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장. 허대부 (3)
“너 봤어?”
“뭐?”
“그 남자 말이야!”
“아! 법대생!”
“멋지지 않니? 나…… 태어나 그렇게 간지 나는 남자 처음 봤다.”
“로스쿨 생이 간지가 뭐냐. 그냥…… 죽여줬다고 그래. 흐흐흐.”
“교수님들과 같이 점심 먹으러 가는 걸 봤는데……. 세상에 깐깐한 얼음귀족 민법 교수님이 활짝 웃으며 수다를 다 떨더라.”
“남아 있는 법대생들 말 들어보니까 완전 전설이야.”
“무슨 전설?”
“2학년 때 2차까지 합격하고도 점수가 마음에 안 든다고 3학년 때 시험을 다시 봤대.”
“세상에! 미친 거 아냐?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 2차를 패스하고도…….”
“거기에다 동계 올림픽 때 동메달 따서 군대도 면제!”
“으아아아! 미친! 진짜?”
“집안도 엄청 잘 산대. 엄마가 그룹 딸인가 되는데 중용 대학교 이사님이란다.”
“으으으. 엄친아네. 그것도 다이아몬드 수저 집안…….”
“좌우지간 장태산이라는 그 남자 때문에 법학관이 발칵 뒤집혔다. 로스쿨생들뿐만 아니라 교양 과목 청강 중인 타과 여학생들이 얼굴 보려고 오후 내내 죽치고 있었다잖아.”
“그 정도야?”
“음대에서 음악으로 교수님을 미대에서는 미술로 교수 무릎을 꿇렸대. 뿐만 아니라 법학과 조교님들이 그러는데 성적도 올 A+래.”
“헐……. 미친…….”
“……경쟁자가 너무 많아!”
“설마 너…….”
“왜! 나 정도면 준수하지~. 미모면 미모~ 성격이면 성격~. 보영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응…….”
허보영은 오늘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들이 장태산을 입에 올리고 침을 튀겼다.
갑자기 나타난 법대 복학생.
법학관 로스쿨생들이 하나같이 모두 뻑 갔다.
특히 여학생들은 난리도 아니다.
로스쿨이라고 하루하루 시간이 널널하지 않았다.
졸업 후 치러야 하는 변호사 시험 난이도도 수준이 올라갔다.
로스쿨생들이 적체되면서 합격률은 떨어졌다.
오늘도 오후 6시까지 특강이 잡혀 있었다.
“보영이 너 오늘 수상하다. 무슨 일 있어?”
“아버님이 또 선 보래?”
연지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같이 한국대 로스쿨에 입학한 여자 동기들이 보영의 상태를 보며 물어왔다.
집안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그녀들.
평소와 달리 멍한 표정을 짓는 보영이 낯설게 느껴졌다.
도도한 보영은 로스쿨에서 미모로 탑을 찍었다.
방어가 철저한 그녀에게 남자들은 침만 흘릴 뿐 대놓고 접근하지 못했다.
그런 허보영이 오늘따라 맹한 모습이다.
‘내가 미친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았던 아침 상황.
허보영이 운전하는 빨간색 스포츠카는 며칠 전 도착한 신차였다.
올해 출시된 녀석이라며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줬다.
학교에 주차를 하기 전까지 도로에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거짓말처럼 운명적으로 학교 주차장에서 같은 차를 소유한 장태산과 조우했다.
짧았던 장태산과의 이벤트.
커플로 의심될까 봐 차를 바꾼다고 했다.
농담처럼 던졌지만 진담이 돼 버린 ‘그럼 안 되냐’는 반문.
사르르르.
그 순간을 생각만 해도 보영이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태어나 남자에게 처음 던진 정말 수준 낮은 작업 멘트였다.
“어라? 허보영. 너 상태가 심각하다.”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네…… 열 나? 감기야?”
친구들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과 달리 그때 상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그 말에 반할 만큼 기분 좋게 피식 웃던 장태산.
그리고 ‘알았다’는 말만 남기고 쿨 하게 등을 돌렸다.
다른 남자들 같았다면 보영과의 인연을 더 붙들고 연결하기 위해 안달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 때문에 더 허보영은 마음이 복잡했다.
자꾸 신경 쓰이는 장태산.
“저녁 밥 먹고 도서관 갈 거지?”
친구가 저녁 스케줄을 물어왔다.
“아니. 오늘은 집에서 공부할래.”
학교에 더 남아 있고 싶지 않은 허보영.
끊이지 않는 번뇌와 망상이 그녀를 괴롭혔다.
“허보영~ 진짜 수상하다. 평소에는 집에 가려는 우리들 잡고 공부하자고 설치던 애가…….”
“너 설마! 데이트 약속 있어?”
“데이트는 무슨…….”
심란한 날에는 집에서 쉬는 게 최고.
“나 먼저 간다.”
허보영은 빠르게 가방을 정리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
대한민국 부자들이 집중 거주하는 곳 중 한 곳인 성북동.
한때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성북동이라는 이름이 부잣집 사모님들을 대신하는 대명사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크네.”
성북동 부촌 중에서도 가장 뒤쪽 심처에 위치한 규모가 상당히 큰 집.
담은 옛날 성보다 높았고 방범 CCTV가 사방을 지켜봤다.
적외선 경보장치까지 작동됐다.
함부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허대부.
조윤태 변호사님도 선뜻 명함을 내밀 수 없다고 했다.
소유하고 있는 재산만 수조.
기업들을 상대로 대부업을 벌여 지금의 부를 일궜다고 했다.
대한민국 사채 시장에서는 그룹 넘버원인 오정과 비슷한 수준.
임성철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
아무리 사채계의 왕이라고 해도 임성철 회장 앞에서는 꿀릴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허대부의 집 앞에 차를 주차했다.
시간은 6시 55분.
정확하게 7시에 잡힌 약속.
몇 분 일찍 도착했다.
끼리릭.
운전석 문이 열렸다.
“…….”
“아가씨! 오셨습니까!”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 둘이 빠르게 운전석 쪽에 나타나 차 문을 열었다.
운전자는 확인도 하지 않고 차 안에 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언제 봤다고!!
나보고 아가씨란다.
열어준 문으로 내렸다.
“!!!”
아가씨가 아닌 남자, 나를 보고 당황했다.
“아가씨는…….”
“번호가…….”
경호원들은 그제야 차 번호를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이 집 아가씨도?!
로버트가 이번에 실수 제대로 했다.
오늘만 해도 세 번째.
로스쿨생 허보영과 나 말고 빨간색 스포츠카를 애용하는 내국인이 또 있는 모양이다.
“누구십니까?”
이내 경계 모드로 정체를 물어오는 경호원.
“어르신과 7시에 약속이 된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호원들은 무술 수련이 제법 된 자들이었다.
씨큐리티 직원들과 달랐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무술 수련자들만의 기세.
흉내 정도가 아닌 진짜 무술을 수련한 이들이다.
“따라오십시오.”
첫 인상과 달리 절도 있는 자세로 안으로 안내하는 경호원.
그들을 따라 사채왕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집안 정경은 짐작했던 대로 대단했다.
터가 넓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규모일 줄은 미처 몰랐다.
서울 시내를 감싸고 있는 산의 정기가 응축되어 흘러들고 있었다.
특히 배경이 되는 북악산 기가 저택 중앙에 고였다.
한눈에 봐도 큼지막한 바위가 떡하니 마당 한가운데에서 소나무와 함께 고여 든 기를 조화롭게 하며 서 있었다.
작은 연못도 보였다.
마당 전체에 깔려 있는 흙도 부드럽고 촉촉했다.
흙은 살이 되고 돌은 뼈가 되며 물은 피가 되었다.
나무와 온갖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발이 된다는 풍수 명당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상태였다.
절로 집안에 모여드는 정순한 기운.
재물을 담당하는 북악산 백호터에서 한 치도 비키지 않고 제대로 앉았다.
혹시 날뛸 수 있는 재물의 허기(虛氣)를 거대 바위가 진득하게 막아 눌렀다.
부자는 괜히 되는 게 아니었다.
가택풍수만 봐도 그 주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법.
임성철 회장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긴장이 됐다.
뭔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존재하는 게 분명한 이 집안.
속으로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평온한 모습으로 경호원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북악산과 잘 어울리는 기와를 올렸다.
전통 방식이 아닌 개량 형태의 2층집.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서울 시내가 훤히 눈에 들어왔다.
계단식 형태의 마당과 집 구조.
집이 앉은 터가 주변 터와 비교해 살짝 경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눈앞에 펼쳐진 정경이 정말 대단했다.
맑은 날 나무 아래 앉아 차 한 잔 마시면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들어가십시오.”
경호원들이 현관까지 안내했다.
그들만 경호를 서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안쪽 입구에 경호원들의 근무 공간으로 짐작되는 곳이 보였다.
숫자는 대략 5명 정도.
“감사합니다.”
짧게 목례하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세월이 느껴지는 가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꽤 값이 나가 보이는 도자기들과 고가구, 예술 작품인 나전칠기들이 사람보다 먼저 위엄을 자랑했다.
그리고.
스윽.
순식간에 앞에 나타난 머리를 곱게 쪽 찐 한복 차림의 여인.
고운 미모의 중년 여인이다.
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주인으로 보였다.
부드러운 기운이 전체적으로 집안과 조화를 잘 이뤘다.
조강지처가 아니거나 가사 일을 보는 사람이 풍길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나의 인사에 손으로 저고리 앞섶을 여미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미부.
눈빛이 부드럽고 고왔다.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눈빛과 손짓만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말을…… 못하는 눈치다.
조용히 버선발을 옮기는 그녀 뒤를 따랐다.
그리고 멈춘 장소.
열린 미닫이 문 안쪽으로 보이는 한 남자.
황금 보료 위에 앉아 왼팔을 장침에 올려놓고 날 쳐다보고 있는 노중년.
나이는 대략 60대 정도.
붉은 기운이 얼굴에 복사꽃처럼 피어 있었다.
굵은 이목구비가 고집께나 있어 보였다.
한 번 아니라고 판단하면 끝까지 아니다라고 말할 성격.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견적을 뽑기 위해 대놓고 간을 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명동 사채왕 허대부를 향해 목례를 올렸다.
내가 직접 찾아왔지만 피차 서로 간에 비굴할 필요 없는 사이.
파바바밧.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씨익.
허대부를 향해 생긋 웃었다.
“허어.”
짧은 신음을 흘리는 허대부.
“재밌는 녀석이 찾아왔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로써만 봤던 명동 사채업자.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허대부 앞쪽에 놓여 있는 손님용 방석.
“앉고 싶으면 앉던가.”
받아치는 첫마디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뻔뻔해지기로 했다.
“차 한잔 주시겠습니까.”
나를 안내했던 말 못하는 미부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허대부를 보니 여인은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허대부에게는 정실 아내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식운도 마찬가지.
재물을 얻었지만 가정까지는 얻을 수 있는 복이 관상에는 없었다.
하늘의 공평한 이치.
미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너 뭐하는 녀석이냐?”
무례하게 보였을 수도 있는 내 행동.
허대부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다만 숨기지 않는 강한 호기심.
허대부 어른,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처음이지?
“대부 어르신.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잽에는 잽이 제맛.
나를 지그시 노려보는 허대부.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 눈알처럼 예리해졌다.
그리고.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