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장. 키다리 마법사 아저씨 (1)
“장태산이라고?”
쫙 깔리는 진중한 목소리가 공간에 퍼졌다.
주름진 손이 한 장의 명함을 쥐고 있다.
“네.”
명함은 심플했다.
이름과 핸드폰 번호만 적혀 있다.
누가 보면 성의 없다 싶을 정도지만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묵직했다.
“내가 아는 그 장태산 맞지?”
“회장님이 알고 계시는 그 장태산이 맞습니다.”
“흐음……. 장태산이라…….”
한강 철교가 내려다보이는 강변 아파트 최상부 로얄층.
흰머리가 자연스러운 60대 중반의 남자가 최고급 리클라이너 가죽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있다.
손에 들린 유리잔에 와인이 반쯤 채워져 있다.
전문수.
한때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었을 만큼 뛰어난 정치인이기도 한 인물.
일찌감치 선친에게 물려받은 연대 중공업을 지주회사로 만들어 전문 경영인을 도입했다.
전 한국자유당의 4선 국회의원 신분이기도 하다.
2012년 올해는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했다.
연대 그룹은 그 동안 전문수를정치 창구로 이용하며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한 욕심으로 무리하게 덤볐다 정치권에서 강제 퇴출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음 대 대통령으로 여당이 밀고 있는 조근영과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여당 의원들 상당수가 등을 돌렸다.
최근 들어 치솟던 그룹 주가도 흔들렸다.
세계 금융 위기는 아직도 진정세를 보이지 않고 요동치고 있다.
호황기에 건조했던 선박들도 바다에 뜬 채 넘쳤다.
값싼 인건비를 내세운 중국의 저가 공세에 중공업의 주 수입원인 선박 수주에서 계속 밀렸다.
대형 선주사들이 몰려있는 유럽의 경제 위기로 계약했던 선박마저 해약되기 일쑤였다.
골치가 아픈 전문수.
외부와 단절된 휴식처에서 전문수는 최측근 비서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오후에 있었던 손자에 관한 일.
한심한 내용이 가득했다.
이제 중학생인 어린 녀석이 사고를 다양하게 쳤다.
교내폭력 문제는 물론 벌써 여자 문제를 만드는가 하면 급기야 살인미수 사건까지 벌였다.
어느 정도는 눈 감고 이해했다.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대그룹 손자로 살자면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현실은 생각보다 큰 고립감을 주고 견디기 벅찼다.
보통 사람들로부터 금수저라 불리는 그룹의 손자 신분.
과거 자신도 겪어온 과정이라 최대한 손자들에게 관대했다.
어차피 한 번은 지나가야 할 사춘기였다.
그룹을 이끌 수장이라면 일찍 세상맛을 보는 것도 괜찮다는 지론을 품고 산 전문수였다.
쾌락의 정점을 빨리 경험한 만큼 쾌락에 또 무감각해진다는 게 전문수의 경험적 결론이었다.
그룹 경영자는 일반인들과 품는 욕망의 크기가 달라야 했다.
어차피 방종은 중학교 때까지였다.
고등학생이 되면 미국에 던져 놓을 생각이었다.
최고의 선생을 붙여 빈틈없이 몰아붙일 것이다.
자신을 닮아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사고를 생각보다 크게 쳤다.
나름 머리를 써서 무마할 계획이었던 모양이지만 사건을 더 크게 만들어 버렸다.
살인죄가 무서워 선택한 차선이 악수가 됐다.
쓴다는 머리가 딱 중학생 수준.
미리 알려왔다면 돈으로 입을 막았거나 조용히 피해 여성을 처리했을 일이었다.
“국선 변호인이라고?”
“네. 이번에 실무 실습을 나온 국선변호인입니다.”
전문수 회장의 오른팔 격인 선광훈 비서실장이 차분하게 답변했다.
“이놈이 동국이를 팼다는 거지?”
“폭행한 건 맞는데 흔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 폭행당했다고 진술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습니다. 치아 몇 개가 빠졌는데 입안에 상처도 없습니다.”
“그럼 펜치로 뽑았어?”
“아닙니다. 뽑은 듯한 상처도 없습니다.”
“다친 건 맞지?”
“그렇습니다.”
“……국선이라는 놈이 그러면 쓰나. 고소해.”
전문수는 간단명료하게 고소를 지시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한때 이름이 회자됐던 장태산.
안아와 천일 그룹이 놈의 작업을 통해 미국 사모펀드로 넘어간 걸 전문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재계 서열 10위 안에 턱걸이 하는 그룹과 연대 중공업은 근본이 달랐다.
오정이 부동의 1위를 차지했지만 범연대가를 합치면 연대 역시 대등했다.
특히 연대 자동차와 합치면 감히 누가 건들지 못했다.
상속 분리 후 사이가 안 좋은 오정 패밀리와 달리 연대 그룹은 아직 가문의 의리가 남아 있었다.
선친인 전준영 회장의 살아생전 유지이자 당부였다.
“……. 불가합니다.”
“왜?”
신입 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온 비서실장의 대답에 전문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평소 항명을 모르던 선광훈 비서였다.
“그곳에…… 여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설마…… XX?”
“…….”
선광훈이 입을 다물었다.
“쯧. 창승이 이 녀석 도대체 자식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전문수는 화를 크게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더 무서운 징조라는 걸 선광훈은 잘 알았다.
무표정한 얼굴 밑에 깊은 분노를 품고 살았다.
전문수는 부친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형제들의 견제가 심했다.
일찍 중공업만 받겠다고 선언한 후에야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게 한이 되어 그룹의 몸집을 엄청나게 키웠다.
형제가 유지하지 못하고 망해 내놓은 계열사들을 흡수했다.
야망도 컸다.
그러나 세상은 전문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네 생각은 어때?”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면 인연 아니겠습니까.”
“그 애송이를? 겨우 안아와 천일을 계약으로 넘어뜨린 사기꾼을 내가 굳이 만나?”
전문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존심이 셌다.
연대 자동차 회장인 형 말고는 눈치 볼 인물이 없었다.
“차선으로 전무님을 보내셔도 좋을 듯합니다.”
“창승이를?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제 그 녀석도 지 앞가림을 할 나이니까 말이야.”
“전해놓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분위기 돌아가는 게 조 씨가 될 것 같다며?”
“……. 선거자금이 필요할 겁니다. 그쪽 비선 라인에 접근하겠습니다.”
“허참. 내 꼴이 우스워. 나 전문수가 이제 사이비 목사 딸한테까지 굽실거려야 하다니……. 과거에 그 집안 내 앞에서 꼼짝도 못했는데.”
조근영 후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수가 혀를 찼다.
항상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복을 발로 차 버렸다.
알량하게 남아 있는 자존심이 문제였다.
남아 있던 국회의원 자리도 날아갔다.
요즘 깊은 허무감이 전문수를 자주 엄습했다.
“권력은 금방입니다. 힘내십시오. 회장님.”
“나도 늙어가. 곧 70인데…….”
창밖 한강을 바라보며 시름에 젖는 전문수.
아직 끝내지 못한 인생의 과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야망이 부글부글 끌며 그를 태우고 있었다.
***
“밤늦게……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네…….”
말로만 듣던 강남 칠룡 마을.
화려한 네온사인이 지척까지 비춰오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대충 만든 천막과 판잣집이 눈에 많이 띄었다.
마을 아래로 흐르는 하천에서는 쾌쾌한 냄새가 연신 풍겨왔다.
여기저기 하얀 연탄재가 뒹굴고 굵은 파리가 날아다녔다.
얼마 남지 않은 대도시 서울의 아픈 흔적.
그 와중에도 갓길 군데군데 고급 차들이 보였다.
마을 사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종들이었다.
소란이 계속되고 있는 칠룡 마을 철거와 보상 문제를 노린 승냥이 같은 인간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2000년 헌재 판결로 주민등록과 주소지를 소유하게 된 칠룡 마을.
2020년 당시에도 개발 문제로 시끄러웠다는 걸 뉴스 보도로 들었다.
보상권을 노리고 몇 천 만원에 불법 딱지 거래까지 발생했다.
무허가 거주임에도 임대가 아닌 분양권을 요구하며 떼를 썼다.
양심 없는 인간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여러 조직들이(?) 조용히 잠입했다.
그중에는 대철연 조직도 있었다.
공영개발을 위해 철거 과정에서 대한민국 철거인 연합회라는 대철연의 무식한 놈들이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불을 질렀다.
소속도 모르는 깡패들.
서민들의 이름을 빌려 쓰고 기생하는 쓰레기들이었다.
전국 재개발이나 철거 현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나타나 집단행동을 하는 무리들.
끝까지 찰거머리처럼 피를 빨아 먹고 떨어져 나가는 괴물들이었다.
일종의 직업이 되어 철거 보상이 들어오면 두둑한 보너스를 받는 21세기형 용역인 셈이다.
정부와 법 위에 군림하는 위세 높은 그들의 냄새가 이곳에서도 맡아졌다.
“여기에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막집 중에서 한 곳을 한나가 가리켰다.
목소리는 가늘어졌지만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싹수가 보였다.
“할머니는?”
“안에 계세요. 얼마 전 비올 때 넘어지셔서 거동이 불편하세요.”
훌쩍 철이 든 한나.
할머니를 향한 애정이 저절로 느껴졌다.
“들어가자.”
“네.”
한나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이빨 몇 개 뺐다고 얌전해질 양아치들이 아니었다.
극단적 보복 가능성도 염두했다.
특히 전동국 그 놈은 눈이 돌면 보이는 게 없었다.
관상에 빼박으로 자리 잡은 폭살(爆殺).
반드시 사람을 죽일 상이었고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드르륵.
낡아서 손으로 잡으면 금방 빠질 것 같은 미닫이문이 열렸다.
잠가 놓지도 않았다.
“누구여……?”
노쇠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할머니. 저 왔어요.”
“한나냐? 왜 이렇게 늦었어. 며칠 전에도 누가 너 쫓아온다고 했잖여. 오빠도 없는디 싸게싸게 댕겨라.”
“아시는 분이 같이 왔어요.”
“……아시는 분? 누군디?”
미닫이문이 열리자 부엌과 세면실로 사용하는 수돗가가 바로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 있던 낡은 비닐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영진이 변호를 맡고 있는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어메! 우리 영진이 변호사 선상님이라고요!”
키가 작고 왜소한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친 곳이 많이 불편한지 그 자리에서 바동거리기만 했다.
“나오시지 마십시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많이 누추한 곳인디…….”
신발을 벗고 비닐 문 안으로 들어섰다.
개킨 이불을 올려놓은 작은 장, 스탠드가 놓여 있는 책장, 그리고 사람 세 명이 누우면 빈틈이 없을 공간이 전부였다.
그 흔한 냉장고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낮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방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이런 곳에서 살아왔을 할머니와 영진이 남매.
진정으로 삶을 견뎌온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앉으세요. 변호사 선상님.”
자신의 옆 자리를 가리키는 할머니.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허덜 마셔요.”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의 얼굴은 선하기만 했다.
법 없이도 착하게 오늘까지 살아왔음이 분명했다.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그날 영진이가 몇 시에 집에서 나갔습니까? 한나는 기억하고 있어?”
“잘 모르겠어요……. 더운 날에는 오빠가 밖에서 자기도 하거든요. 학교에서 공부하고 늦게 집에 오는 날이면 연락하는 오빠 핸드폰에…… 전화가 왔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저도 깜빡 잠들었당께요. 그 날 꿈자리가 뒤숭숭했는디……. 에휴.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벌을 받는구만유.”
도리어 자신을 한탄하는 할머니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취미인 악마들이 세상 곳곳에 너무 많았다.
“병원에 가보셨어요?”
“……예전 같으먼 금방 낫는디 나이를 먹어논께…… 쉽게 뼈가 안 여무는구만요.”
할머니 사투리가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와 비슷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잠시 만져보겠습니다.”
“아녀라. 손에 묻는당께요. 손 버링께 선상님은 가만히 계셔유.”
또다시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
“돌아가신 제 할머니 같아서 그래요. 제가 한의학을 좀 배웠습니다.”
영진이 할머니가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진심을 확인하고자 하는 맑은 눈동자.
“……. 그라문…….”
먼저 진맥을 시작했다.
“음…….”
기가 몹시 약했다.
손자 일에 신경을 많이 쓴 듯 원기가 상해 있었다.
오래 놔두면 큰 변고가 날 판이다.
스윽.
다리도 만졌다.
역시 기가 정체되어 통하지 않았다.
넘어져서 다친 노인 골절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자칫 죽을 때까지 누워 계시게 될 상황이다.
결단이 필요했다.
“한나야. 교복하고 책, 중요한 가족들 물건만 일단 챙겨.”
“네?”
“아니 변호사 선상님 그게 무신…….”
“할머니 이대로 놔두면 누워만 계시다 곧 돌아가신다.”
“하, 할머니가요!”
한나가 깜짝 놀랐다.
아무리 똑똑해도 세상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다.
노인 양반이 괜찮다고 참으며 우긴 까닭도 있었다.
“선상님…… 말씀은 고마운디 우리가 갈 곳이…….”
할머니는 한나보다 말뜻을 빨리 알아챘다.
“영진이가 할머니하고 한나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인연들의 부탁.
나의 마음속을 울려오는 진한 애원.
영진이 부모님과 그 조상들이 보내는 파동이 분명했다.
“아저씨…… 저희에게는 친척도 없어요. 그리고…….”
한나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리고’의 의미.
“아저씨 부자야.”
“선상님, 그건 안 된당께요. 오늘 처음 뵙는디 어디 염치없게시리 신세를…….”
“할머니…… 공짜 아닙니다.”
“네???”
“그것이 무신…….”
- 카르마 포인트가 듬뿍 예약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카르마 포인트.
신까지 부릴 수 있는 포인트가 듬뿍 예약되어 있었다.
못 챙기면 바보 인증.
그리고 이런 식의 만남이라면 이들과도 난 전생에 인연이 있음이 확실하다.
“한나야, 짐 챙겨. 아저씨 집으로 가자!!!”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