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장. 위대한 존재
뭐지? 이 참신한 조합은…….
나도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종족이다.
낯선 이들이 눈앞에 서 있다.
말로만 듣던 엘프와 드워프.
판타지와 영화에서 그려지던 그 모습……?
개뿔!
누가 엘프를 미의 종족이라고 말했나!
장신의 날렵한 몸매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슈퍼 훈남과 미녀로 널리 알려지고 평가 받아왔던 그들.
육식을 멀리하고 자연 그대로의 물질을 섭취해 성격이 유순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엘프 종족이…….
날 째려보고 있다.
그것도 완전 살벌한 눈빛으로.
와아! 뾰족한 귀와 어울리는 저 쌍심지 켠 퍼런 눈동자와 썩은 인상 봐라.
울퉁불퉁 근육도 장난 아니다.
키?
나보다 작다.
2012년까지 현역으로 뛰던 표도르와 크로캅 형님이 울고 갈 정도다.
딱 봐도 불친절한 엘프가 당장이라도 나를 한 대 칠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처음 안면 트는 사이인데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그에 반해 드워프는…….
“처음 뵙겠습니다~. 중앙 산맥 드워프 일족 영업이사 니마카라입니다~”
누가 드워프 여자도 수염이 자란다고 헛소리를 했나!
키는 150센티미터 정도.
작다.
그리고 절대 우락부락 근육이 발달한 여성이 아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잔근육 몸매.
나름 드워프 계의 얼짱 미녀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왔다.
머리통이 살짝 큰 5등신 정도?
야리야리한 몸매와는 거리가 있는 드워프들 특유의 아재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
보기보다 첫인상은 괜찮다.
그런데 신분이…… 영업이사란다.
드워프, 이분들 장사할 줄 안다.
드워프에 대한 호감도는 수직 상승했다.
대신 양아치 같은 첫인상을 남긴 엘프는…….
“인간! 그 차별심 가득한 시선은 거둬줄래? 아가리 터지기 전에.”
이 분위기, 지금 막나가자는 거지?
“여기 계시는 아르테우스 님은 중앙 산맥 큰 사슴나무일족 분쟁해결조의 조장님이십니다. 인간들 세계의 해결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니마카라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해결사 엘프가 인상을 쓴다.
타짜 냄새가 물씬 맡아졌다.
“반갑습니다. 이곳 영주 베커 장 황실수호공작입니다.”
“어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쫄딱 망한 제국의 황실수호공작님이라니……. 정말 멋있어요!”
짝!?
멋있다며 손뼉은 딱 한 번 쳤다.
감탄하는 표정은 격하게 과장된 니마카라.
‘쫄딱 망한’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걸로 보아 과거 제국에 유감이 있었던 것 같았다.
“개나 소나 공작은…….”
개나 소?
근육질 엘프 아르테우스는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로 툴툴거렸다.
저렇게 나오면 안 될 텐데.
“다들 앉지.”
“???”
이제부터는 실전 정신교육 편.
이종족 상대로 당황하지도 않고 하대하는 나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두 남녀.
준 양아치 엘프와 드워프 영업 이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게 느껴졌다.
“둘 다 예의가 없군. 인간이 아니라 몰라서 그런가?”
또로록.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긴장은 고사하고 여유 있게 행동했다.
침묵과 투명 마법을 사용해 나의 집무실에 침투한 걸 알고 있다.
엘프가 다소 거친 기운을 투사했지만 허리에 차고 있는 날씬한 검을 쓸 것 같지는 않았다.
드워프 영업 이사도 마찬가지.
겁을 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번지수 잘못 짚었다.
“저기요, 영주님.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뻣뻣하게 나오면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어요.”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경고하는 드워프 영업이사 니마카라.
우드득.
엘프가 근육을 비틀며 분위기를 타자 뼈 소리가 들렸다.
2인조 협박범.
“반대 입장은 생각 못 하지?”
“네? 반대요? 영주님이 우리를?”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영주님이라 호칭하는 니마카라.
영업 이사로서 고객을 상대하는 열정이 대단했다.
고객 기분 상하지 않게 분위기 잘 맞추고 술 잘 마시고 놀 줄 알아야 된다는 사업체의 핵심 임원.
내심 니마카라를 영업이사로 뽑은 드워프들의 안목에 감탄했다.
- 드워프를 대표하는 영업이사가 불쾌해 합니다.
- 엘프 해결사가 팰까 말까 고민합니다.
- 두 집단을 적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알파닥 장난 그만해라.
나를 위기에 처넣지 못해 안달이 난 알파닥의 위장 알림음이 들려왔다.
- 눈치 빠른 바람둥이 새끼. 쳇.
이 와중에도 이중 첩자 작전을 펼치는 알파닥.
하지만 분위기는 썩 좋지 않다.
“찾아온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니마카라가 어이없는 듯 물어왔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짜고짜 야밤에 2인조 살수들처럼 찾아와서 말이야.”
“와아!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드워프 미인에게 살수라니요! 그 말 취소하세요!”
키가 작은 미녀 드워프.
자세히 보니…… 수염을…… 밀었다.
감쪽같이 속을 뻔했다.
젠장, 드워프는 여자도 털이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럼 뭐지?”
짐작은 가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드워프와 엘프 일족 사칭 물건 판매죄! 그거 엄청 큰 죄예요!”
올 게 왔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
나 변호사다.
“증거는?”
“인간들은 역시 안 돼.”
말과 함께 엘프 해결사가 등 뒤 조그만 주머니에서 익숙한 물건을 꺼냈다.
엘프가 만들었다고 홍보해서 팔아먹은 시계다.
“이거 모르는 물건이라고 말할 건가?”
알지, 당연히.
내가 비싸게 팔아먹은 저가 제품 시계인데.
“이게 왜 우리 드워프들이 만들었다고 사기 친 거예요? 공작이라는 분이 기본 상도의도 모르세요?”
니마카라도 허리춤에서 스테인리스 접시 하나를 꺼냈다.
그것도 내가 대대적으로 홍보해 팔아먹은 제품이 맞았다.
“사기? 난 그런 적 없는데.”
감정의 변화 없이 답했다.
“세상에……. 인간 귀족들은 눈앞에서 코 베어간다더니 사실이었네. 이렇게 확실한 물증이 있는데도 발뺌을 하다니. 정말 존경스럽네요!”
수염 깔끔하게 밀고 처음부터 예쁘장한 미녀였던 것처럼 행동하는 드워프 미녀 영업 이사가 발끈했다.
“그거 엘프와 드워프가 만들었어.”
“응?”
“네?”
“문장 찍힌 거 안 보여? 그리고 거기 신비로운 글자 보이지? 그거 우리 동네 엘프들 인장이야.”
“이 마법시계를……. 엘프 일족이 만들었다고? 누가? 북쪽 산맥 얼음 숲 일족? 그들이 아니면 남쪽 대륙 산맥의 붉은 잎사귀 일족?”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가장 솜씨 좋은 중앙 산맥 일족도 만들 수 없는 물건을 어떤 일족이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딱 걸렸다.
“너희들은 그 물건 어디서 났는데? 엘프 말해봐.”
“……비밀이다.”
당황하는 엘프 해결사.
“니마카라 영업이사, 당신 일족도 못 만드는 물건은 나 같은 인간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하죠.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고급지고 뛰어난 물건을 제조한단 말이에요. 상인들과 같이 온 마탑 고서클 마법사들도 자신들 입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어요.”
영업이사가 순진하네.
“오호. 상인과 마탑 마법사를 만났군.”
“…….”
당황해 입을 꾹 다무는 영업이사 나마카라.
당황한 듯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시커먼 속마음이 보였다.
“상인과 마탑 마법사들이 왜 드워프를 찾아갔을까?”
씨익 웃으며 나마카라를 살폈다.
당황한 나머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
“내가 판 물건을 너희 일족이 구입하려고 타진했겠지.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니까 가격 좀 깎아 보겠다고 말이야.”
“그게…….”
나마카라가 어리바리한 표정이 됐다.
이런 걸 빼박이라고 한단다.
수염 깍은 드워프 아가씨야!
“그런데 문제는 너희 중앙산맥 일족 누구도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없다는 거겠지. 좌우균형과 완벽한 원형, 쇠로 만들었지만 미스릴 못지않은 유려한 광채까지~.”
콕콕 진실을 짚었다.
드워프가 공장 제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단일 제품이라면 모를까 오차 없이 균일한 스테인리스 제품을 만든다는 건 이곳에서 제조불가였다.
드워프가 공장을 차리지 않는 한.
“성분도 궁금하겠지. 이게 은근히 조합이 아주 어렵거든.”
집무실 탁자 위 마른 과일 안주가 담겨 있는 스테인리스 접시를 들어 보이며 살살 약을 올렸다.
자존심으로 밥 말아 먹고 산다는 드워프.
“씨이!”
화가 난 듯 니마카라가 감정 조절에 실패해 씩씩거렸다.
“아르테우스.”
나의 시선은 엘프에게 향했다.
“왜, 왜! 인간!”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엘프도 뭔가 어색했다.
어디 뜨내기 용병한테 짝퉁 양아치 기술 정도를 습득한 눈치였다.
“너…… 왕따지?”
“헙!”
신음을 터트리는 엘프 아르테우스.
“고상한 엘프 일족 중에 분쟁해결조장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그런데 인간들과의 문제에 해결사로 왔다고……? 네가 생각해도 뭔가 수상하지 않아?”
“다, 닥쳐!”
엘프가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마법 실력은 제법 봐줄만 했지만 그들이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낌새를 눈치챘다.
단지 출현 인물이 엘프와 드워프 종족이라는 데서 잠시 놀란 것뿐.
“누가 지시했어? 아니 내가 말해 볼게. 적어도 고귀한 엘프들이 겨우 이 따위 물건에 흥분할 일은 없겠지. 다들 하찮은 인간세상 일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까~.”
“!!!”
해결사 엘프가 당황하는 눈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이번 방문은 너의 독자적 행동이겠지. 옆에 있는 드워프 영업이사가 꼬드겼을 테고 말이야.”
“으으.”
“아!”
둘은 들켜버린 사실에 신음을 토했다.
엘프와 드워프의 시간은 인간들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고 들었다.
한마디로 이들의 나이를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긴 세월을 살았다고 다 지혜롭고 현명한 건 아니다.
그건 인간의 삶을 되비쳐 보면 빤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은 폐쇄된 일정 영역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름 평안하게 살았다.
이들에게는 인간세상에서 빡세게 굴러먹은 나를 당할 경험적 재간이 없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하루에 열두 번도 얼굴을 바꿔가며 처세술을 펼친다.
그런 이들을 상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통찰력이 있게 마련.
이들의 출현 자체가 이곳에서 듣고 있던 일반적 엘프와 드워프 행동 패턴이 아니었다.
그 배경으로 추측성 발언을 날렸는데 맞아 떨어졌다.
“어떻게 알았죠? 소문대로…….”
소문? 뭐!
“내가 마족일 거라고?”
“네…….”
언제 거기까지 소문이 난 거야.
그렇다면…… 한 차례 쇼가 더 필요한 시점.
“용감들 하구나. 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힘이 담겨 있는 마력을 진득하게 공간에 뽑아 흘렸다.
흠칫 놀라는 엘프와 드워프.
스릉!
엘프가 늘씬하게 빠진 검을 뽑았다.
“역시 마족이 맞았어! 마물이 점령했던 이곳을 차지할 때부터 수상했어!”
아르테우스는 귀도 얇고 상상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드워프의 말에 홀려 따라다니는 왕따 엘프가 물불 가릴 줄을 몰랐다.
“저, 저기…… 진짜 마족은…….”
성격부터 부리는 엘프와 달리 덜덜 떨며 상황을 정리해 보려 애쓰는 드워프 아가씨 니마카라.
둘의 오합지졸 조합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나의 감정과 달리 심장에서는 갑자기 울컥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멋대로 사정없이 커지는 눈동자!
그리고.
“꿇…… 어…… 라. 감히 미천한 것들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그놈 목소리!
“헛!”
“위, 위대한 존재시여!”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