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8장. 멤버 (1) (536/1,284)

538장. 멤버 (1)

“미, 미장센!”

갑자기 튀어나온 영화 용어에 조인수는 당황했다.

고리타분한 사고를 가진 판사였던 조인수도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알고 있는 용어였다.

그리고 지금 장태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느 정도 간파할 수가 있었다.

우선 조인수와 인권법학회에서 준비하는 사법적 반란은 진부한 클리셰라는 뜻.

장태산은 자신만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

모든 장면을 미리 계획하고 밑그림을 그려 극적인 효과와 반전을 노리는 드라마틱한 감독의 무대장치.

즉 혁명의 설계자가 되겠다는 소리였다.

일개 사법연수원 신입생의 선포로는 광오했다.

“…….”

원장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조인수는 멍하니 장태산을 바라봤다.

“제가 잠시 흥분했나 봅니다. 추태는 잊어 주십시오.”

금세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한 장태산.

그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흥분했던 감정을 지워버렸다.

‘도대체 이 녀석은……. 정체가 뭐야!’

마치 노회한 정치인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법원장 시절 가끔 찾아오던 3선 국회의원도 장태산만 못했다.

중국 변검술의 달인처럼 얼굴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자네……. 자신 있나?”

조인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면접과 의심, 대화와 대결, 갈등에 이어 놀람이 조인수의 뇌를 자극했다.

뭔가 될 것 같았다.

미친놈 같은 이 녀석이라면 그간 썩어 있던 바닥을 한 방에 쓸어버릴 것 같은 필이 왔다.

“연수원 생활요? 하하. 물론입니다. 최대한 착하고 조용하게 마무리 할 생각입니다.”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녀석.

“으음.”

조인수는 신음을 흘렸다.

상대가 더 이상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조인수도 장태산이 내부의 적이 아니라고 장담하지는 못했다.

지금껏 마주했던 수많은 죄인들도 상당수 이미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 많았다.

장태산도 그런 자들 중 하나 일 수 있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연수원장에게 폭탄을 던져놓고 이제 자리를 뜨려는 장태산.

“그게 다인가?”

조인수는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괴물이자 폭탄, 의식의 혁명가에게 뭔가를 더 듣고 싶었다.

“아! 맛있는 찻값으로 한 가지 원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장태산이 조인수를 봤다.

“뭔가?”

기대를 품고 장태산을 바라보는 조인수.

“제가 소싯적에 풍월을 좀 읊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말 중에…….”

빙긋 웃는 장태산.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라…….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등을 보이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태산.

끼리릭 쿵.

문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원장실 공간에 울렸지만 조인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몸은 깨달음의 보리수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이니…….”

갑자기 장태산이 던져놓은 화두를 붙들고 해석하는 조인수.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

쿠웅!

조인수를 강타한 젊은 친구의 말.

판사 생활 시절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 다양한 성현들의 가르침을 섭렵했던 조인수는 그 내용을 천천히 음미했다.

드리고 싶다는 말을 가장한 충고였다.

건방지다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장태산이 전하는 진심이었다.

“결국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번민하게 만든 건……. 바깥세상의 것들이 아닌 내 안의 먼지 같은 집착이라는 말인가……. 나의 집착…….”

형체 없는 화두를 붙잡고 어느새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조인수 원장.

영욕이라 말했건만 그걸 금세 잊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도 뭔가를 이루고 싶은 미련이 번뇌를 키웠다.

어느새 발뒤꿈치까지 따라붙은 새파란 물결이 스러지는 물결을 삼키고 있지만 아직도 장강의 주인인 듯 행세하는 노회한 물결과 다르지 않았다.

파아앗.

창가로 저물어 가는 봄날의 황혼이 짙게 물들고 있었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며 조인수는 침묵에 빠졌다.

미래는 기성이 아닌 장태산 같은 젊은이들에게 맡김이 순리에 맞았다.

놓지 못하는 과거의 유산 같은 집착에 스스로 함정을 파고 들어앉은 걸 알았다.

“그래도……. 아쉽네…… 아쉬워…….”

장태산이 의도한 바를 깨달았지만 미련은 남았다.

인생 100세 시대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직 떠나기에는 할 일도 남은 일도 많았다.

세상을 위해 뭔가 더 해내고 싶은 열정이 여전했다.

마음만은 처음 판사가 되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없었다.

퇴직 후에는 로펌에 취직해 전화나 돌리는 전관 변호사 역할만 남았다.

판사들의 보험이라고 말해지는 전관 변호사.

그렇게 살며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끼릭!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아! 원장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빼꼼이 문을 반만 열고 고개만 들이민 장태산.

“???”

의문에 찬 시선으로 장태산을 바라봤다.

녀석은 활짝 웃고 있었다.

“퇴직하시고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시고 제가 만들 로펌 고문으로 들어오십시오. 대우는 업계 최고로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또 사라져 버리는 장태산.

“…….”

도깨비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바보가 된 것도 같은 조인수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봤다.

엘리트들의 산실 법원연수원이 아니라 초등학교 교장실 같은 정감이 밀려왔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업계 최고를 보장하겠다는 도깨비 같은 녀석의 제안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왠지 저 녀석과 같이 있게 되면 재미있는 일들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답답했던 마음이 한 줄기 햇살에 스르르 사라지는 안개처럼 금세 개었다.

그리고 조용히 가슴 속에 찾아오는 뭔지 모를 마음의 평안.

“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신도 모르게 목청을 한껏 열고 터져 나오는 시원한 웃음.

조인수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친 듯 웃음을 토해냈다.

신에게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 새로운 날을 맞는 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그렇게 조인수는 자신도 모르게 미래의 평화로울 제2의 인생을 예약했다.

***

“좀 셌나? 대법관 퇴직도 아닌데 업계 최고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

이런 점에서 난 아직도 한참 멀었다.

대우를 좀 더 후려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뱉은 말인데 책임져야지. 뭐 연봉 값은 하시겠지~.”

맛있는 녹차 한 잔에 이것저것 많이 풀었다.

그냥 돌아서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에 보인 눈빛이 걸렸다.

진짜 법원을 바꾸고 싶어 하는 진심이 눈에 한가득 담겨 있었다.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생각지 못한 자기 고백도 멋졌다.

법원 고위 관계자가 함부로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날 포섭하려는 마음만 앞서서 도리어 많은 걸 까발렸다.

내로라하는 30년 판사 인생도 회귀 인생한테는 밀렸다.

물론 나도 내 보따리를 좀 풀었다.

재판정에서처럼 치열하게 심리 공방이 벌어졌다.

측근에게도 밝히지 않은 속마음까지 살짝 보여줬다.

한 편의 반전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난 지금도 섬세하게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방법으로 모든 적폐를 확 날려버릴 그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짜릿짜릿 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법원이나 사회 개혁은 그 집단 소속인원들이 셀프 청소할 수 없는 법.

쌓인 적폐들은 능구렁이처럼 수십 년 이상 묵은 자들이었다.

지금은 괜히 건드려봐야 내 손에 똥물만 튄다.

- 카르마 포인트를 듬뿍 획득했습니다!

공짜는 아니었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하늘에서 포인트를 쐈다.

조인수 연수원장님이 뭔가 깨달았다는 증거다.

“우리 동생 불러볼까~.”

포인트를 획득하니 기분이 좋다.

고기를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우리 덕수.

지리산 호랑이 가문 출신 아니랄까 봐 고기를 무척 밝혔다.

목이 빠져라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행님요!!!”

굳이 부를 것도 없었다.

원장실에서 나와 1층 로비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행님?”

“어머……. 도련님과 산적이다!”

“호호. 저 두 사람 개그맨 아니지?”

호랑이 울음소리에 다들 쫄기는커녕 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유명인이 됐다.

저녁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연수원생들이 우리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많이 기다렸어?”

“야! 배고파 죽는 줄 알았음더!”

뱃가죽을 잡고 활짝 웃으며 덕수가 다가왔다.

용 됐다.

구질구질한 구식 양복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맞지도 않아 어깨가 곧 터질 것 같았던 양복.

고기와 술을 실컷 먹이고 강남 한복판에 있는 백화점 내 슈트 전문점에 데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지내고 싶었지만 덕수는 무엇보다 사회생활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연수원 기숙사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 대신 스타일을 바꿨다.

내가 VVIP인 백화점에서 위아래로 옷을 쫙 빼줬다.

다행히 빅 사이즈가 다양하게 있었다.

한 벌로 부족해 몇 벌을 더 여벌로 마련해 줬다.

미흡하게나마 시작된 덕수를 위한 돈질.

넥타이도 여러 개 구입했다.

시계도 때와 장소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몇 개 질렀다.

구두와 운동화, 체육복과 일상복에 속옷까지 풀 세트로 장만해줬다.

그때마다 포인트가 차곡차곡 들어왔다.

돌석 장군님이 계산 하나는 철저했다.

연예인들이 애용하는 청담동 헤어ㅤㅅㅑㅍ에서 머리카락도 다듬었다.

볼륨 가득한 샤기 투블럭 컷.

그때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돈의 힘은 지리산 산적도 건실한 인간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다가오는 덕수는 누가 봐도 괜찮았다.

TV에 나오는 프로 체육인 같았다.

하루 두 번 턱수염을 밀게 만들었다.

머리는 헤어 젤을 이용해 정돈하는 법도 가르쳐줬다.

유치원생들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체크했다.

덕수는 그 많은 것을 머리가 멍청하지 않아 바로 몸에 각인시켰다.

다만.

“행님~ 오늘도 괴기 사주실랍니까? 헤에~.”

말투는 노답이다.

덩치에 안 어울리는 살 떨리는 애교와 사투리는 전혀 매치가 안 됐다.

몸에 밴 촌티는 아무리 품격을 살리려고 해도 당장 극복할 수가 없었다.

“뭐 먹을래?”

“지는…… 그 도야지 겹살이 묵겠습니더!”

어제도 먹었던 삽겹살.

둘이 30인 분을 먹어 치웠다.

덕수와 함께 있으면 식욕이 전투적으로 변했다.

제주도산 무항생제 흑돼지 삼겹살은 맛도 좋았다.

“공부는 안 해?”

“행님이 대가리 만져준 뒤로 마 억수로 좋아졌다 아닙니꺼! 고맙습니데이~.”

덕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거 다 공짜 아니었다.

화타의 의술로 막혔던 혈자리를 뚫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 전에 다치고 막힌 자리라 시일이 좀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그래, 저녁 배불리 먹고 가서 공부해. 해보니까 복수는 내 손으로 직접 해야 맛이더라.”

“알겠습니더! 지 손으로 확 염씨 집안 그 X넘의 시키들 뽀샤부리겠습니더!”

욕이 참 찰졌다.

다만 이곳이 연수원 건물 1층이라는 것.

덕수의 욕질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일반 연수원생들.

덕수와 이렇게 계속 함께 있다 보면 원만한 인간관계는 불가능할 게 분명했다.

“가자.”

“넵!”

덕수와 함께 로비를 벗어나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양이 멋들어지게 물들고 있었다.

저녁밥 먹기 딱 좋은 분위기.

“???”

그때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일단 다리가 길었다.

변태는 아니지만 입고 있는 착 달라붙은 청바지에 금세 눈이 갔다.

뒤태가 아주 예술이다.

걸음걸이도 그렇고 처음 보는 연수생이었다.

법학 서적을 손에 들고 있었다.

2,000명의 연수원생들 중에 반수 이상이 여성들이었다.

황혼에 물들고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여인.

브라운 계열의 더블 숏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있어서 더 분위기 있어 보였다.

느낌이 괜찮았다.

아니 뭔가 특별했다.

잠시 시선을 빼앗기긴 했지만 이내 걸음을 옮겼다.

세상은 넓고 미인도 많다는 걸 누구보다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스치듯 지나갔다.

다만.

“장태산 씨?”

그녀가 날 불렀다.

눈빛이 마주쳤다.

“!!!”

감탄이 짧은 탄성이 돼 입술 밖으로 터질 뻔했다.

외모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웹상 격언이 머릿속을 스쳤다.

“누, 누구십니까?”

반달눈을 만들며 배시시 웃는 트렌치코트 자락을 날리는 그녀.

“전…….”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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