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장. 방문 예약
“아르테우스가 산맥 밖으로 나간 게 확실한가요?”
“그런 것 같사옵니다. 세르미온 장로님.”
“하아아.”
중앙 산맥 큰나무사슴 엘프 일족의 장로는 시름 섞인 긴 한숨을 내쉬었다.
풍성한 은발이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거리는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
엘프의 장로는 미를 기준으로 뽑는다는 전설처럼 외모가 뛰어났다.
수백 년 세월을 살았음에도 젊은 여자 엘프들의 생기에 절대 뒤쳐지지 않았다.
장로 세르미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결계 안에서 자연과 소통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엘프들의 삶이다.
하지만 세르미온 장로는 그런 삶을 사는 엘프답지 않게 근심이 가득했다.
이유는 단 하나.
200년 전, 당시 젊은 엘프였던 그녀는 마물과의 싸움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깊은 숲속에서 여러 번의 생사 위기의 순간을 넘나들었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함.
그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던 드워프 전사와 종족을 떠나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고 죽음이 그만큼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랑이었다.
평소 미천하게 여기고 격멸하던 드워프였다.
그런 드워프 전사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눈에 들어왔다.
키도 작은데 장신의 자신 앞을 막아서며 마물들과 대치하던 모습.
그 어떤 엘프보다 용맹하게 보였던 드워프 전사.
둘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대사건.
어쩌면 그때 죽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엘프 사회는 여왕 중심의 모계 사회였다.
대대로 위대한 하이 엘프 가문의 후예였던 세르미온.
그런 그녀가 드워프와의 사이에 혼혈 자식을 낳았다.
엘프 세계에 파란이 일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혀 엘프답지 않은 모습과 성품을 갖고 태어난 아들 아르테우스.
생김새를 비롯해 모든 유전적 성향들이 엘프와 드워프를 딱 반반씩 섞어 닮아버렸다.
아르테우스는 마법과 전사적 재능은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엘프들 사이에서 소외됐다.
이후 세월이 지나 세르미온이 장로가 되었음에도 한 번 굳어진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귀한 똥덩어리.’
드워프 일족이 아르테우스를 부르는 이름.
엘프들을 격멸하던 드워프 일족에서도 난리가 났다.
드워프 촌장의 아들이었던 세르미온의 사랑은 어느 날 모습을 감춰버렸다.
세르미온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홀로 아들을 키워냈다.
커갈수록 엘프들의 특성인 차분한 이성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신 아들 아르테우스는 드워프의 특징인 뜨거운 감정 변화를 더 많이 표출했다.
그만큼 근심은 커졌다.
하지만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성장한 인격체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아르테우스는 엘프 집단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동료 엘프들이 아르테우스를 어떤 일에도 동참시키지 않았다.
아르테우스는 공식적 외톨이가 됐다.
아예 엘프 영역에서 벗어나 중앙 산맥을 휘젓고 다녔다.
말리지 않았다.
마법 실력과 검술, 궁술까지 겸비한 아르테우스였다.
누구도 자신 있게 그의 앞을 막을 존재들은 없었다.
요즘 들어서는 드워프 일족과 어울린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혹시 자신이 과거 그랬던 것처럼 사고를 칠까 봐 주시했다.
“정령 추적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인간들 영역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인간계요?”
세르미온이 놀라 다시 물었다.
장로 직책은 결코 한가한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중앙 산맥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많았다.
여왕 자리도 공석이었다.
과거 엘프 일족을 영광으로 이끌었던 여왕이 있었다.
하지만 여왕 역시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슬프게도 여왕이 선택한 사랑은 처음부터 음모로 촘촘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자신을 배척한 엘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왕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
엘프의 아름다운 모습 속에 감춰져 있던 인간의 사악함을 함께 소유했던 하프 엘프.
사실을 알고 난 뒤 엘프 여왕은 배신에 치를 떨었다.
순수하고 고결했던 사랑인 만큼 여왕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엘프 여왕은 남은 엘프 일족을 위해 자신을 신성한 숲의 마나로 불태웠다.
신들에게 스스로를 공양한 것이다.
그렇게 신의 세계로 떠나 버린 엘프 여왕.
신은 그 이후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가도 새로운 여왕을 점지해 주지 않았다.
장로들이 여왕 몫까지 대행을 해야 했다.
세르미온은 틈이 나는 대로 시간을 내 아르테우스에게 경고했다.
결코 산맥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사고가 터졌다.
“드워프 일족 여성체와 함께 동행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설마…… 니마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욱신 찾아오는 편두통에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는 세르미온.
“장로님!”
보고하던 엘프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세르미온을 불렀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생이 엘프들의 삶이었다.
엘프들은 두통이 뭔지 모르고 살아가는 게 보통.
자연신의 축복을 받는 존재인 만큼 인간들이 겪는 일반적 괴로움을 몰랐다.
그게 정상적인 엘프의 삶이었지만 장로 세르미온은 어느 날부터 아주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괜찮아요.”
세르미온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드워프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이단아가 바로 니마카라였다.
두 종족에서 각각 외톨이 신세인 둘은 곧잘 산맥에서 어울렸다.
그 덕에 동료들 사이에서 소외됐던 아들이 미소를 되찾았다.
다행이었지만 기어코 둘이 사고를 쳤다.
“추격대를 보내겠습니다.”
눈부신 미스릴 갑옷을 착용한 엘프 전사가 대응책을 제시했다.
엘프들을 보호하고 산맥의 침입자를 처단하는 추격대는 정예였다.
마법과 전투에 능한 전사들.
인간 기사들 10여 명 정도는 간단하게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월등한 자들이다.
더욱이 추격대는 모두 마법과 정령을 다룰 줄 아는 마검정령사.
인간들이 성을 쌓아 방어하는 일개 영지 정도는 10여 명의 추격대 합동 공격으로 가볍게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아닙니다. 기다리세요.”
“명을 받드옵니다.”
엘프 사회의 규칙과 위계질서는 인간들의 것보다 강했다.
여왕의 부재인 상태에서 하이 엘프인 장로의 명은 곧 지엄한 신의 명과 같았다.
“수고했어요. 물러가도 됩니다.”
스으읏.
세르미온의 한마디에 추격대 전사가 조용히 물러났다.
“여왕님이시여……. 이 미약한 종 세르미온은 일족을 이끌기에 아직도 부족합니다. 시련의 강물에서 건져 주시고…… 제발 지혜롭게 하소서.”
세르미온이 어릴 적 보았던 엘프 여왕.
그 어떤 엘프들보다 아름답고 지혜로웠던 여인.
눈을 지그시 감은 세르미온은 진실의 눈물을 흘리며 여왕께 간청했다.
불길한 느낌이 요즘 강하게 들었다.
곧 마주하게 될 준비되어 있는 그 무엇.
오직 지혜만이 헤쳐 나갈 수 있는 답이었다.
***
털썩.
유전자에 각인된 공포에 아르테우스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자장.
들고 있던 검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허어어억…….”
마나가 아르테우스보다 훨씬 약한 드워프 니마카라는 목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감히 대항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지난 긴긴 세월 동안 대륙을 지배하고 수호했던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드래곤피어.
앞이 캄캄했다.
엘프 여왕도 고개 숙여 경배했다던 드래곤의 재림.
엘프와 드워프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려 그 어떤 사고도 가능하지 않았다.
맹수 앞에 놓인 토끼 새끼나 진배없었다.
그저 처분만을 기다릴 뿐.
덜덜덜.
둘의 몸은 심하게 떨렸다.
잘못 보이는 순간 남은 일족 모두에게 화가 번질 수도 있었다.
강한 만큼 고독히 홀로 높은 곳에 자존했던 존재.
눈앞의 인간은 맞서 싸워야 할 더러운 마족이 아니었다.
공포에 눌려 섬기지 않을 수 없는 드래곤이었다.
“후후훗.”
드래곤이 웃었다.
스스스스슷.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드래곤피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존재를 알고도 무례를 범한다면 그 순간 바로 소멸이었다.
장로와 선배들이 언제나 주지시켜 주었던 사실이다.
드래곤을 만나게 되면 죽음조차도 ‘예’라고 대답하라 했다.
“다시 얘기를 시작해 볼까?”
드래곤은…… 역시 잔인했다.
드워프도 쉽게 만들 수 없는 물건이지만 드래곤은 가능했다.
그 문제를 재차 확인하고자 하는 저 치졸함.
“이 물건들은 다른 엘프 족과 드워프가 만들었다. 인정하나?”
“물론입니다!”
정신을 차린 니마카라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드래곤에게 인정 안 되는 건 세상에 없었다.
그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였다.
“확실합니다. 위대한 존재님의 말씀은 모두 맞습니다!”
엘프 아르테우스도 니마카라 뒤를 이어 적극적으로 수긍했다.
100년 전 산맥에 들어왔던 용병한테 배웠던 말투 같은 건 진작 잊어버렸다.
인간 세상에서는 웬만하면 먹힌다는 껄렁한 행동과 말투.
제대로 써먹고 싶어 때를 기다려 왔지만 실수였다.
드래곤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속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 들어! 날 보고 똑바로 말해 봐.”
드래곤은…… 다시 생각해 봐도 잔인했다.
위대한 존재와 눈을 맞추라는 것은 무리한 일방적 요구다.
영혼이 육신에 남아 있는 게 용했다.
“거역하는가?”
“아닙니다!!!”
둘은 고개를 들어 공작, 아니 드래곤을 쳐다봤다.
피식 인간처럼 웃고 있는 인간의 탈을 쓴 드래곤.
오금이 저려왔다.
절대 방심하다 속으면 안 됐다.
“방금 생각난 게 있는데 말이야.”
생각하지 마라 드래곤!?
잘못 호기심을 일으켰다 일족 모두가 생체 실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벌벌 떨며 드래곤의 입만 쳐다보는 하프 엘프와 하프 드워프.
“너희…… 부자지?”
“!!!”
드래곤의 속내, 호기심의 실체를 듣고 말았다.
귀를 막았어야 했다.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온 드워프의 황금과 각종 고급 무구들.
니마카라는 눈앞이 캄캄했다.
드래곤에게 드워프 일족은 금고나 마찬가지.
‘내놔’ 한마디면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먹고 살만 하면 찾아오는 인간세상의 고뇌처럼 덮쳐오는 드래곤의 금고털이.
“네! 저희 일족 부자입니다! 100년 전에 새로 찾은 미스릴 광산 덕에 창고 가득 품질 좋은 무기와 방패, 마력석이 쌓여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그냥 가져가셔도 됩니다!”
자신을 소외시킨 엘프 일족에 불만이 많았던 아르테우스.
일족 재정 상태를 다다다 털었다.
“호오~ 그래?”
드래곤을 탈을 쓴 인간 공작이 관심을 보였다.
질 수 없다!
드워프 마을에 거래차 찾아왔던 인간 상인과 음주 중 동침해 자신을 잉태하고 출산했던 드워프 엄마.
니마카라를 낳고 세상 무너지듯 펑펑 울었다고 했다.
하도 못생겨서 시집은 다 갔다고 한탄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인간과 엘프들의 기준에서는 무척 볼 만한 인물인 니마카라.
아쉽게도 드워프 일족의 미의 기준은 달랐다.
최소 다섯 명의 아이는 순풍순풍 낳을 수 있는 펑퍼짐한 엉덩이와 굵은 허벅지.
마물들과 맨주먹으로 맞짱 떠도 꺾이지 않을 굵은 허리통과 나무통 같은 팔뚝.
드워프가 미의 기준으로 삼는 첫 번째 조건들이었다.
수염도 남자들처럼 굵고 거칠게 자라면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니마카라는 그 모든 기준에 미달되고 어느 것 하나 앞선 게 없었다.
드워프 여자들 중에서도 월등하게(?) 키가 큰 것도 문제였다.
허리는 품에 쑥 들어오게 잘록했고 4등신도 아니고 무려 저주받은 5등신.
어디 내어 놓고 자랑할 수 없는 몸매를 소유해 버렸다.
수염 숱도 겨우 인간 성인 남자 수준 정도밖에 안 났다.
내놓기 부끄러워 차라리 밀고 다녀야만 했다.
못생겨도 너무 못생긴 드워프 니마카라.
친구가 없어 숲에서 방황할 때가 많았다.
그때 아르테우스를 만났다.
엘프치고는 잘생긴(?) 아르테우스에게 호감이 갔다.
더욱이 아빠가 드워프였다.
자신의 처지와 많이 비슷한 하프 엘프.
어렵지 않게 마음이 통했고 친구가 됐다.
온갖 상상을 하며 그와의 놀이에 빠져들었다.
언젠가는 마족을 무찌르고 일족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마을에 찾아든 상인과 마법사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 세상에 드워프와 엘프들이 만든 최고의 제품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
드워프 일족들은 분노했지만 누구 하나 용감하게 나서지 못했다.
자존심 상하게 드워프도 아직 만들어 보지 못한 명품이었다.
다들 애써 무시했다.
그때 니마카라는 멋진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 사기꾼을 자신들의 손으로 잡아 족치면 일족들이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해 줄 게 확실했다.
셀프 영업이사로 포장했다.
분위기용으로 아르테우스를 포섭했다.
돌아가던 인간 상인들의 물건을 몇 개 훔쳐 명품을 팔고 있다는 인간 귀족의 성에 숨어들었다.
당연히 협박이 먹힐 거라 단언했다.
하지만 결과는…… 엉망진창이다.
마족도 아닌 드래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만 차리면 마물 굴에서도 살아 나온다고 했어! 니마카라 힘내자!’
드래곤에게서 허점이 느껴졌다.
잘하면 살아서 일족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위대한 존재시여!”
니마카라가 목소리를 쫙 깔았다.
“중앙 산맥 드워프 일족 또한 엘프 일족과 비교 가능할 정도로 부자입니다! 비밀 창고에 산에서 채굴한 각종 보석과 황금! 그리고 직접 제조한 질 좋은 각종 무기를 비롯해 마력석이 등급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빈손으로 방문하셔서 즐겁게 포장해 가시면 일족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니마카라도 신나게 일족의 재정 상태를 어필했다.
그깟 재물이야 다시 쌓으면 그만이지만 귀중한 목숨은 아니었다.
동료인 아르테우스의 고자질도 있기에 양심의 가책이 덜했다.
도둑질도 둘이 해야 뒤가 든든하고 양심을 판 마음에 위로가 되는 법.
니마카라는 생긋 웃으며 친절한 영업이사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렇단 말이지…….”
검은 눈을 반짝이며 만족해하는 드래곤.
성질 포악하기로 첫 번째 가는 블랙 드래곤이 확실했다.
“가서 너희 일족 수장들에게 전하라.”
살았다!
니마카라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영업용 미소를 더욱 크게 지었다.
“명령만 하시면 빠른 배송, 아니 연락을 전하겠습니다!”
“엘프의 발걸음은 숲속에서 가장 빠릅니다!”
이것도 경쟁이라고 아르테우스도 지지 않고 답했다.
싱긋 웃는 드래곤.
만족한 게 확실했다.
“내가 곧 방문할 터이니……. 두 일족 모두 곳간 창고 활짝 열고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 전하라. 만약 어길 시에는…….”
파스스스스.
진하게 퍼지는 드래곤의 무서운 기세.
“!!!”
얼간이 하프 엘프와 드워프는 그저 꼴깍 침만 삼킬 뿐이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