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4장. 한국평등법연구회 (2) (542/1,284)

544장. 한국평등법연구회 (2)

‘복종? 이게 오냐오냐 하니까 아주 버릇이 없네.’

권주희는 자존심이 팍 상했다.

연봉 1억에 평생직장 로펌은 요즘 연수생들에게는 꿈같은 조건이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변호사가 너무 많아 과거만큼 대우 받기 힘들었다.

공무원 특채에도 변호사들이 대거 몰렸다.

변호사 업계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쳐다보지도 않았던 국선변호인 자리마저 경쟁이 치열했다.

개업하면 쫄딱 망해 굶어 죽기 좋은 게 치킨집이 아닌 신입 변호사였다.

검사나 판사를 역임한다 해도 전관예우 받지 못하면 목돈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신림동에서 선배들 입을 통해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비참했다.

그래도 승부를 봤다.

애 딸린 아줌마인 권주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사회 전반에 걸쳐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다.

개인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도태가 된다.

권주희는 그나마 운이 좋았다.

선배들이 뒤를 봐주는 자치회 회장은 연수원을 나가도 좋은 명함이었다.

파바바밧.

모두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한국평등법연구회를 구경 온 다른 연수생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신덕수를 총무로 밀 정도로 정의감이 남달랐던 이들이다.

그런 연수생들에게 장태산이 복종을 강요했다.

스스로 회장이라고 선포하고 로펌을 만들어 여기 모인 모두를 종으로 부리겠다는 광오한 선언.

권주희는 공수진을 째려봤다.

‘넌 죽었어!’

입술을 달싹거리며 경고를 날렸다.

“후훗.”

공수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나쁜 것만 배웠네. 너 그러려고 사법시험 본 거냐?”

눈썹 진한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명영호라는 이름을 쓰는 그는 어릴 적부터 정의감이 남달랐다.

지방에 위치한 영서대를 졸업한 뒤로도 사법 정의를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이미 어릴 때부터 꿈이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명영호 눈에 장태산은 한낱 돈 많은 양아치였다.

“귀한 시간에 불러내서 겨우 한다는 소리가 복종? 여기가 지금 조선시대인 줄 아나……. 당신 영화를 너무 본 것 같아.”

안경 쓴 정민정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장태산을 훈계했다.

“커피 맛만 좋으면 뭐하냐. 인성이 개인데. 쯧쯧.”

새하얀 피부에 연약한 체구의 문윤열이 혀를 찼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셔틀 노릇을 담당했다.

그게 싫어 공부에 매진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는 문윤열에게 강압적 권력 행사는 악몽 그 자체였다.

그런데 장태산이 딱 그렇게 행동했다.

“어린 새끼가 금수저 같은데 밥맛이다 썅!”

나머지 사람들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곰만 한 덩치가 욕을 내뱉었다.

“나가서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죠. 저 인간 안주 삼아 자근자근 씹어보죠.”

“그러죠.”

“제가 쏠게요. 카드 만들었는데 개시는 해야죠.”

“그럼 2차는 제가~.”

“다들 나갑시다. 여기 더 있다가는 구역질이 날 것 같습니다.”

“맞아요.”

모두 미련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장태산의 제안 정도로 그들의 뜨거운 가슴을 식힐 수 없었다.

“수진아. 너 나중에 따로 좀 보자.”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공수진과 신덕수에게 권주희가 가방을 챙기며 들으란 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렇게 모두가 한꺼번에 몰려 나가려는 순간.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장태산이 오피스텔이 떠나가라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

아! 좋은 사람들 정말 오랜만이다.

미래가 보장된 달콤한 꿀통쯤은 발로 걷어 찰 자존감 철철 넘치는 사법 연수원 42기 동기생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주 보기 힘든 캐릭터들이다.

“뭐야? 끝까지 재수 없게.”

“우리가 만만하게 보여?”

남자들이 인상을 썼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 한국평등법연구회 회원이 될 수 있는 거다.

학필 선배와 예린 선배 같은 비밀 라인 말고 앞으로 내 명함이 되어 줄 존재들이다.

법원과 검찰, 대기업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깡이 필수였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 모릅니까?”

웃으며 그들에게 다시 손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뭐죠? 복종이라는 말에 다른 의미도 있나요?”

사회통찰력이 뛰어난 권주희가 물었다.

“앞뒤 문장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알랑방귀를 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들이 1차 선별 대상이었지만 확신적 회원은 아니었다.

나도 테스트가 필요했다.

일단 1차는 합격!

“……참신한 다른 헛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눈썹 진한 남자……. 이름이 명영호라고 공수진에게 들었다.

“영호 씨. 피차 바쁜 몸 아닙니까? 앉아요. 말 들어보고 그 때도 마음에 안 들면 힘차게 문을 걷어차고 나가도 늦지 않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회적 짬밥은 내가 더 많았다.

공부하다 사법연수생이 된 이들과 나의 스펙트럼은 차원이 달랐다.

느긋한 시선으로 기다렸다.

“일단 더 들어보죠.”

공수진과 인연이 깊다는 권주희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럼…….”

눈치를 보다 다시 하나둘 자리에 착석하는 이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연구회 이름처럼 전 한국의 평등한 법 집행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다들 호기심을 보였다.

복종 운운하다 갑작스럽게 나온 한국의 평등한 법 집행.

“정치인이나 재벌, 권력자들의 제안쯤은 간단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법조인들을 육성할 생각입니다. 제 먼 친척인 여기 덕수처럼 더 이상 권력에 의해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이 없기를 오래 전부터 소망했습니다.”

“육성? 그 단어도 복종과 비슷한 어감 아닙니까?”

송충이 눈썹 명영호가 물러서지 않았다.

반골상은 아니었지만 호불호가 분명한 관상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목숨 걸 스타일.

과거였다면 독립군이 되었을 것이다.

“육성이 맞습니다. 전 여러분들에게 과감하게 투자할 생각입니다. 변호사도 돈주머니가 든든해야 좋은 일 할 수 있는 겁니다. 옳은 일 하는 사람들은 청렴하고 가난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렸으면 합니다. 연수원 졸업해서 입에 풀칠도 못하는데 인권요? 그게 납득이 가는 말입니까?”

“…….”

부정할 수 없는 팩트에 다들 침묵했다.

“여러분의 합격 뒤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부모와 형제를 비롯해 많은 가족의 노고를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 받을 생각입니까?”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법시험 합격했다고 최소 집안 잔치 정도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졸업 뒤에 별 수익도 없는 변호사가 되어 인권 타령하면 두 손 놓고 반길 가족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대치라는 게 있었다.

특히 부모라면 자식이 좋은 일 하더라도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랄 게 뻔했다.

“의뢰인을 만나면 맛있는 한우설렁탕이라도 대접해야 할 것 아닙니까. 어쩌다 만나게 될 수도 있는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명색이 변호사인데, 위로금도 던져 줄 수 있는 지갑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결혼했다면 시댁이나 처가댁에 명절 때 용돈이라도 드려야 면이 설 테고요. 자식들 대학교 등록금을 대출로 해결할 생각은 아니시죠?”

내 시선이 권주희에게 향했다.

눈길에 움찔 놀라는 그녀.

이상은 결코 현실과 분리되어 실현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결혼해서 가정과 애가 있는 권주희에게는 피부에 확 와 닿는 제안이 확실했다.

오피스텔을 박차고 나가던 기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복종이라는 말은 아직도 수긍하기 힘들군요. 회장을 독단적으로 뽑은 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안경 쓴 정민정이 뒤끝을 보였다.

앞뒤가 똑같은 이름을 쓰는 그녀의 성격이 짐작됐다.

작은 키지만 강단이 넘쳤다.

“그 복종은 저를 향한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바로 권력에 얻어맞고 길바닥의 쓰레기처럼 뒹구는 힘없는 대한민국 국민을 향한 복종입니다. 신을 대하듯 그들을 진심으로 섬기면 됩니다. 그게 제가 바라는 복종입니다!”

“아!”

“으으음…….”

신음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양심 있는 법조인들이 지향하는 아름다운 세상.

여기 있는 이들이 함께한다면 그 세상은 현실에 펼쳐질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로펌에는 덕망 있는 선배님들을 모실 생각입니다. 가령……. 올해 퇴직하시는 연수원장님 같은 분 말입니다.”

“저, 정말요?”

“연수원장님을요?”

“원장님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선배들을 멘토로 임명할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은 변호사 자격 취득 후 단시일에 대한민국의 진정한 법조인이 될 것입니다!”

변호사 자격증 갖고 있다고 수많은 법률에 모두 능통한 게 아니다.

신출내기 변호사들 중에는 민사소장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이론과 실전은 어느 바닥에서나 달랐다.

연수원에서 가르치는 이론은 수박 겉핥기식이다.

로펌에 취직해 시니어들의 활약을 보며 인턴 수습기간을 보내거나 법원이나 검찰에서 시보 딱지를 달고 연수를 받아야 했다.

갓 배출된 변호사들은 특히 소속이 없으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그래서 육성이라 말하는 겁니다.”

들뜨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의견을 모두 피력했다.

이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딱 봐도 깊은 생각에 빠진 이들.

“대충 계산해도 로펌을 만들게 되면 초기 사무실 비용과 인건비를 포함해……. 수십억 대는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해요?”

정민정이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기며 나의 말에 대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그래서 로펌 초기 창업비는 투자를 받아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최소 금액은……. 500억 대입니다.”

“500억!”

“헛!!!”

보통 500억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체감이 어려운 숫자가 되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자금 규모 면에서 크게 비중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오늘 하루 일본을 후려쳐서 벌어들인 자금에 비교해도 새 발의 피였다.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나요? 장태산 씨, 자선 사업가예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권주희가 물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정도면 나는 돈 많은 또라이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계산은……. 하늘이 대신해 줄 겁니다.”

***

“다들 내일 연수원에서 보도록 하죠~.”

“오피스텔 비번 잊어먹지 말아요.”

“도서관보다 연구실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흐흐. 한국평등법연구회를 위하여!”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유흥이 가능한 일산 호수공원 주변.

쌀쌀한 저녁임에도 한국인들의 애정 음료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에 물고 다들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오피스텔에서 나와 삼겹살 맛집에 들어갔다.

연속 3일째.

덕수는 오늘도 변함없이 먹어 제꼈다.

전생에 돼지하고 원수졌는지 돼지고기만 보면 사족을 못 썼다.

기분이 좋았다.

한국평등법연구회가 정식으로 발족됐다.

참석했던 이들 모두 머리가 장식품은 아니었다.

이런 호조건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모두 거부감 없이 입회 가입서에 서명했다.

당연히 회장은 내가 됐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기업도 지분 가치가 많은 이가 회장하듯 같은 이유였다.

여기서 회장까지 따로 뽑자고 했다면 그때는 내가 때려치웠을 것이다.

나 그렇게까지는 호구 아니다.

“행님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데이~.”

덕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장 회장. 앞으로 잘 부탁해.”

“자치회장님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팍팍 밀어줄게~. 그러니까 약속 꼭 지켜!”

“걱정 마십시오. 하늘이 두 쪽 나도 지킬 겁니다.”

“회장님……. 내일 봬요.”

“회장님! 우리 멋들어지게 연구회 꾸려 봅시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 나누는 맛있는 음식과 술 한 잔.

이게 바로 세상 사는 맛이다.

“그럼! 연수원으로 고고!”

대부분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어 연수원으로 향했다.

“수진아. 넌 연수원에 안 가?”

“전 회장님과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고뤠?”

권주희가 특유의 말투로 공수진과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내일 뵙겠습니다.”

“안녕~.”

눈치 빠른 연수원생들이 손을 흔들며 흩어졌다.

“오늘 수고했어. 능력이 대단해.”

“이제 알았어? 흐흐.”

사람들이 사라지자 팔미호와 난 바로 말을 놨다.

“그런데 할 말이 뭐야? 중요한 일이야?”

라페스타에서 연수원 쪽으로 나있는 공원에서 걸음을 멈췄다.

늦은 저녁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살랑거리는 저녁 바람에 흔들거렸다.

쪽쪽.

대답 대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길게 빨아 마시는 공수진.

소주 몇 잔을 마신 그녀의 볼이 붉었다.

거기에 촉촉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날 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마주한 듯한 이 분위기…….

그리고 이내 그녀의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이 꽃잎처럼 열리며 나풀거렸다.

“나…… 술 한 잔 더 사주면 안 될까?”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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