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장. 악의로부터 빚지지 않는 이들
삐이잇.
현관 인터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남편이 출근한 뒤 간단하게 설거지와 청소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던 양옥자.
마침 즐기던 아침 드라마를 볼 시간이었다.
오전 11시에 부녀회 회장인 그녀는 부녀회 임원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천일 건설의 임대 아파트 문제로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해서다.
양옥자는 이번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IMF 시절 경매로 나온 지금 집을 5000만 원에 그냥 운 좋게 잡아 내 집을 마련했었다.
9000만 원에 정상매매 되던 아파트가 갑자기 반값이 됐다.
그 경험이 양옥자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젊었을 때부터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였다.
2000년도에 접어들어서는 인근 아파트 다섯 채를 더 얻어 본격적으로 임대 사업자가 됐다.
국가에서 어려운 건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임대 사업자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대출에 대출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1000만 원이면 아파트 한 채를 더 늘리는 일이 쉬워졌다.
요즘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유행하는 갭 투자의 선두주자.
시청 공무원인 남편 월급을 제외하고도 다달이 들어오는 월세 수입이 엄청났다.
대출이자를 내고도 여윳돈이 넘쳤다.
구입 시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파트 가격이 상승한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19평 아파트가 얼마 전에는 3억을 찍었다.
평생 먹고 살 부를 일궈놓은 셈이다.
그 자금을 종자로 이용해 지금은 인근 아파트뿐만 아니라 빌라를 매입하고 있다.
경기가 어려워지는 시점마다 서민들이 간신히 소유하고 있던 빌라들이 경매로 쏟아져 나왔다.
쓸 만한 물건을 골라 낙찰받아 살짝 리모델링해 원가를 넘게 전세를 내놓거나 월세로 돌려 대출 이자를 충당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땅 짚고 헤엄치기 투자.
부동산 자산만 수십 채가 됐다.
시중 거래 은행에서는 진작부터 VIP 대우를 받아 왔다.
은행장이 나서서 특별 저금리로 돈을 빌려줄 정도가 됐다.
앞으로 열 채 정도를 더 얻어 오십 채를 맞춰 소유하는 게 목표였다.
대학생인 아이들 둘에게 부족함 없이 물려주고 남으면 노후 자금으로 남겨 럭셔리하게 살 생각이었다.
특히 요즘 아파트 값이 폭등 중이어서 몇 채를 팔아 강남으로 이사를 갈까 계획 중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운전면허 시험장이 외곽으로 빠지고 개발 이슈가 있던 노른자 땅에 천일 건설이 임대 아파트를 신축 중이다.
서울 시청의 도움을 받아 시작된 사업.
분명 몇 년 전에는 일반 분양으로 시작할 것처럼 얘기가 되었었다.
하지만 천일 건설 주인이 바뀌면서 처음 약속한 것에서 틀어졌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는 임대 아파트.
인근 부녀회장들과 담합해 5000만 원 정도 아파트 매매 호가를 올릴 생각이었던 양옥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이 돌아갔다.
아파트를 사줘야 할 신혼부부 봉들이 빠져나가면 제대로 타격을 받을 게 뻔했다.
본때를 보여줘야 할 상황이어서 사람들을 선동해 깽판을 부렸다.
시청까지는 몰라도 구청장은 주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경찰들도 선뜻 개입을 꺼렸다.
민원을 넣어 일거리를 만들면 그들도 골치 아파지고 피곤해졌다.
남편이 공무원이다 보니 민원의 피곤함과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천일 건설.
공사장 입구를 막아 공사 차량들이 드나드는 걸을 방해했다.
건설사 대표가 몇 번 찾아왔지만 일반 분양으로 돌리기 전까지는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온갖 것으로 협박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공사가 지연될수록 손해가 많아지는 임대 사업장.
양옥자는 그간 쌓아온 돈독 오른 아줌마의 기세를 무섭게 각인시켜줬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맞닥뜨린 변호사인가 뭔가 하는 새끼를 만난 이후로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놈을 만난 다음부터 꿈속에 돌아가신 엄마가 보였다.
단 한 번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없는데 기분 나쁘게 자신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누구세요?”
인터폰을 들고 상대를 확인했다.
[집배원입니다. 등기 왔습니다.]
“등기요?”
얼굴이 익숙한 집배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양옥자 씨 맞으시죠?”
“네.”
“법원 소장입니다. 수령 확인해 주십시오.”
집배원이 사인을 요구하며 전자단말기를 내밀었다.
“법원 소장요???”
얼떨결에 사인을 하고 받아 든 두툼한 등기서류.
선명하게 북부지방법원 제3민사부.
서류는 한 개가 아니었다.
“이건 가압류 통지서 같은데…….”
법원 서류를 배송하는 집배원이 아는 체를 하며 건네고 등을 돌렸다.
“가압류…….”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양옥자.
찌이익.
급한 대로 서서 소장 서류 봉투를 찢어 열었다.
소장이라는 굵고 두툼한 글자 아래에 적혀 있는 뒷골이 당기는 내용.
“원고 천일 건설…… 소송대리인 삼우 로펌 변호사 장동석, 허경운, 이승일…… 피고 양옥자…….”
주소를 비롯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는 양옥자의 이름.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청구취지.
“손해배상의 소…… 피고는 원고에게 금 10억 원 및 이에 대한 2013년 2월…….”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양옥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공사 현장에서 그 젊은 변호사가 했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천일 건설에서 손해배상 소송이 들어왔다.
무려 10억짜리 손해배상.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멍해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대기업과의 싸움.
양옥자 눈앞이 하얘지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마, 말도 안 돼!”
놀란 마음에 나머지 서류 내용도 마저 확인하는 그녀.
당황스럽게도 가압류 결정 통지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양옥자.
그 변호사가 말했던 차가운 경고가 멍한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집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는 그 말.
헛말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안 돼! 안 돼에에에에에에에!”
양옥자는 현실로 다가온 눈앞에 서류 뭉치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몸이 이미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
- 신속하게 소장 접수하고 가압류까지 받아냈다.
“수고하셨습니다.”
- 수고는 무슨.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승소는 가능하죠?”
- 당연하지. 증거가 넘치는데 질수가 없지. CCTV를 비롯해 공사 방해로 인한 손실 금액이 객관적으로 산출 됐다. 집회신고 없는 불법 행위니 인심 좋은 판사 만나도 소가의 80퍼센트 이상은 확정이다. 집안 친인척 중에 대법관 정도 있으면 모를까.
조윤태 이사님이 냉정하게 상황을 알려줬다.
이런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니 정확할 것이다.
- 그 아줌마 소장 받고 기절 안 했나 모르겠다. 양옥자 그 양반 대단하더라. 나보다 자산이 많아. 평범한 공무원 와이프가 갭 투자해서 부동산만 수십 채더라…….
“확실하게 케이스를 만들어 주십시오.”
- 알아서 주저앉을 거다. 핵심 부동산이 가압류 됐으니 그걸 이용해 추가 대출도 힘들고…… 소송에. 1년 정도 지나면 항복하겠지.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 양반 우리 장태산 변호사한테 뭘 그렇게 대단하게 잘못한 거냐……. 이 정도면 꿈자리도 뒤숭숭했겠는데.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무서움을 잘 아는 조윤태 변호사님.
이해와 포용은 가당치 않았다.
계속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주면 자신의 불법적 행위가 마치 당연한 권리인 줄 착각할 인간형들.
그런 인간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다.
기회가 있을 때 선례를 남겨야 했다.
앞으로 천일 건설 임대 사업에 트집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한 케이스를 만들어 놓아야 했다.
갭 투자 부동산 부자들이 주로 애용하는 카페나 사이트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내용들이 빠르게 공유될 것이다.
천일 건설 사업장을 점거했던 양옥자.
아파트 부녀회 회장인 그녀의 개인 재산 상태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남편이 하위 공무원임에도 아이들은 모두 해외 유학 중이었다.
고급 외제차는 기본.
백화점과 거래 은행의 VIP인 것은 물론 인근에 있는 부동산 수십 채 보유.
그것도 자기 자본을 거의 들이지 않고 대출만 이용해 소유한 재산들이었다.
소유한 부동산은 아는 중개업자를 통해서만 전세를 내놓았다.
전세금을 받아 다시 돌려 계속 부동산 자산을 불려온 양옥자.
거품 부동산을 만들어낸 전형적 투기꾼이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자유 경쟁시장 경제라지만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혼자만 잘 살겠다고 미래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든 말든 곧 터질 폭탄을 넘기는 격이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개미떼 같은 다수를 보란 듯이 비웃는 자들.
정당하지 않은 불로소득에는 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조만간 술 한 잔 하시죠.”
- 불러만 줘라. 나 요즘 한가하다.
삼우 로펌은 대규모 자금 수혈로 업계 2위를 굳혔다.
리앤장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언제가 때가 올 것이다.
이익을 위해 법을 파는 장사치가 아닌 진정한 법률 서비스를 지향하는 로펌.
내가 그렇게 꼭 만들 것이다.
띠릭.
통화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장 변. 전화 끝났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야. 어서 앉아~.”
이곳은 JS 로펌.
방음 설치가 완벽한 회의실에서 소속 변호사들이 나를 기다렸다.
강남의 대형 건물을 구입해 사용했다.
넉넉한 돈 아껴서 뭐하겠나.
선택받은 변호사들은 다른 로펌의 시니어 급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널찍한 개인 사무실을 비롯해 각각 필요한 인원만큼 직원들이 배정 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
선택된 변호사들 눈빛이 맑은 별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스윽.
나의 자리에 앉았다.
권주희 대표의 옆자리.
로펌에 선배 기수들은 없었다.
고문으로 몇몇을 섭외해 놓은 상태이지만 로펌은 온전하게 젊은 변호사들로 구성됐다.
이들을 미래의 재목으로 키워내기 위해 지원하고 있었다.
벌써 몇 년째.
다른 로펌에서 보면 돈질하고 있다고 비웃겠지만 나의 생각은 확고했다.
출발선부터 주변 권력에 편승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였다.
선배나 동기들과 유착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악의로부터 빚지지 않는 선량한 이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다들 알다시피 JS 로펌의 약자는 ‘정의와 신뢰’입니다. 로펌에서는 최대한 인간적 삶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과한 욕심은 인생을 망치는 법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상에서 소외 받는 이들에게 진실한 법률 서비스를 지원함이 본 로펌의 목표입니다.”
외형적 대표는 권주희지만 모두 내가 실질적 리더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연수원 때부터 지원한 물질과 정신적 도움은 눈에 보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다.
어려운 변호사 시장에서 연봉 1억 이상은 기본적으로 보장됐다.
자가용과 집까지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상을 위해 빛이 될 이들.
그들이 얻어내는 카르마 포인트는 나에게 정확하게 반 땅으로 계산되어 귀속된다.
“신덕수 변호사님. 조은희 씨 이혼 소송에는 별 문제 없습니까?”
“의뢰인이 조정을 원하지 않아 조정절차는 패스됐습니다. 다음 달 기일이 잡혔습니다.”
“경호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조은희 남편은 알다시피 이 나라 권력자들과 유착이 심합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최대한 경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건에 연관된 의뢰인과 변호사들은 씨큐리티 소속 경호원들이 지원을 했다.
국정원을 비롯해 경찰과 검찰의 비호를 받는 놈들이었다.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았다.
“다른 변호사님들의 도움이 필요하면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십시오. 전 무리한 실적을 원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양심을 기준으로 삼아 일을 처리해 주십시오.”
“넵!”
소속 변호사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는 같이 술도 마시고 사담도 나누며 떠들지만 회의 시간에는 이들 모두 프로처럼 일했다.
나의 권리를 최대한 활용했다.
회사의 규율을 잡는 것도 나의 책무였다.
“그럼 의뢰된 사건에 대해 토의하고 배분하도록 하죠. 권주희 변호사님 이번에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을 맡으셨다고요?”
“네…….”
그렇게 시작된 회의.
생각보다 많은 사건이 의뢰됐다.
따로 홍보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로펌 법률 서비스.
국가에서 운영하는 부족한 법률 서비스와 질이 달리했다.
그렇다고 아무 사건이나 받지 않았다.
무지와 가난함으로 인해 차별 받고 있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했다.
법 없이도 살 만큼 선량한 이들을 등쳐먹은 고도로 진화한 사기꾼들이 판치는 세상.
그런 약한 시민들을 최대한 지원함이 로펌의 설립 목표였다.
변화는 한 걸음씩.
“저희 팀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교통사고를 맡았습니다. 가해자는 현직 경찰 고위 간부의 이십 대 아들로…….”
자리를 만난 듯 쏟아지는 세상의 억울한 사연들.
매 사건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회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사건 배당과 토의를 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
“그럼 여기서 회의를 마치고 점심부터 먹도록 하죠.”
만족스럽게 끝난 회의.
권주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동료 변호사들과 밥을 먹기 위해 이동하려는 순간 진동으로 해놨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장태산 변호사입니다.”
- 오랜만이야. 장 대표.
오랜만에 듣지만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목소리.
“회장님???”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