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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장. 자식이라는 이름 (2) (607/1,284)

610장. 자식이라는 이름 (2)

사각사각.

주름진 손이 바쁠 것 없이 움직였다.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평창동의 대저택.

파릇한 잔디가 고개를 내미는 마당에서 머리칼이 새하얀 노인이 분재에 집중하고 있었다

노인의 온화한 얼굴에는 얇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두툼한 안경은 노회한 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상함과 인자함이 넘치는 외모는 그가 만지고 있는 분재를 닮았다.

작지만 굽이굽이 휘어감아 올라간 소나무 분재는 한눈에 봐도 대단해 보였다.

정성이 어지간히 들어간 고가품.

노인은 자신의 손에서 생명을 얻어가는 분재에 흠뻑 마음을 담았다.

“요즘 바쁘더냐.”

시선을 분재에 두고 있으면서 앞쪽 의자에 공손하게 앉아 있는 아들을 향해 묻는 노인.

“조율할 일이 몇 개 들어왔습니다.”

손대균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존재.

대한민국 법조계의 큰 어르신이라 불릴 수 있는 대법원장 출신의 손국중.

리앤장의 실질적 주인이었다.

“그래 요즘 일거리가 많을 시기지…… 새로운 봄이 왔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국중은 아들과 대화를 나눴다.

손에 찻잔을 들고 있던 손대균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봤다.

사회 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만 칩거하는 아버지.

해마다 주름살이 늘어나고 깊어졌다.

아직 정정했지만 해마다 떨어지는 기력은 어쩔 수 없었다.

“유리는 언제 데려올 것이더냐?”

“더 배울 공부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는 너무 밖으로 돌리면 안 되는 법이다. 혼처가 정해졌다. 이제는 그만 들어오라고 전해라.”

손국중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담고 있는 기운은 묵직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손대균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틀.

아들의 반대 의견에 손국중의 눈썹이 역팔자로 변했다.

“다르다라…….”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아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는 손국중.

“변했구나.”

아들의 변화를 눈치챘다.

지금껏 자신이 내린 말에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과거 자신의 감춰진 진짜 모습을 알고 잠시 괴로워했던 시절을 빼고 말이다.

“아버님. 유리와 주혁이는 제 자식입니다.”

길게 말하지 않는 손대균.

파바밧.

부자간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 너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환갑이니…… 세상 살 만큼 살았구나.”

순국중은 늙어가는 아들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은 모두에게 참 지독한 시절이었다.”

손국중은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사각사각.

다시 분재를 매만지는 손길.

“배고프고 더럽고 미래가 없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사는 게 모두의 지상 목표였다. 일본 놈들은 전쟁 물자로 곡식뿐만 아니라 솥까지 뜯어갔다. 춘궁기에는 익지도 않는 보리와 풀을 씹느라 아이들 입술은 언제나 파래 있었다. 부모가 능력 없는 집안은 모두 배를 쫄쫄 굶거나 진짜 죽어 나갔다. 요즘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들이 그 시절에는 널려 있었다.”

담담한 손국중의 말투는 손길처럼 느릿했다.

“우리 집안은 일제에 협조한 까닭에 잘사는 편이었다. 배고픔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견지명이 계셨던 네 할아버님이 날 위해 모든 걸 투자하셨다. 배운 자만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아시는 분이셨지.”

손국중의 회상하는 말 속에서 그 시절이 그대로 묻어났다.

“일제가 패망하고 국가는 좌익과 우익, 3.8선으로 두 조각이 났다. 불법이 판을 치고 하루에도 죽어 나가는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격동의 시절……. 난 아버지의 탁월한 선택 덕분에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권력에 빌붙어 승승장구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권력기관에 끌려가 반병신이 되어 나왔다. 대법원장이 됐다.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내 가족을 살리는 일이라면 변절자, 나라를 팔아먹은 자, 정권에 아부하는 자 모두 다 상관없었다.”

과거를 고백하며 손국중은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희들뿐만 아니라 손씨 집안은 지금껏 잘 살아왔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다른 자들이 똑같이 선택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살기 위해 양심을 파는……. 난 지금도 후회스럽지 않다. 아니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손국중의 목소리에는 강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대균아…….”

“네…… 아버님…….”

“네가 배가 불렀구나.”

“!!!”

“만약 네가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들이 가만있을 것 같더냐?”

손국중의 조용한 물음.

파르르.

손대균은 대답 대신 몸을 떨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을 권력과 돈의 카르텔.

“유리와 주혁이가 친일파 범죄자의 자식으로 평생 손가락질당하며 사는 걸 볼 수 있느냐?”

냉정하고 현실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

손대균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내가 권력에 아부하고 타인을 누르고 찍어 번 돈으로 내 자식들은 평안하고 행복하게 먹고 살았다. 너 또한 그러했다. 그런데 네가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더냐?”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 손대균은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업의 무게.

“그냥 이렇게 살자꾸나……. 인생 살아보니 다 무상하더라. 너와 내가 죽어야 아이들에게 굴레를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 그때까지 버티자꾸나……. 부모가 자식을 위해 무얼 못해주겠느냐…….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는 걸 알아도 그냥 걷자꾸나……. 아들아…….”

할 말을 다하고 다시 분재에 집중하는 손국중.

“크으.”

고개 숙인 손대균 입에서 짐승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벗어날 수 없는 지옥 순례자 같은 인생.

깨어나던 양심이 자식이라는 이름 앞에 날카로운 창과 칼에 난도질당한 듯 아파왔다.

***

2013년 3월 3일 일요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조윤태 변호사님을 만났다.

“동룡이 대웅 건설을 노리고 있다.”

“……그게 가능합니까?”

회귀 전에는 없던 합병 시나리오다.

제2의 IMF가 본격 조짐을 보이던 2020년에 망조가 들었던 동룡 그룹.

나비 효과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나로 인해 뭔가 틀이 틀어졌음이 확실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 동룡 사업 규모와 자산은 대웅 건설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도마뱀이 아나콘다를 삼키는 격이지.”

“그런데 노린다는 말씀은 뭡니까?”

나의 최측근인 조 변호사님을 불렀다.

오래 전부터 지시해 두었던 대웅 건설 인수 문제.

삼우 로펌은 기업 합병 인수팀이 담당하고 있어서 최신 정보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

“가끔 세상 살다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특히 권력과 유착된 기업들의 비상식적 인수합병은 종종 있어 왔다. 금오가 대웅 건설과 한국 통운을 삼켰을 때 같은 경우 말이다.”

“동룡이 정권 실세에 줄을 댔군요. 그것도 주순자에게.”

“어? 너 알고 있었어?”

이쯤이면 서서히 상류층에 쫙 돌았을 소문.

주순자의 위명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칠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는 칼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나는 법.

깨닫고 배우지 못한 자들의 칼끝은 어느 날 자신을 찌르게 된다.

그걸 주순자는 몰랐다.

“저도 눈과 귀가 있습니다.”

“흐흐. 장 회장 많이 컸어. 고등학교 시절 조폭들하고 드잡이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를 놀리는 조윤태 변호사님의 과거 회상 모습.

“그건 조 변호사님도 마찬가지시죠. 고삐리 도움으로 지금 이 자리에 오르셨잖아요.”

“그래. 고맙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장 회장이 좋아.”

조윤태 변호사님 그동안 참 많이 변했다.

나름 대쪽 같던 성품이 부들부들해졌다.

“시기는 언제로 보십니까?”

“조국일보를 비롯해 중요 신문사에서 언플 중이다. 산업은행이 보유한 민간 기업들을 팔라고 칼럼이랑 사설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특히 대웅 건설을 콕 찍어서 말이다.”

“정치권이 가만있겠습니까? 특히 야당 말입니다.”

“정치인들은 웬만하면 믿지 마라……. 야당 중진들에게 이것저것 떨어질 게 많다. 명분만 확실하다면 가능하지. 국책 은행이 민간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잖아. 국민들이야 자금 회수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테고 말이야.”

잘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였다.

뒤에 주순자 말고 일송회가 있는 게 확실했다.

조국일보가 움직였다면 100퍼센트다.

“그래도 몇 조 이상 현금 박치기가 가능해야 하는데 동룡이 그 여력이 됩니까?”

“여기 자료 있다.”

조 변호사님이 서류 하나를 가방에서 꺼내 내밀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

“동룡이 몇 년 동안 바이오를 비롯해 몇 개 사업을 하다 말아 먹었다. 시멘트나 정수기, 증권 회사 같은 안정적인 사업을 놔두고 주현태 회장이 악수를 뒀어.”

“그 사업체들이 규모가 크지 않지만 캐시 카우 역할은 톡톡히 해냈겠군요.”

“그렇지. 아직 짜 먹을 게 남은 그 기업들을 바탕으로 현금을 끌어 모았다.”

“얼마나요?”

“1조.”

“……1조요? 생각보다 많이 모았군요.”

“흐흐. 주현태 회장이 입고 있던 빤스까지 벗어 맡겼다는 말이 돌고 있다.”

“금오가 나가떨어진 걸 보고도 겁이 없군요.”

“사업병이 원래 그래. 대웅 건설을 삼키면 재계 순위가 확 오르잖아. 정권과 친하다면 대출받아 때우면 그만이고 말이다.”

이놈의 지겨운 정경유착.

모두 다 국민들이 낸 세금이다.

내 돈 아니라고 마음껏 퍼주는 정치인과 권력자들의 행태에 치가 떨렸다.

올바른 곳에 집행되어야 할 세금.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자신을 지켜 줄 국가를 위해 지급하는 피 같은 돈이다.

그런데 위정자들은 그걸 개인금고처럼 사용했다.

벼락 맞아 뒈질 인간들.

“대웅 건설 작업 시작하십시오.”

“그럴 줄 알았다. 세팅은 끝났다. 조용히 있다가 입찰공고 나오면 벼락 같이 휘몰아쳐서 끝내자.”

먼저 판이 깔렸다.

다른 기업과 달리 정권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해외에서 들어오는 나의 자금이다.

외국계 자본이 망해가는 건설사를 구입하는 데 방해할 멍청한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발효된 FTA.

제대로 써먹고 있었다.

“대웅 건설이 확보한 부지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2조는 훌쩍 넘을걸?”

“좋군요.”

“금구 장 회장이 그거 빼먹으려고 덤볐다가 밑천 털렸잖아.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능력은 개뿔도 없으면서……. 쯧.”

금구 장오구 회장이 욕심은 많았다.

비행기나 날리고 타이어나 팔 것이지 무리하게 욕심을 냈다.

두꺼비상은 대부분 인생 막판에 무너지는 관상이다.

탐욕스런 자의 자연스러운 업의 결과.

중국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 타이어 공장을 설립하고 이것저것 주워 먹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바였다.

앞으로 몇 년 후에 다 팔아먹고 구멍가게 주인이 된다.

“대웅 건설 자신 있으시죠?”

“실탄 빵빵하지?”

“얼마면 됩니까?”

“채권은행들하고 쇼부 치면…… 2조 5000억 정도면 될 것 같다. 해외 투자금이라고 포장하면 다들 넘어간다.”

“외상없이 쭉 갑니다.”

“그래. 은행돈 빌리면 골치 아파. 자기돈 없이 사업하는 합법적 사채업자들이야.”

“지분 배율 조율해 주십시오.”

“로버트 낄 거지?”

“당연하죠.”

“이거 비싼 거다.”

“수임료 듬뿍 받으십시오.”

“……어차피 로펌도 네 거라 이거냐?”

“그게 그거 아닙니까.”

“부러운 놈…….”

“저도 제가 부럽습니다. 하하하.”

어머니가 말했다.

동룡을 확실히 박살내라고.

자식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괜찮겠냐? 동룡 주 회장이 네 외삼촌이잖아.”

“개새끼죠.”

“……불쌍한 주 회장.”

어머니 말씀을 듣고 가족관계를 끊었다.

이제부터는 남보다 못한 적이다.

“그런데 누굽니까?”

“뭐가 말이냐?”

“주 회장이 누구한테 빤스를 벗어줬습니까? 은행은 아닐 테고…….”

동룡 재무 상태상 아무리 정권의 도움 받는다고 해도 현금 1조 확보는 무리다.

다른 조력자가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동룡 잡아먹는 거냐?”

“네.”

“……이번에는 나 회장 먹어도 되냐?”

“송충이는 솔잎~ 법조인은 법조계에~.”

친하다고 막 퍼주는 자선 사업 하는 거 아니다.

“농담이다. 나도 내 주제 잘 안다~ 흐흐.”

“누굽니까?”

다시 한 번 물었다.

동룡 주회장의 빤스를 받고 돈을 준 그자.

조윤태 변호사님이 날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명동…… 허대부.”

“허대부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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