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장. 대가의 법칙
“오빠 한 번 믿어봐~♪ 오빠! 오빠?.”
오늘 완전 무장해제 된 FOB 멤버들이 화끈하게 분위기를 띄웠다.
평소 연습실이나 노래방에서 심심풀이로 불렀던 트롯 계열 노래들을 쏟아냈다.
매니저도 오늘은 포기한 듯 눈을 감아주었고, 연회장에는 아예들어오지도 않았다.
FOB 멤버들 모두 마음껏 즐기고 마시고 먹었다.
호텔 측에서 최고급 요리들로만 구성해 제공해 주었다.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요리들이 계속해서 테이블에 세팅됐다.
FOB는 예전에도 한 번 이곳 팰튼에서 마음껏 포식했던 적이 있었다.
아직도 몸매 관리를 위해 어느 정도 셀프 배고픔을 견디며 살고 있는 그녀들.
하지만 오늘은 하늘이 특별히 허락한 은총의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부동의 탑을 유지한다는 건 그만큼 그녀들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멤버들 표정만 봐도 오늘은 무대 위에서 견뎠던 긴장을 다 해제해 놓고 있었다.
연회장 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얼핏 봐도 그 수가 어느새 100명을 넘어섰다.
장태산 연수원 수료 기념행사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재계의 황제 임성철 회장이 직접 발걸음 했을 정도로.
“진짜 오정 회장님이야.”
“장태산 변호사 인맥 대단하네…….”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계속됐다.
그때 떠들썩하게 울리던 노래가 잠시 중단됐다.
“사돈.”
그 잠깐 사이에 들려온 또렷한 한 마디.
임성철 회장이 장태산의 아버지 손을 잡고 한 말이었다.
“…….”
의도치 않게 순식간에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사돈?”
“이거 실화야?”
사돈이란 단어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며 질문을 해댔다.
임성철 회장 옆으로 달려가 안기는 귀여운 여인.
방금 전까지 자신들과 섞여 떠들던 그 여인이 말로만 듣던 오정 가의 막내딸이었다.
여인의 실체를 알게 된 모두가 일제히 웅성거렸다.
“아빠……. 농담을 그렇게 진담처럼 하면 어떻게 해.”
임윤아가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했다.
“회, 회장님. 하, 하하하하하하.”
장태산 아버지 장대국도 어색한 웃음으로 당황스러운 입장을 대신했다.
덥석 그 말을 받기에는 미끼 크기가 너무 컸다.
자칫 턱이 빠지고 입이 찢어질 수 있었다.
그 정도 감은 장대국도 있었다.
“제가 인재 욕심이 많습니다. 장태산 대표가 워낙 잘나서 탐이 납니다. 하하하.”
한 번 미끼를 던져 보고 노련하게 한발 빠지는 임성철 회장.
말을 하는 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다가오는 장태산을 뜨겁게 바라봤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태산은 전혀 흔들림 없이 임성철 회장을 맞이하며 인사했다.
임성철 회장 역시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응대했다.
언제 봐도 과하거나 모자람이 없는 장태산의 자세.
재계의 거물 앞이지만 전혀 꿀리지 않았다.
“변호사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하관우 회장과 황효관, 현동영이 주변을 의식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네 사람의 관계가 대외적으로 알려져선 안 됐기에 표정을 관리했다.
“여러 대표님들 덕분입니다. 이렇게 오셨는데 식사들 하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다 가십시오.”
임성철 회장뿐만 아니라 몇 년 동안 언론을 통해 언급되던 재계 대표들이다.
나이 지긋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태산.
평등회 소속 연구원들은 그런 장태산을 무한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다들 입이 제멋대로 떡 벌어져 있었다.
장태산이 재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선뜻 아무것도 없는 자신들을 데리고 로펌을 만들 때 알아봤다.
일산에서 다른 연구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특혜를 받았다.
삼우 로펌에서 에이스 변호사들이 맨투맨으로 실무 실습을 해줬다.
연수원에서는 죽어도 습득할 수 없는 각종 현장 기술의 연마.
사회 각층의 여러 강사들을 초빙해 명강의를 듣기도 했다.
하다못해 입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일상생활 교육을 받았다.
지금껏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 경험들을 오로지 장태산이 갖고 있는 인맥만으로 충족시켜 줬다.
믿음과 존경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게 솔직한 입장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장태산이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뢰가 갔다.
그랬던 장태산이 오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 보였다.
임성철 회장과 나란히 있어도 밀리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그룹 대표들이 차라리 장태산의 눈치를 보는 걸로 보였다.
장태산을 보며 딱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였다.
BOSS!
만날 때마다 웃는 얼굴로 식사를 대접해 주었던 장태산의 진면목을 확인한 셈이다.
그는 어느 곳에 데려다 놓아도 금세 적응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남자였다.
‘도대체…… 정체가 뭐니?’
공수진은 장태산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힘들게 버텨왔던 자신의 인생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한가운데서 그를 만났고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의식이었다.
돈과 권력이 인생의 전부라 여겨왔던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스폰 관계라는 형식적 계약이 이루어졌지만 장태산은 공수진을 아낌없이 지원해 줬다.
이성으로서의 감정은 전혀 내비치지 않는 장태산.
남자라면 몇 번도 더 혹할 만한 외모의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장태산.
이렇게까지 지성적이고 대단할 줄 몰랐다.
무릇 사람은 그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이 그의 명함을 대신한다고 했다.
지금 공수진 눈에는 장태산이라는 남자가 오정 그룹 회장 급으로 보였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호텔 특급 요리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던 권주희는 괜히 나이든 자신을 한탄했다.
애를 낳고 난 뒤에야 진짜 세상을 알았다.
애가 태어나면서 사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직장에서 당했던 고통은 애들 장난 수준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아이들을 낳고 보니 자신이 견딘 세상을 아이들이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의 삶은 출발선부터 위치가 달랐다.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는 장태산 같은 사람을 반드시 붙잡아야 했다.
“쩝…….”
어떤 아쉬움에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를 찍어 입에 넣는 권주희.
다음 생에는 나라를 팔아서라도 장태산 같은 남자를 만나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쟤들은 뭐가 저렇게 좋을까?’
주민의 시선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열린 수료식 파티에 거물급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무게감까지 더해졌다.
“이번 곡은 어머님 신청곡입니다~.”
평소 새침데기로 통하던 미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은 멤버들과 달리 좀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혼자 조용히 연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잉.
그때 가볍게 전해지는 스마트폰 진동.
무심히 문자를 확인하는 주민.
“!!!”
- 바빠?
모르는 전화번호였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올 줄은 주민도 몰랐다.
- 아니요.
- 그럼 우리 만나자.
고속 직진해 오는 상대의 문자.
- 그게…….
- 어디야?
- 팰튼 호텔요.
- 가깝네. 15분 뒤에 나와. 드라이브 가자.
“드라이브…….”
드라이브라는 말에 주민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껏 상상만 해오던 멋진 현실 데이트 예감.
- 네.
주민은 설레는 마음과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매니저도 오늘 시간만큼은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였다.
잠깐 드라이브 정도 한다고 큰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몸이 계속 안 좋아 먼저 숙소로 갔다고 말하면 된다.
주민은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
“조용히 좀 있으라 했더니 연수 기간을 못 참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쯧쯧. 피가 끓어, 피가…….”
호텔 연회장 옆에 딸려 있는 휴게 공간.
오랜만에 갖는 임성철 회장님과의 독대다.
임윤아를 보러 왔다는 핑계로 연회에 합류해 큰 사고를 만들었다.
내 허락도 없이 아버지를 사돈이라 부르며 이상한 관계를 맺었다.
보는 눈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진담 같은 농담이었어도 소문이 돌 게 뻔했다.
평소 속을 드러내지 않던 임성철 회장님과 사뭇 달랐다.
뭔가 조급함이 엿보였다.
과거와 달리 노쇠함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재계의 거인 역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티븐 매튜는 그의 운명대로 사망했다.
한창 연수원 2학기 강의를 받고 있을 때 그의 전화를 받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걸 그도 나도 알았다.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던 스티븐 매튜.
죽음을 목전에 둔 와중에도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죽어서도 애플파크와 내가 건축하고 있던 연구실을 비교할 거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곧 만나 회포를 풀자고 내가 말했다.
나의 말끝에 잠시 침묵했던 그.
죽음이 눈앞에 다가옴을 느끼고 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담담하게 말해 왔다.
그는 기대감까지 품고 있었다.
별난 인간은 맞았다.
그에게 축복을 빌어줬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해 줬다.
그 뒤에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고 죽어 본 선배로서 귀띔해 줬다.
의심 많은 천재답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직접 보고 꿈에 찾아와 알려주겠노라 농담까지 했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인사가 됐다.
매튜는 그로부터 얼마 후 사망했다.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발명가이자 사업가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의식의 세계를 여행 중인 그를 가끔 불러보지만 아직까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화 기간이라는 알림음만 왔다.
스티븐 매튜가 쌓은 업이 결코 낮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카르마 포인트 정산 작업이 긴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생각하나?”
잠시 매튜를 생각하던 나에게 묻는 임성철 회장님.
눈앞의 거인에게 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없었다.
매튜처럼 훅 떠나지는 않겠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닌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 중입니다.”
“뭘 말인가?”
나의 고민에 관심을 보였다.
회장님은 아버지와 반주 몇 잔 나눈 뒤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스티븐과 전 친구 사이입니다.”
“……알고 있네.”
오정의 정보력은 역시 대단했다.
나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오정.
“그가 떠나고 난 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얼굴 보고 몇 번 연락한 일이 전부지만 동질감이 강했습니다.”
“흐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지그시 바라보는 임성철 회장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몇 년 남았다고 하던가요?”
“뭐가 말인가?”
“선친 때부터 인연이 된 유명한 역술가가 있지 않습니까. 회장님의 명운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거인들을 상대할 때는 우회 작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두 눈을 직시하며 대놓고 물었다.
“……자넨 역시 고약해.”
나의 예감대로 이미 자신의 신변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오정의 주인.
미간과 콧등을 찡그렸다.
“관상으로 봤을 때…… 전생에 쌓았던 업의 정산이 끝나가는 시기입니다. 이 생에서 쌓았던 선업과 악업은 본전치기는 된 것 같군요.”
카르마 포인트가 쌓여 레벨업이 될 때마다 보이는 게 많아졌다.
임성철 회장 주변에 흐르는 카르마의 회동.
아주 미세하게 그를 감싸고 있었다.
전생에 쌓았던 엄청난 복덕이 다 녹아 소진된 상태였다.
“장 대표도…… 내가 곧 쓰러질 것 같아 보이나?”
“네.”
“……그럼 가야지. 살 만큼 살고…… 누릴 만큼 누렸으니 말이야.”
의외로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거짓말도 잘 하십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의 눈에는 확실히 보이는 그의 본심이 발산해 내는 기운.
역사상 그 어떤 권력자도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오는 걸 선택하지 않았다.
역술인에게 들은 바가 있어 일찍부터 승계 작업을 해왔던 임성철 회장.
나는 누구보다 그가 필요했다.
임성철 회장의 아들이 감당하기에는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파도가 높았다.
반도체 시장을 중점적으로 노리고 중국이 거세게 도전했다.
인재와 정보 빼돌리기는 기본.
더한 짓도 서슴없이 벌인다.
물불 가리지 않고 뱃속을 채우기에 혈안이 된 양심도 없는 개 떼들.
문제는 오정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월가의 자본가들도 한 몫 한다는 거다.
그들은 오정의 주인이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던 공룡이 쓰러지면 먹을 게 많다.
식탐에 한창 눈이 돌아간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놈들이다.
막아야 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악독한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이제 대한민국과 한 몸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뿌리와 뿌리가 하나로 얽혀 버린 지 오래였다.
세계적으로도 기업들의 인수합병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 무수한 기업들이 쓰러지고 거대 기업만 살아남았다.
오정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휘청거리게 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과거의 영화를 재현할 수 있는 반도체 신화를 일으킬 수가 없다.
“하늘이 그리 정했다는데…… 방법이 없지 않나…….”
반쯤 포기한 듯한 임성철 회장의 음성.
그래서 오늘 연회장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사돈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나마 육신을 운신할 수 있을 때 지극히 사랑하는 임윤아를 나에게 맡기려 했던 심산.
“방법이 있긴 한데…….”
“뭐, 뭐라고? 방법이 있다고?”
갑자기 생기가 확 돌며 놀라 묻는 임성철 회장.
문제는…….
- 상급신 레벨 권능으로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 개입하시겠습니까?
예정되어 있던 듯 들려오는 알림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 상대의 운명 크기에 따라 카르마 포인트 소모량이 달라집니다.
- 그리고…….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