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장. 끝판왕들 (4)
“각하. 괜찮으십니까?”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에어포스 원 기내.
오바마는 독한 위스키를 넘기고 있었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평소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오바마.
커틀러 국가안보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과 달리 오바마의 얼굴은 몇 시간 만에 보기 안쓰러울 만큼 핼쑥해졌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고뇌에 찬 깊은 시름을 담은 눈빛.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커틀러 보좌관이 은밀한 목소리로 오바마의 의중을 물었다.
“흐음.”
입을 꾹 다물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오바마.
오늘은 다른 날보다 중요한 날이었다.
LA에서 있었던 행사에 참여하고 급하게 이곳 와이너리로 날아왔다.
행사 이후 행보는 다 극비에 붙여졌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특수부대를 준비시켰다.
오바마의 명령 한 마디면 국가안보 파괴를 이유로 특수작전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대상은 한국인 투자자 다니엘 장.
그가 머물고 있는 와이너리 주변은 특수 공격 헬기를 비롯해 몇 개 팀의 특수부대원들이 대통령의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다.
오바마의 한 마디면 다니엘 장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지워질 판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다니엘을 만나본 오바마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적이 되겠냐고? 제정신이 아니야.’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자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을 향해 친구인지 적인지 스스로 밝히라는 요구를 했다.
‘나에 관한 비밀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자칫 스캔들로 번지면…….’
정보가 노출되면 오바마는 당장 탄핵 여론에 휘말릴 것이다.
동시에 상, 하원 선거에서 필패할 게 뻔했다.
제2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법적 한계치를 넘는 정치 자금.
조급한 상황에서 받아먹은 게 탈이 났다.
모든 증거를 완벽하게 회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니엘 장이 갖고 있는 자료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최선의 방법은.
‘친구도 적도 아닌……. 그냥 타인으로!’
이 시간부로 관심을 끄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정치는 항상 타협의 연속.
다음 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밀고 있는 힐러리는 다니엘 장의 정치 자금이 없어도 훌륭하게 선거에 임할 수 있다.
힐러리는 부자다.
자신처럼 빚이 있는 게 아니라면 행동도 자유로울 것이다.
그때 불쾌하기 그지없는 다니엘을 쳐도 늦지 않다.
“취소하십시오.”
“각하. 괜찮으십니까?”
커틀러가 다시 한 번 오바마의 의중을 확인했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걸 오른팔인 커틀러는 알고 있었다.
오늘 일을 위해 여러 고위 실세들의 눈도 가렸다.
“취소하십시오. 좀 더 지켜보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오바마가 단호하게 최종 명령을 내렸다.
꿀꺽 꿀꺽.
취소 명령을 내리고 오바마는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 호흡에 비웠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이 밤.
‘사라 요한슨이 함께 있었어. 사라 요한슨…….’
우연인지 모르지만 차일드 가문의 방계의 핵심인 사라 요한슨도 와이너리에 함께 있었다.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는 일.
다니엘 장보다 더 두려운 존재 차일드 가문.
“하아아…….”
미국 대통령 오바마 입에서 시름 가득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적을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본 자신의 실책.
앞으로 더 얽히게 될 운명이 오바마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쉬십시오.”
대통령이 안고 있는 괴로움을 알고 있는 커틀러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세상 모든 권력들의 끝판왕인 미국 대통령.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인간 인연들의 최고 정점의 난맥상.
오늘도 미스터 프레지던트는 깊은 잠에 들 수 없을 게 뻔했다.
***
“독수리가 방금 둥지를 떠났다.”
- 뻐꾸기는?
“뻐꾸기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오늘 밤은 떠날 것 같지 않다.”
- 둘이 뭘 하고 있나?
“그건 알 수 없다. 경비가 삼엄하다.”
- 알겠다.
다리우스 와이너리가 내려다보이는 구릉.
특수 적외선 투시기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가 조용히 위성 무전을 날렸다.
독수리가 방문하며 펼쳐졌던 일시 전파 차단이 해제됐다.
급하게 날아온 뻐꾸기는 와이너리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바로 바다를 건너 이스라엘로 발 빠르게 전해졌다.
***
“다니엘이라고 했죠. 반가워요. 나 누군지 알죠?”
덥석.
“…….”
말로만 듣던 진짜 괴짜.
얼굴을 보자마자 와락 날 껴안더니 자신을 아는지부터 물었다.
“물론입니다. 발론 머스크.”
“그래요. 제가 발론 머스크랍니다. 하하하!”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미남자.
이마가 훤칠해서 기본적으로 성격이 답답하지 않았다.
눈빛은 호기심 많은 소년처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마치 별을 담고 있는 것처럼 영롱했다.
높은 콧대는 미래를 향한 진취적 기상의 표본이었고 짙은 눈썹은 속에 감춰진 고집스러움을 드러냈다.
한 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
- 우주신의 후계자와 조우했습니다.
뭐? 우주신?
살다 살다 별 신을 다 만난다.
지구의 악신과 선신 계열을 넘어서 이제는 우주신.
몸은 지구 인간계에 속해 있지만 영혼은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온몸에서는 밝은 우주 에너지가 감지됐다.
진짜 천재이자 괴물.
아직은 미래보다 덜 유명하지만 서서히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의 위명.
“다니엘, 게임 좋아합니까?”
게임광이라더니 진짜인 듯하다.
다짜고짜 게임을 좋아하는지부터 확인해왔다.
“스타라면…….”
“오! 그 게임 멋지죠! 그 게임 스토리 만든 친구를 아는데 걔도 내 과예요. 저 넓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욕망 가득한 인간과 깨달은 정신족. 그리고 피를 보고 싶어 환장한 야만족의 혈투! 내가 현란한 컨트롤이 안 돼 포기했지만 정말 획기적인 게임이죠.”
이곳은 지금 캘리포니아 실리콘벨리에 위치한 테슬러 본사.
스텐포드 대학 옆에 위치한 테슬러 회사는 미국에서는 드물게 주차장비가 공짜였다.
특이한 인간성을 소유한 머스크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아침 일찍 이곳으로 찾아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나의 물음에 확답을 하지 않고 떠났다.
고민에 빠져 있을 그.
오바마가 자리를 뜨고 난 뒤에야 알림음이 떴다.
- 생사(生死)의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무서운 남자였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뒤를 봐줬던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판단하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약간의 허점이라도 보였다면 나에 대한 제거 명령을 내렸을 게 뻔했다.
사라의 도움도 암암리에 받았다.
아무리 오바마라 해도 한국인인 나와 달리 사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사라는…….
오늘 아침 일찍 새벽 동이 트기 전 햇살을 피해 떠났다.
길고 길었던 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사라는 아무 약속도 남겨 놓지 않고 사라졌다.
그래도 과거와는 달랐다.
떠나기 전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내 품에서 잠시 쉬었던 사라.
우리 둘의 미래는 그녀도 나도 몰랐다.
차일드 가문과 적이 되고 싶지 않지만 운명은 어떤 선택지를 내밀지 알 수 없었다.
“바이어 쇼크 해봤나요?”
“그건 아직입니다.”
“오! 안타깝군요. 혹시 다니엘도 게임을 게임으로만 보는 어리석은 남자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나 한국 남자다.
한국에서 게임 못하는 남자는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물론 이번 생에서는 바빠서 게임할 틈이 없었지만 지난 생에서는 PC방에서 이름 좀 날렸다.
“하하. 말이 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럼 오늘 저와 같이 바이오 쇼크 해볼까요? 이 게임을 접하는 순간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 대한 헤겔의 탁월한 철학 해석을 접할 수 있습니다. 다들 헤겔을 비극에 빠진 철학자라 말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헤겔은 자기 보전적 이기적 욕망에 의한 회복 불가능한 절망적인 인간 대립을 화해시키기 위해 하늘이 보내주신 천사가 분명합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천재는 보통의 인간과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간다는데 그 말이 맞았다.
처음 보는 투자자인 나에게 게임을 권하는 발론 머스크.
농담이 아니다.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레이저와 온 몸에서 발산되는 게임 에너지.
“이 게임에서 중요한 점은 범죄인의 자율적 인격체로서의 가치와 침해의 정당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어야…….”
“머스크!”
머리가 더 아파 오려는 순간 청량한 여성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들려왔다.
안 봐도 미녀가 확실했다.
“……젠장. 마녀가 지옥에서 부활했군.”
머스크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방금 손님 앞에서 마녀라고 했죠?”
또각또각.
정확한 리듬의 구두 발자국 소리로 다가오는 여인.
미녀다.
몸에 착 달라붙은 진회색 원피스를 입은 글래머 스타일.
웨이브가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머스크 앞에 섰다.
진한 여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향기가 맡아졌다.
머스크와 비슷한 시원시원한 느낌의 미녀.
손에 두툼한 서류철이 들려 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인상을 쓰며 냉기를 날리는 그녀의 이름은…….
“렉시. 지금 중요한 투자자와 미팅 중이야.”
“제가 방금 전 듣기로는 게임 이야기를 한 듯한데 아닌가요?”
렉시가 나를 쳐다보며 물어왔다.
영화 ‘아이론맨’의 남자 주인공 옆에 있던 미녀 비서를 닮았다.
나에게 사실 확인을 요구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순간 렉시 뒤에서 머스크가 눈동자로 격렬하게 부정 의사를 보냈다.
두 번이나 이혼을 했을 만큼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머스크답지 않다.
“좋은 게임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렇죠! 게임 이야기 맞죠!”
렉시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내 고자질에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짓는 머스크.
“게임 회사에 투자를 준비하는 저에게 머스크가 좋은 정보를 줬습니다. 역시 타고난 사업가답게 게임 분야에도 안목이 대단했습니다.”
“아! 게임에도 투자를 하셨군요.”
렉시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지옥에서 건져진 것처럼 머스크 얼굴이 환해졌다.
“거봐. 렉시. 내가 아무 때나 게임 얘기하는 그런 남자 아니야. 지금도 회사를 위해 골방에서 샌드위치 먹어가며 더 나은 테슬러 생산을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잖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번 달에도 무려 12억 달러 적자라고요!”
렉시가 보란 듯이 머스크를 몰아붙였다.
“렉시. 돈 걱정은 하지 마. 나 발론 머스크야. 나에게 투자하겠다는 머저리들이 줄을 섰어. 지금도…….”
머저리라는 말을 내뱉다 말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무는 발론 머스크.
저 형님과 접속해 있는 우주신이 누군지 실로 궁금했다.
하필이면 상태가 좀 안 좋은 대상을 고른 듯하다.
“머스크 당신은……. 하아.”
렉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머저리 투자자 중 한 명인 다니엘 장이라고 합니다.”
“……죄송해요. 머스크가 자본가를 좋아하지 않아서…….”
렉시가 진심으로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전혀 마음에 상처 입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거봐! 렉시. 다니엘은 로버트 라이언과 친구라고 했어. 그런 사소한 말 따위에 전혀 걸리지 않는 대범한 머저리…….”
진짜 한 대 갈기고 시작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의는 아닌 게 확실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입을 가리는 발론 머스크의 행동이 귀여웠다.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연구만 하고 싶어도 돈이 필요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어떻게든 멋진 사업가처럼 굴어야 하는 그의 고충이 느껴졌다.
“계속 말해 봐요, 머스크. 오랜만에 듣는 참신한 욕이라 기분이 묘하군요.”
정치인 오바마와 달리 머스크는 전혀 가식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기분이 더 좋았다.
순수한 아이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다니엘, 자네 부자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 보란 말에 훅 치고 들어온 발론 머스크의 질문.
“네.”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럼…… 나 달러 좀 땡겨주게!”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