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9장. 자식이라는 이름 (606/1,284)

609장. 자식이라는 이름

촤아아아앗.

저녁이 되면서 낮보다 강해진 바닷바람.

겨울철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방파제에 부딪친 파도가 바람을 타고 일어나 부서지며 도운중 회장에게 튀었다.

장태산은 떠났다.

대웅 건설을 가볍게 일시불로 인수하겠다고 농담처럼 말하던 그놈.

진심이 확실했다.

한참 잘나가던 시절 무려 70조에 가까운 그룹을 운용하던 도운중이었다.

그런 그도 품어보지 못한 흉내 낼 수 없는 자신감.

이리저리 능력 없는 놈들 손에 몸을 줘야 하는 싸구려 신세가 돼 버린 대웅 건설을 부탁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날아왔다.

나름 조심스럽게 판을 깔고 난 뒤 말을 건넸는데 녀석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승낙했다.

허탈했다.

조바심을 냈던 자신이 초라했다.

“세월이…… 흘렀어. 찬란했던 내 젊은 청춘의 세월이…….”

방파제 위에 서서 도운중은 거친 바람을 맞았다.

젊은 시절 답답하면 찾아왔던 이곳 방파제.

폭풍우 치던 날에도 든든하게 버티던 다리가 거친 밤바람에도 휘청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렸다.

뼈저리게 깨닫게 된 인생무상의 현실.

“허허허허…….”

기운 없이 낮은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거대 그룹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돼버렸다.

띠리리리리리리.

고집스럽게 바꾸지 않고 있던 구형 핸드폰이 울렸다.

손때가 묻어 선뜻 스마트폰으로 바꾸지 않았던 도운중.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자신도 영락없이 고집스런 노인이 됐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아빠?

통화 버튼을 누르자 막내딸 도희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애비다.”

마지막 여인에게서 얻은 핏줄.

다른 자식에 비해 해준 것도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막내딸.

그런 딸을 볼 때마다 도운중은 흐뭇했다.

바람둥이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시대에는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았다.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 서고, 미녀를 품기 위해 탐욕을 부렸다.

- 강원도야?

“그래……. 여기 강원도다.”

- 소리 들으니까 바닷가 같은데 뭐해? 빨리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 괜히 옛날 생각한다고 찬바람 맞다가 독감 걸려.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딸의 걱정 섞인 잔소리가 오늘따라 처량하게 가슴을 울렸다.

막내딸이 자연스럽게 걱정할 만큼 부정할 수 없는 늙은 노인이 됐다.

“지금 차로 가는 중이다.”

통화하며 걸음을 옮기는 늙은 거인의 그림자.

- 장 회장님 만났지? 어때? 예전보다 많이 변했지? 정말 괜찮지 않아?

다다다 끊이지 않고 수다를 떠는 도도희.

“그렇게 좋냐?”

- 으흐흐. 내가 한때 아빠를 원망했지만 요즘은 아니야. 장태산 회장님에게 날 보내 준 것만으로도 이자까지 갚은 거야.

도도희의 행복해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남자에게 매료된 여인의 모습이 딸에게서 느껴졌다.

도운중 회장은 막내딸의 밝은 목소리에 쌉싸래한 쓴맛을 맛봤다.

장태산은 결코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잘 나가고 똑똑한 데다 능력 또한 가늠하기가 힘들다.

기본적으로 주변에 여성들이 끊이지 않을 인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

뛰어난 사주쟁이가 한 말이 있다.

남자 재복(財福)을 일컫는 다른 말이 여복(女福)이라고 했다.

“시집은 안 갈 거냐?”

딸 가진 아비의 당연한 걱정.

- 인생 100세 시대야. 좀 늦게 가도 돼. 아니 안 해도 돼. 아빠가 말했잖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널렸다고~. 나 일하다 죽을 거야. 그 남자 곁에서…….

딸의 가슴 떨리는 고백.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딸이다.

부모라 해도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책임질 수도 없는 법.

“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꾸나.”

- 나 방금 대웅 건설 인수 건으로 지시받았어. 서울로 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헤에에~.

도운중의 자식 아니랄까 봐 일중독에 빠진 도도희.

“그래……. 올라가면 전화하마.”

- 아빠……. 내가 늦게나마 많이 사랑해.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해.

갑작스런 딸의 고백.

“나도…… 네가 딸이라서 감사하다.”

- 사랑해~ 빠빠.

어린 시절 미국에서 유치원 다닐 때 들려줬던 ‘빠빠’.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인사하는 도도희.

통화가 끝났다.

휘리리링.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차갑고 매섭지 않았다.

“……그래도 인생은 헛살지 않았나보구먼.”

기업 확장으로 계열사를 늘리는 게 자식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도운중.

지금에 와서 허망한 대웅이라는 자식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평생을 바쳐 키어온 자식보다 살살거리며 애교를 떠는 막내딸.

녀석이 진짜…… 자식이었다.

***

“맛있어?”

“역시 엄마표 된장국이 최곱니다!”

엄지를 척 세웠다.

“나두! 엄마 차돌박이 된장국 최고!”

“……솔직하게 말하면 오빠 요리도 맛있지~.”

“장주희! 너……. 엄마를 배신하다니!”

“됐다. 나도 태산이가 해준 요리가 맛있단다~.”

2013년 2월의 마지막 날.

하루의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갔다.

강원도에서 바로 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물론 알코올은 모두 내공을 이용해 날려버린 상태.

본가에 내려가지 않은 엄마가 늦은 저녁밥을 차려냈다.

방학 중이지만 학교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쌍둥이도 자리를 함께 했다.

3월 4일 개강을 앞두고 모처럼 갖는 가족 휴식.

도운중 회장과의 만남은 짧은 여운을 남겼다.

회장님이 기다리고 있던 그 방파제.

미래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 신부’에 나왔던 그 한적한 장소였다.

그 명소를 일찍부터 혼자 찜하고 있었던 회장님 안목이 참 탁월했다.

젊어서 빛을 발했을 작업남의 소질이 엿보였다.

도운중 회장님의 소원을 흔쾌히 들어줬다.

대웅 건설은 나도 매입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일 건설이나 TS 그룹 건설사로는 부족했다.

대한민국 탑3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대웅 건설.

그 정도 기업이라면 좀 더 수월하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도도희가 담당하고 있던 사업 추진 계획.

바로 실행을 지시했다.

도운중 회장이 잃어버렸던 대웅이라는 이름.

딸인 도도희가 되찾는 그림도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먹어봐.”

엄마가 자상하게 웃으며 소불고기를 젓가락으로 숟가락 위에 올려주셨다.

부모 자식 사이에나 가능한 일.

성인이 되어서 받아먹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 얼굴이 웃는 모습과 달리 어딘가 어두웠다.

생각이 많은 듯 몹시 피곤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버지 보고 싶으세요?”

퍼뜩 스친 생각.

“응? 아니…….”

“엄마 아빠 아직도 신혼이야? 아빠 보면 지금도 설레?”

막둥이 주희가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소리야.”

“와아! 엄마 얼굴 빨개졌데요~ 이러다 늦둥이 동생 보는 거 아냐?”

그새 대학교 4학년이 된 주희가 엄마를 놀렸다.

다 큰 딸은 엄마의 친구라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갔다.

아들이 채울 수 없는 여자들만의 우정이 느껴졌다.

“우리 엄마 표정이 안 좋은데? 사채 빌렸어?”

주아도 예전과 달리 성격이 많이 변했다.

지난 생에는 소심해서 자신을 희생하기만 했던 녀석이 가벼운 농담도 할 줄 알았다.

“엄마.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주말을 앞둔 늦은 저녁 시간.

“우리 술 한잔 할까?”

느닷없이 엄마가 술 얘기를 다 했다.

“콜!”

“흐흐. 안주가 좋은데 술이 빠지면 안 되징~.”

늙은 대학생 아니랄까 봐 술이라는 말에 반짝반짝 빛나는 쌍둥이.

“엄마는 평소 마시는 화이트 와인? 오빠는?”

“난 레드.”

“난! 소주!”

“흐흐. 난 소맥!!!”

한 핏줄이지만 각자 개성도 달랐다.

쌍둥이가 술을 깔았다.

“어마마마. 소녀가 한 잔 따르겠사옵니다.”

주아가 공손한 자세로 엄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오라버니는 제 잔을 받으시옵소서.”

주희가 눈웃음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오냐~ 장씨 궁녀는 한 잔 따라 보거라.”

“알겠사옵니다. 상선 어른~.”

“…….”

놀리려다 졸지에 내시가 됐다.

잊고 있었다.

한국대 의대가 정글이라는 걸 말이다.

법학과와 달리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고 갈굼이 넘쳐난다는 전설의 의대 정글 숲.

그곳에서 살아남은 주희 스킬이 만만치 않았다.

“돌아라 회오리!”

나도 모르는 회오리 공법으로 소맥을 완성한 주희.

침을 삼키며 술을 바라보는 막둥이가 이제는 무서웠다.

귀여웠던 쌍둥이의 모습은 이제 지워야 할 것 같다.

주아도 소주를 맛깔나게 따랐다.

모두의 잔이 채워졌다.

“다들 이렇게 건강하고 밝게 커줘서 정말 고마워……. 엄마는 더 바랄 게 없다.”

와인잔을 들고 엄마가 대견해 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항상 옆에서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사랑해~.”

“난 시집 안 가고 평생 엄마랑 살 거야~.”

평범하고 따스한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모두 술을 비웠다.

“크으…….”

“아오! 쥑이네!”

엄마와 오빠 앞에서 재롱을 떠는 두 여동생.

진짜 많이 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차츰 어두운 기색이 옅어지며 본래의 표정을 회복한 엄마.

“설거지 부탁한다.”

“예썰!”

“오빠. 엄마 용돈 좀 드려~.”

눈치를 챈 쌍둥이들이 뒤로 빠졌다.

“무슨 일 있죠?”

엄마답지 않게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이유.

빈 와인 잔을 다시 채워드렸다.

“오늘……. 동룡 주현태를 만났다.”

배 다른 오빠를 남처럼 얘기하는 엄마.

단 한 번도 오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거다.

“그래요?”

오늘은 동룡에 관한 그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다.

“……아직도 그 성격이 안 변했더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래. 변할 사람이 아니지. 그 악마 같은…….”

외할머니의 죽음을 엄마는 아직 잊지 못하고 계셨다.

남편과 자식을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해 시골까지 숨어들어 죽은 듯 살았던 엄마.

지난 생에 그런 원수 같은 동룡 주 회장에게 무릎 꿇었던 것이다.

오로지 나의 사회 활동을 위해 직장을 구걸했다.

엄마를 죽인 그 원수 앞에…….

“뭐라고 하던가요?”

찾아온 이유는 짐작이 됐다.

따뜻한 형제애는 절대 아니다.

대신 협박을 하러 찾아왔을 게 확실했다.

최근 들어 뭔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했던 동룡.

“엄마와 내가 빼돌린…… 아버지의 유산. 그것을 내놓으라고 소리 치더구나…….”

말을 하면서도 서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애써 참아내는 엄마.

때가 됐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의리는 이 정도면 다 지켰다.

감히 겁도 없이 제 발로 엄마를 찾아와 협박한 비열한 인간.

“돌려주셔야죠.”

“……태산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당한 수모와 그 모든 한……. 제가 돌려줘도 되겠습니까?”

엄마에게 진중하게 물었다.

자식으로서의 예의를 지키는 마지막 형식적 절차였다.

동룡 주현태 회장.

그에 대한 원한은 엄마가 더 컸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엄마.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 속의 불길.

“아들……. 할 수 있다면…… 가장 무서운 불벼락을…… 그 악마에게 돌려 주거라!”

회귀의 전설 2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