
오랜만에 들어보는 애월 엄마의 가야금 뜯는 소리.
몇 년 동안 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야금을 손에서 놓아버린 애월 엄마.
“아니야……. 이 소리는…… 뭔가 달라. 도대체!!!”
하지만 이내 애월 엄마가 튕기는 가야금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애월 엄마의 서러움과 그리움이 담긴 소리 달랐다.
과거 듣던 애월 엄마의 가야금 소리와 차원을 달리하는 맑고 청아한 울림.
“아…….”
집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서 있던 허보영.
갑작스레 가슴을 파고는 가야금 선율에 깊은 신음을 토해냈다.
***
뚱? 띵~♬ 띠이잉~?.
법금 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며 울린다.
풍류방에서 손님이 모두 떠난 뒤 새벽달을 깨우던 어느 노기의 손끝에서 울리던 서러움의 소리.
굵은 오동나무 나룻배에 걸린 열두 줄의 명주실.
그 가는 줄이 떨릴 때마다 귀가 열리고 무색의 공간이 울렸다.
“!!!”
말문이 닫힌 기녀는 비명 대신 눈으로 한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한복 자락을 움켜 쥔 손은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
가느다란 손가락이 줄을 튕길 때마다 물 위에 튕기는 듯 살아나는 물방울을 닮은 소리들.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시 사라지는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가락.
가야금은 마음을 다스리는 자에게만 허락된 악기라 하였다.
비워야만 얻을 수 있는 소요유(逍遙遊).
스승이 떠난 뒤에도 결코 찾지 못했던 깨달음.
애월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모든 걸 가슴에 담았다.
처음 듣는 가야금 음률이다.
옛 것이 아니었건만 옛 것 같았다.
새로운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담겨 있는 한(恨)은 올올이 가는 실을 타고 아프게 울렸다.
스승님은 물론 어느 누구의 손끝을 통해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가야금의 울림.
소리와 침묵이 달과 해처럼 조화를 이뤄야만 얻을 수 있는 심득의 음율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남자가 어찌 저렇게 단아할까.
무릎 위에 가야금을 올리고 입가에 구름 같은 미소 하나를 베어 문 채 농현(弄絃)에 빠져든 사내.
고왔다.
두 손은 두 마리 학이 구름 위에서 서로 노니는 것처럼 현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췄다.
음률과 동화된 몸은 그 자체가 악기인 듯 움직였다.
장태산은 거침이 없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그간의 아픈 세월을 잃어버렸던 애월의 가야금.
“!!!”
애월은 점점 시들어가던 마음이 생기로 벅차오름을 느꼈다.
때때마다 명주실을 손봐 두긴 했지만 마음을 잃어 감히 줄을 만지지 못했다.
스승이 그리울 때, 인생이 서글퍼질 때마다 자신의 동무가 되어 주었던 가야금.
어느 날 갑자기 그 살가웠던 동무의 마음이 홀연히 사라졌다.
마음이 없으면 결코 연주하지 말라 했던 스승님의 금언.
그 때부터 애월은 가야금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바라만 봐야 했다.
느닷없는 심마.
그때부터였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느꼈던 그 허무함.
어린 시절 자신을 버렸던 부모에 대한 원망이 무의식중에 살아나 애월을 괴롭혔다.
허대부를 만나 물질의 풍요는 부족함 없이 누렸지만 마음의 평안까지 얻을 수는 없었다.
그 누구 못지않게 잘 보살펴 주었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스승의 빈자리.
한 잔 술로 슬픔을 달래야 하는 서러운 삶을 살았던 기녀 동무.
스승인 동시에 도반이었던 이들과의 이별.
지난 세월의 그림자가 순식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애월은 그때 이별했던 동무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분명 장태산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풍류가야금.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25현 가야금처럼 풍성하고 다채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상사상견지빙몽(相思相見只憑夢)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장태산의 입술을 밖으로 흘러나오는 청아한 시조 한 자락.
애월도 익히 알고 황진이의 상사몽(相思夢).
“농방환시환방농(?訪歡時歡訪?)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애월의 마음을 올올이 알기나 하는 듯 그리운 스승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시 구절.
울컥.
애월의 마음이 대책없이 뜨거워졌다.
‘원사요요타야몽(願使遙遙他夜夢)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애월이 저도 모르게 입술이 달삭거렸다.
결코 소리가 새어나지 않는 입술.
그럼에도 애월은 장태산이 읊는 시조를 따라 이었다.
“일시동작로중봉(一時同作路中逢)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애월의 무음의 음성이 허공에 웅웅 울렸다.
떠난 스승이 한없이 그립고 보고파졌다.
순간 거짓말처럼 허공에 선연히 그려지는 스승의 그림자.
애월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이생 잘 마무리하고 이후 만나 그때 다시 보자는 듯한 따뜻한 손길.
스승님! 스승님!
환영 속에서 애월은 스승의 품에 안겨 서럽게 그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짖었다.
가야금의 선율을 한 올 한 올 타고 애월에게 온 스승님.
그리고…….
주르륵.
애월의 메말랐던 눈물샘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뜨거운 이슬.
“흡흡…….”
울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한 많은 여인의 애절한 울음.
기괴한 설움의 소리가 허대부의 방 안을 흘렀다.
그때 가야금 소리는 거짓말처럼 멈췄다.
“…….”
애월의 한이 눈물과 함께 녹아내리는 순간.
방 안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 태산 씨?”
어느새 나타난 허보영.
토끼눈처럼 놀란 눈으로 가야금을 무릎에 올리고 있는 장태산을 바라봤다.
***
아놔! 진이 누님.
오늘도 한 건 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렀지만 애월이라는 분은 진이 누님의 까마득한 후배.
그녀의 슬픔을 알고 있어 가야금과 시조 한 자락으로 눌러 놓은 감정을 자극해 터트렸다.
“흡흡……. 흡.”
허대부 품에 안겨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애월.
- 돌발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제자의 죽어가던 감정을 깨워준 당신에게 보살 서원화가 엄청난 카르마 포인트를 선물했습니다.
공짜는 아니었다.
세상에!
나도 익히 알고 있었던 서원화 보살의 전설.
그녀와 어느 시인의 사랑 이야기는 유명했다.
1000억 원대의 서원각이 시인의 시 구절 하나만도 못하다고 말했던 그녀.
그녀는 서원각을 거침없이 스님께 보시해 버렸다.
이후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조용히 세상을 살았던 서원화는 죽어서 보살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벙어리 애월은 서원화 보살의 제자인 듯하다.
평소에도 한복을 입고 한구석에 가야금이 세워져 있던 이유도 다 이런 사연 때문인 거 같다.
눈물을 잃어버렸다는 애월.
그녀가 다시 태어났다.
눈물은 영혼의 정화 장치.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한바탕 울음을 쏟아내고 나면 다시 힘이 나는 이유가 다 거기 있었다.
눈물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표시.
악인들 대부분은 눈물을 흘릴 줄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상황.
문제는.
“……태산 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보영 씨?”
아니 왜 로스쿨생 허보영이 여기…….
헉! 설마?
“너희…… 둘, 아는 사이더냐?”
“아빠는 어떻게 태산 씨……?”
아빠란다.
허대부와 허보영.
허를 찔렀다.
세상에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이 엄청난 반전의 인연.
“손님으로 찾아왔으니까 알지. 그렇지 않나 태산 군?”
태산 군?
허대부 말투가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바뀌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촉이 강하게 들며 경고를 했다.
“와아! 태산 씨. 우리 인연인 것 같죠? 집 앞에 있던 차가 설마 태산 씨 차일 줄은 몰랐어요.”
허보영은 진심으로 반가워라 했다.
스윽.
그때 눈물 콧물 다 쏟아내던 애월 아줌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하게 눈물을 쏟아낸 만큼 맑게 정화된 눈빛.
어! 그런데 뭐하시는 겁니까!
애월 아줌마가 날 향해 큰절을…….
가만히 받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일.
화들짝 놀라 일어서서 맞절을 올렸다.
“클클. 애월이가 널 스승님으로 인정한 것 같다. 뭔 사내 놈이 그리 가야금을 잘 타노. 너 전생 기생이가?”
헐, 나 기생 아니었다.
따로…….
다들 모르고 있지만 지금 이 방에 다른 분이 와 계신다.
어느새 곱디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반들반들 동백기름 발라 쪽을 지고 앉아 있던 황진이 누님.
가죽 바지 입었을 때와 비교할 수도 없는 고혹미를 전신에서 물씬 풍겼다.
- 동생 놀러와~.
쪽.
허락도 없이 내 빰에 키스를 남기는 황진이 누님.
파아앗.
빛과 함께 신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 황진이 여신이 오늘 획득한 카르마 포인트를 반땅 회수해 갔습니다.
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눈 뜨고 포인트를 강탈당했다.
일명 행사 수고비.
서운한 건 아니다.
진이 누님 덕분에 허대부와 상상할 수도 없는 인연을 쌓았다.
국내에서는 이래저래 도움받을 일이 많았다.
업을 쌓지 않기 위해서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해외에 떠도는 자금이 엄청났지만 그 돈을 한국까지 끌어와 투자하는 게 쉽지 않았다.
동룡도 마음 같아서는 돈으로 뺨을 후려치고 싶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가야금 소리 진짜 아름다웠어요.”
허보영이 두 눈을 반짝였다.
이거 뭔가 이상하게 판이 돌아간다.
“그럼 어르신 계약이 끝났으니 이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어! 장가도 안 간 젊은 사람이 뭐가 그리 바쁜가. 오늘 애월이 눈물도 찾았는데…… 내 크게 대접하지!
“네? 뭘…….”
“애월아. 가서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 저녁상 마련하거라. 네 가야금 스승과 반주 한잔 거하게 하고 싶구나.”
“아니 제가…… 밥은 집에서…….”
그때 나를 슬픈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애월 아줌마.
“집에서…… 먹는 것보다 밖에서 먹는 게 맛있죠! 하하하하.”
“아빠…… 그럼 산삼주 꺼낼까요?”
“오! 그래! 좋다 산삼주!”
사, 산삼주.
저기 허보영 씨, 설마 산삼주 먹이고 저를 어떻게…….
허보영과 눈이 마주쳤다.
사르르 얼굴을 붉히는 허보영.
젠장…….
이 집 산삼주, 다 마셔버려야 할 것 같다.
야! 산삼주 다 나와!!!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