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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장. 야인(野人)의 부탁 (604/1,284)

607장. 야인(野人)의 부탁

“오랜만이구나…….”

“네. 아주 오랜만인 것 같네요.”

중부대학교 이사장실.

주설란은 이복 오라버니 주현태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내심 놀랐다.

약속은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주중에 이틀 정도는 서울에서 보냈다.

하루는 갤러리.

남은 하루는 학교 일을 처리했다.

서류보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총장을 비롯해 임직원들 모두 성실하게 일을 해 관여할 바가 거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진행된 재단에 관한 업무를 살펴보고 사인 정도 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다.

재벌가의 자손답게 주설란 역시 일처리는 정확하고 꼼꼼했다.

“넌 하나도 늙지 않은 것 같구나.”

주현태는 여동생 주설한을 보며 진심으로 놀랐다.

아이들이 모두 이십 대 중반인, 오십 대에 접어든 여동생.

주름 하나 없는 얼굴과 탱탱한 피부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월을 거스른 듯 보였다.

“오빠는 많이 늙으셨네요.”

주설란은 눈에 보이는 대로 말했다.

과거 자신의 의견을 숨겼던 때의 모습과 달랐다.

이사장실 문 밖에는 아들이 붙여준 경호원이 넷이나 있었다.

더 이상 과거에 집안으로부터 내몰리던 주설란이 아니었다.

당장 부르면 언제든 안으로 달려올 것이다.

이제는 힘이 없어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그 사람이 아니다.

냉정한 카리스마를 유지했다.

재산 정리 때문에 친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게 확실한 주현태.

그런 주현태를 면전에 놓고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이제는 과거처럼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들이 맡겨준 재단과 갤러리 가치는 준 재벌 급 수준 정도는 됐다.

더군다나 아들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어설픈 동룡 그룹 회장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설란이…… 많이 컸구나.”

주현태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주설란을 향해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을 던졌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의 눈빛은 독사처럼 차가웠다.

입으로는 여동생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지만 눈빛은 날 선 칼끝처럼 예리했다.

마치 원수를 마주한 듯이.

“애가 셋이잖아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뭐 여기서 제가 더 커야 하나요?”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꾸하는 주설란.

순간 파르르 주현태 눈동자가 분노로 흔들렸다.

명백한 도발.

‘그때……. 같이 보냈어야 했어. 그때…….’

계모로 인해 죽는 순간까지 괴로움을 안고 살았던 친모.

물론 어릴 때부터 부모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사업에 미쳐 밖으로만 도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부터 그런 아버지를 주현태는 이해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지만 큰 회사를 경영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를 가도 도련님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서도 재벌 아들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아버지가 회장이었으니 당연한 대접이라는 것을 주현태는 일찍 깨달았다.

그만큼 존경했던 아버지.

하지만 주설란이 눈앞에 등장했을 때 그 모든 신뢰와 감사는 박살났다.

주현태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그날 주설란과 계모를 아버지가 집에 데려왔다.

아버지의 행복에 겨워 활짝 웃는 웃음을 그날 처음 봤다.

늘 집에서는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 주영석 회장.

이복동생이라고 소개한 주설란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했다.

어머니에게는 필요 없는 말 이상은 건네지 않았던 분.

계모와는 끊이지 않고 자상하게 대화를 나눴다.

고통스러운 피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참아내던 친모.

그 때부터 주현태는 모든 면에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버지의 회사를 빼앗아 어머니가 느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계획대로 세월이 흘러 경영권을 손에 쥔 주현태는 과감하게 계모를 제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기에 상속 분쟁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변호사와 계획을 짜고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빼돌렸다.

그때 쥐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면 궁상떨며 살아도 죽음은 면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겁도 없이 계모가 직접 지분을 요구했다.

친분 있던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사고로 위장해 처리해 버렸다.

주설란은 그래도 피가 섞인 여동생이었기에 죽이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어설픈 동정심에 후한을 남긴 것에 후회가 찾아왔다.

주설란을 보고 있자니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어머니의 분노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은 뭐죠? 절 살려둔 걸 후회하는 눈빛이군요…….”

“!!!”

여동생의 정확한 한마디에 주현태는 화들짝 놀랐다.

준 재벌 급 재단을 운영하는 이사장 신분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진짜 많이 컸다. 주설란. 크크크.”

주현태는 더 이상 본심을 감추지 않았다.

겨우 목숨이나 붙어 있을 줄 알았던 여동생이 적수가 돼 돌아왔다는 게 차라리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측은지심도 일으키지 않고 과감하게 계모가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제가 좀 바빠요. 요건만 간단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게 차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명백한 축객령의 표시.

“그래 피차 웃으면서 만날 사이는 아니지.”

계모를 없애고도 주현태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친모가 흘렸던 눈물 값이라고 치부했다.

늦었지만 지금 와서 주설란을 없앤다 해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내놔라.”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

“네? 뭘 말이에요?”

주설란은 당당한 오빠의 요구에 어이가 없어 물었다.

“……너와 천박하고 간악했던 네 엄마가 빼돌린 우리 아버지 재산. 모조리 내놓으라고!!!”

“뭐, 뭐라고요???”

***

“라면 좀 끓여봐라.”

“네?”

“네가 끓여준 그 라면 맛이 아직도 혀끝에서 맴돈다. 한번 시원하게 끓여 봐~.”

오랜만에 만난 이 할배 제 정신이 아니다.

몇 년 전에도 갑작스럽게 낚시터로 불러내 라면을 끓여라 하더니.

하나도 안 변했다.

대신 그때는 내가 어려서…….

“싫어?”

“아닙니다! 고춧가루에 달걀 두 개 넣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여전히 그가 즐겨먹던 라면 스타일을 기억했다.

고춧가루와 달걀, 김치가 들어가는 짬뽕파 신자.

한때 대한민국을 호령했던 사자는 늙어도 포스가 남다르다.

시원하게 빠진 앞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클클. 난 네 녀석이 착해서 좋더라.”

“제가 착한 거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하하하.”

명색이 나도 회장, 하지만 이 분에게는 뭔가 많이 밀렸다.

천하의 오정 회장에게도 충언의 말을 과감하게 하는 나였지만 이 분에게는 그게 안 됐다.

세상을 초탈한 것 같은 선인의 풍도가 은연중에 풍겼다.

욕망을 이겨낸 자.

촤아아아앗 촤아아아앗.

방파제에 부딪친 파도가 포말을 일으켰다 이내 사라졌다.

동해의 이름 모를 작은 항구의 방파제.

경호원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오가는 이가 거의 없는 곳에서 아직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분.

치이이익.

바람막이를 세우고 버너에 불을 켰다.

재료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타다닥 타다다닥.

물이 끓자 라면과 스프를 털어 넣었다.

잘게 다져진 김치도 팔팔 끓은 라면에 투척했다.

요리 스킬이 늘어 대충 만들어도 미슐랭 급 라면 요리가 됐다.

“다 됐습니다.”

라면을 빙자한 간이 찌개.

“너도 한 잔 해라.”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오랜만에 갖는 자리였다.

도운중 회장님 덕분에 일송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전혀 몰랐다면 사달이 났을 것이다.

도도희의 도움도 암암리에 많이 받았다.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요즘은 소맥이 대세더라.”

외국에서 살던 분이 별걸 다 알았다.

맥주와 소주를 적당량 따라 기를 담아 섞었다.

“오래오래 사십시오.”

“그거 늙은이에게 욕인 거는 아냐?”

“…….”

여든을 훌쩍 넘기고 있는 야인(野人).

장수하시라고 덕담을 해도 난리다.

“그래도 그 마음은 받으마~.”

빙그레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꿀꺽.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크으. 죽이는구나.”

첫 잔을 좀 진하게 탔더니 크 소리를 내며 만족해하는 도운중 회장님.

후루루룩.

불지 않아 탱탱한 면발을 젓가락으로 듬뿍 건져 면발 후려치기로 흡입했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칼칼한 국물 한 숟갈을 떠서 마셨다.

큼직한 달걀이 숟가락에 올려지더니 곧 사라졌다.

“약 탔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도운중 회장.

혀로 입술을 훑으며 농담을 진담처럼 던졌다.

“죽이죠?”

“……나랑 라면 가게 하나 차리자.”

도운중 회장이 하는 최고의 칭찬이다.

“사업 다시 하시게요?”

“클클클. 그렇다는 말이지. 저승사업 예약되어 있다. 조용히 사라져 줘야 내 무덤에 사람들이 침을 안 뱉을 거 아니냐.”

지난 세월의 회한이 담겨 있는 의미의 말들.

“대낮에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됩니까?”

이분 밀린 세금이 어마어마했다.

2020년까지도 심심하면 등장했던 도운중 회장의 체납 세금 문제.

“이번 정권 실세가 과거에 나한테 도움을 받았어.”

“설마 주순자요?”

“오! 주순자도 아는 것이냐?”

도운중 회장이 정말 놀라며 확인해왔다.

“저도 이제 좀 컸습니다.”

“조심해라. 그 집안사람들이 욕심이 좀 많아야지. 빼돌린 자금이 나하고 비교도 안 되게 많아.”

“수천억 단위는 되겠죠.”

“……그것도 알아?”

2020년을 살다왔으니 다 아는 수밖에.

그 집안사람들이 조정희 대통령의 해외비자금 상당수를 빼돌려 착복했다.

미래에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알았다.

“주순자는 아닌 것 같고…… 오태용입니까?”

“허어……. 내 뒷조사를 한 것 같지는 않고…… 돗자리 깔아라.”

“오태용이 오정 출신 아닙니까. 기업인과 당연히 친하지 않겠습니까.”

“귀신같은 녀석. 이제는 혼자서도 잘 살 것 같구나.”

지금까지도 셀프로 잘 살아왔다.

또로록.

빈 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바다를 바라보는 도운중 회장.

“좋구나. 너도 좋지 않으냐?”

“뭐가 말입니까?”

“바다는 잔잔하건만 거센 파도는 잔바람에도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 저렇듯 깨지고 부서져 거품이 되는 모습이…… 우리네 인생과 똑같지 않느냐. 젊은 시절에는 다들 성난 파도처럼 포효하지……. 지나고 나면 모든 시절이 거품 같은 것을…….”

확실히 노년의 세월은 삶의 지혜를 깊게 받아들였다.

하나의 현상 앞에서 인생을 반추하는 삶.

“깊은 바다처럼 평정심을 유지해라. 가끔은 파도처럼 무섭게 휘몰아칠 필요가 있지만 그 본바탕은 잊지 말아라. 그러면 인생에 실패할 일이 없을 게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거인의 진심 어린 충고.

“가슴에 담겠습니다.”

“클클. 늙은이 말 들어줘서 고맙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온 현명한 노인의 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보약과 같다고 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삶의 노하우였다.

꿀꺽.

말없이 술을 마셨다.

노인과 바다, 그리고 라면과 술.

묘한 조합이 술맛을 더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제 본론을 얘기할 때.

아직도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할 도운중 회장이 나 보겠다고 한국에 왔을 리 없다.

나를 직접 만나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눈치 한번 빠르구나.”

희미하게 웃는 주름 가득한 미소.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쉽게 동조할 수 없는 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수십조 대기업을 운영하던 분이 돈 몇 푼 꾸자고 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좀 도와다오.”

“어떤…… 걸 말씀입니까?”

어두워진 낯빛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 도운중 회장.

“내 새끼들 좀 구해다오.”

“네? 새끼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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