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장. 파업
“이, 이게 도대체 뭡니까! 엔화가 급락할 거라고 다들 예상했는데 왜 상승입니까! 도대체 이게 뭐냔 말입니까!”
“…….”
런던으로 이사한 홍콩상행은행의 본점 최상층에 자리한 비밀 회의실.
기사단장의 아들 루이스의 목소리가 한껏 격양되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적당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자금을 끌어들여 유로화의 부흥을 꿈꿨다.
예상대로 저금리 엔화로 유럽은 경기가 활황이 됐다.
유럽 연합 출범 이후 제대로 된 부흥기를 맞이하는 듯했다.
주머니가 넉넉해지자 소비가 늘어났다.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안정되자 관광 인구도 늘었다.
부족했던 인프라 투자도 촉발됐다.
중세 영광을 재현하고자 절치부심 노력했던 결과를 곧 맛보게 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틈타 엔화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단기를 넘어 중기 국채를 팔고 고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한 엔화.
그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풍부한 유동성으로 부동산 거품이 팽배하던 연합 국가 중 일부가 금방 탈이 났다.
넘쳐나는 자금을 주체하지 못해 지르던 각국 정부의 행복한 비명이 곡소리로 바뀌었다.
나름 속도를 조절하며 충격을 분쇄했다.
그런 상황에 일본 본토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연합의 보이지 않는 경제를 책임지는 기사단은 기겁했다.
최고의 금융 인재들을 투입해 대비책을 세웠다.
그러나 수습이 쉽지 않았다.
기사단처럼 다른 곳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손실이 얼마입니까?”
루이스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재정담당 이사에게 물었다.
“엔화 하락에 배팅했던 외환 선물에서…… 500억 달러 정도 손실이 났습니다.”
“으음…….”
“하아.”
직접적인 수치 언급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굳었다.
일주일 전에 터진 동일본 대지진.
원자력발전소가 해일에 폭발했다.
체르노빌을 넘어서는 인류 최대의 핵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고준위폐기물인 폐연료봉을 발전소 내부에 보관하다 더 큰 사고를 부르고 말았다.
노심이 융해되어 도저히 인간의 기술과 힘으로 빼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사능에 노출된 일본열도는 공포에 시달렸다.
미리 정보를 알아내고 엔화 약세에 배팅했던 기사단의 자금.
놀랍게도 단기 하락 위에 거짓말처럼 엔화는 강세로 돌아섰다.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환란이 발생했다.
속도를 감당 못할 정도로 엔화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만기 채권을 투매할 정도로 일본을 살리기 위해 본국으로 귀환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누구도 예상 못한 자본의 흐름.
“우리만 당한 겁니까?”
“아닙니다. 한 곳을 제외하고 거의 다른 모든 곳이 손해를 봤습니다.”
“한 곳이 제외라구요? 그곳이 어딥니까?”
“……월가의 로버트 라이언 쪽은 수익이 수백억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로버트 라이언!”
루이스가 로버트 라이언이라는 이름을 듣고 기겁했다.
‘혹시 다니엘 장?’
루이스는 아직도 지난 여름 사건을 잊지 않았다.
세이셀에서 마주쳤던 다니엘 장.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얽혀 있던 차일드 가와 로버트 라이언의 짐작할 수 없는 인연까지.
‘이번 사태까지 설마 그 녀석이 예측한 건 아니겠지?’
다니엘 장과 로버트 라이언의 동업 관계는 이제 비밀 아닌 비밀이 됐다.
‘아니야! 놈은 신이 아니야!’
의심과 부정이 루이스를 괴롭혔다.
“대책은 뭡니까? 손실 투자 금액을 메울 방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루이스 목소리가 높아지며 회의실에 울렸다.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루이스가 답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독일연방은행 자금을 수혈하도록 하십시오. 그나마 독일 쪽이 선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럽 연합을 지금껏 수호한 기사가문은 경제와 정치, 영적인 부분까지 책임져 왔다.
그들의 말이라면 독일연방은행장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모두 분발해 주십시오! 최근 아사신 쪽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지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바다 건너 그들은 신앙과 문화의 적이었습니다. 모두……. 미래를 대비한 슬기로운 지혜를 발휘하도록 합시다.”
발루아 가문 장자이자 차기 기사단장 예정자의 당부이자 명령이었다.
“성배를 위하여!”
오래된 그들만의 구호가 회의실에 묵직하게 울렸다.
***
-축하해요. 다니엘~.
“뭘 말입니까?”
-로버트 라이언이 이번에도 큰 건을 했더군요. 다들 엔화 약세를 점쳤는데 홀로 강세에 투자해 엄청난 이득을 봤어요.
“축하 전화를 해줘야겠군요.”
-전화를 받아야 할 쪽은 다니엘 아닌가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휴가 이후 관계가 많이 편해진 사라 요한슨이 전화를 해왔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뉴욕은 오후 9시 늦은 시간이었다.
-다니엘……. 이제 정치해도 될 것 같아요. 말투가 우리 아빠를 닮아가요.
“그럴 리가요. 상원의원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푸훗.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저도 손해를 봤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하고 하등 관계가 없지만 피해자가 그렇게 말씀하니 마음이 쓰이는군요.”
똑똑한 여인과의 대화는 기분을 좋아지게 했다.
-100억 달러가 작은 돈은 아니죠. 로리아나는 더 큰 손해를 봤다고 하던데…….
선물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도박판이다.
차일드 가문뿐만 아니라 기사단, 중국과 일본 할 것 없이 나에게 제대로 깨 털렸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본 주식 폭락장에서 나는 엄청난 이득을 봤다.
며칠 만에 20% 하락한 일본 증시.
여기서 한 번 꿀 빨고 환율로 일본 꿀벌들 양봉통 수십 개를 삼켰다.
아직 정확한 계산을 못했지만 이익이 최소 1000억 달러가 넘었다.
그중에서 가장 손해를 본 이들은 일본 중앙은행이었다.
급격한 환율 변동을 막기 위해 환위험 헷지로 통화옵션과 통화선물을 사용하다 얻어 터졌다.
대지진에 이은 원자력발전소 문제로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다.
먼저 먹는 게 임자였기에 제일 먼저 달려가 선빵 때리고 꿀꺽 했다.
“그 정도로 충격받을 로리아나가 아닐 겁니다.”
- 그렇긴 하죠~. 하지만 아래에서 시끄럽게 굴면 귀찮아질 게 뻔해요.
“나중에 위로의 와인 한 잔 대접해야겠군요.”
- 저를 먼저 초대해 주면 안 되나요?
“안타깝지만 지금 한국 공무원 신분입니다. 주말을 이용해 미국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습니다.”
-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조만간 다니엘을 위로할 겸 방문하려고 해요.
“…….”
사라 많이 컸다.
이제 한국까지 찾아오겠다는 그녀.
“환영합니다.”
오는 여자 거절하면 죽어서 벌 받는다.
- 그럼 여름휴가를 같이 가는 걸로 하죠?
“휴가요?”
스케일이 커졌다.
- 알아보니 다니엘이 다니는 공무원 연수원도 방학이 있더군요. 그때 시간 맞춰 가겠어요.
사라가 나에 관한 정보를 모를 리 없었다.
“기대하겠습니다.”
- 나도……. 기대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둘이서만 와인을 마셔요.
은밀한 의미의 말을 건네는 사라.
가슴이 갑자기 훈훈하게 더워졌다.
“한국에 오면 제가…… 라면을 대접하겠습니다.”
- 네?
와인의 한국 버전으로 돌려 말하자 이해를 못하는 그녀.
“사라. 일본 대지진을 위해 제가 창설한 비영리 공익 법인 J 2006에 기부 바랍니다. 인류가 겪는 불행을 치유하는 데 함께 동참한다는 건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말을 바로 돌렸다.
더 이상의 긴 대화를 나누기에 장소가 별로였다.
회귀한 연도를 기념하면 만든 J 2006.
- 기부단체도 만들었어요? 얼마 정도면 될까요? 1억 달러?
기부금 단위가 달랐다.
“전 10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 그럼 10억 달러로 하죠. 그 정도라면 제 선에서 처리가 가능해요.
“고맙습니다.”
차일드 가문의 일 년 기부 금액만 해도 백억 달러는 가뿐히 넘을 것이다.
그중 일부를 받아 나의 포인트를 늘렸다.
이것도 개꿀맛.
- 다니엘의 인류애에 경의를 표할 뿐이에요.
사라가 상대방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안다.
비싼 라면으로 끓여 줘야 할 것 같다.
“행님요!”
그때 들려온 덕수의 목소리.
“사라. 일정이 있어 이만 통화를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 당신을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어요……. 다니엘…….
아쉬움에 촉촉해지는 사라의 목소리.
조용히 버튼을 누르고 통화를 종료했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대로 응대해 주지 못하는 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행님, 잉글리쉬도 억수로 잘합니데이! 존경합니데이~”
덕수는 지난 한 달 동안 태산빠가 됐다.
내가 신이라고 말하며 교주 행세를 해도 믿을 태세다.
“반티가…… 쫄티였나?”
“……지 꺼는 싸이즈가 안 나온다캅니다. 흐흐.”
오늘은 연수원생들을 위한 체육대회가 있었다.
공부벌레들도 할 건 다했다.
“캬아! 행님은 쥑입니다! 모델아입니꺼!”
덕수가 내가 입고 있는 저렴한 반티를 보며 엄지를 내밀었다.
“덕수 오빠 난 모델 아냐?”
시간 맞춰 팔미호가 나타났다.
감청색 체육복 바지에 저렴한 반티로도 가릴 수 없는 몸매.
야구 모자를 눌러쓴 팔미호는 보는 사람의 눈을 홀리게 만들었다.
연수원 미모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니 이해는 한다.
“니도 죽인다아이가 가시나야!”
덕수야……. 제발 사투리 좀!
그사이 친해진 덕수는 공수진을 상대로 가시나라는 말도 서슴없이 사용했다.
“그렇지? 나 정말 괜찮지?”
“니 선녀아이가. 사내새끼들이라면 다들 껌뻑 간다 아이가.”
“다는 아닌 것 같은데?”
연수원 체육관 입구에서 마주친 공수진은 새초롬한 눈빛으로 날 봤다.
나에게 술 한 잔 더하자고 애교를 부렸던 팔미호.
쿨하게 거절했다.
호랑이와 여우는 한 가족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내가 원한 건 건전한 스폰 관계.
앞으로도 할 일 많은데 팔미호 하나로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콜라 마시겠습니까?”
“됐어요! 저 탄산음료 안 좋아하거든요!”
공수진이 삐친 척했다.
그날 저녁 술 대신 콜라 한 캔 던져주고 자리를 떴다.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회장 뭐해. 2반 지금 선수들 숫자가 모자라. 빨리 와서 농구 한 게임 뛰어! 41기 선배들 눌러버리자고!”
올해는 특이하게 41기 선배들도 섞여 참석하게 된 연수원 체육 대회.
아침부터 바빴던 자치회장 권주희 씨가 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애들 노는 곳에 전직 메달리스트가 참가하는 것도 폼이 안 났다.
연수원생들 중에서도 남달리 몸이 좋은 남자 동기들도 있긴 해지만 내 눈에는 삐약이 수준이었다.
괜히 부딪쳤다가 골병 들까 걱정 됐다.
“행님요. 지랑 한 게임 하이소. 지도 농구 억수로 좋아한다아입니꺼!”
“덕수야. 참아라. 쟤들 쓰러지면 소송 걸 거야.”
“설마 동기끼리…….”
“신의칙 위반 몰라? 덩치를 봐라. 네가 뛰면 다들 부러져.”
“…….”
덕수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체육관에서 투닥거리며 장난치고 있는 연수원생들 틈에 덕수와 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응원은 해야죠. 가시죠 회장님. 오늘 저녁 회원들 뒤풀이는 잊지 않으셨겠죠?”
팔미호가 앞장섰다.
뒤태가…… 처음 봤을 때 느낌처럼 역시 좋았다.
“물론입니다.”
연수원 생활은 이만하면 잘 굴러갔다.
연구회 회원들은 대부분 도서관이 아닌 오피스텔에 모여 공부했다.
삼우 로펌에서 공부에 필요한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해줬다.
조만간 로펌 에이스 변호사를 초청해 강의도 부탁할 참이다.
초기 투자는 손익 계산 따지지 말고 과감해야 하는 법이다.
띠리리리리리리.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중요한 인물들일수록 벨소리는 단순했다.
- 회장님. 접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연수원 생활을 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는 황효관 천일 건설 대표였다.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 ……송구하옵게도 건설 노조원들이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네? 파업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