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장. 클리셰와 미장센
‘이 기회를 날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겠지.’
조인수는 장태산이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오승택 대법관이 속해 있는 한국민사소송연구회나 엘리트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한국민법판례연구회와 함께 연수원 3대 학회라 불리는 단체였다.
제대로 된 경쟁도 해보지 못하고 엘리트들에 밀려 지방에서 판사 생활을 하는 상당수가 한국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이었다.
타락해 가는 다른 연구회와 달리 아직까지 순수함이 가장 많이 남아 있었다.
한국대뿐만 아니라 여러 대학교 출신들이 다양하게 모였다.
지역 색채도 옅었다.
가끔 일어나는 사법부 반란의 핵심 조직이었다.
전국 판사 회의를 주도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었다.
엘리트와 일반 판사의 차이는 한 끗도 되지 않았다.
하나의 법체계 아래서의 실력이야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출신과 학벌, 연줄에서 라인이 갈렸을 뿐이었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 정치 감각이 떨어진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조인수는 학회에 자부심이 남달랐다.
그리고 사법부에 마지막 남아 있는 양심적 조직을 직접 추천했다.
친구인 주태열 교수를 덤으로 올렸다.
생각 있는 친구라면 오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하며 대답을 기다리는 조인수.
웃고 있는 녀석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 눈빛을 보자 감이 잡혔다.
“싫습니다.”
“싫어?”
조인수는 당황해 두 눈을 치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왜???”
조인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지금까지 이런 혜택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연수원장의 직접 추천이었다.
42기 회장이 될 수도 있었다.
한국인권법연구회는 판사 회의를 주도할 만큼 숫자가 많아서, 기수 수장이 되면 엄청난 혜택이 따랐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이유를 꼭 듣고 싶습니까?”
녀석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듣고 싶네.”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인수는 장태산을 바라봤다.
“클리셰 같아서요.”
“클리셰?”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짧은 답변이었다.
“대놓고 여쭤보겠습니다. 원장님은 자부심을 가지신 듯한데, 그 학회가 한국민사소송연구회보다 낫습니까?”
“……그건.”
“아니면 엘리트 집단이라 홍보하고 다니는 한국민법판례연구회보다 미래가 더 확실하게 보장됩니까?”
“…….”
조인수는 입을 다물었다.
말투로 보아 이미 두 연구회와 접촉이 있었던 것 같다.
조인수가 합격했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연구회 입회가 개인의 선택에 맡겨졌다.
한마디로 최고 지성들의 선택인 만큼 각자 이유도 확실했다.
그런데 클리셰라니…….
“원장님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에게는 진부한 제안입니다. 인권학회나 여타 학회 모두 도긴개긴 같아서요.”
“뭘 알고 말하는 건가?”
“어떤 답을 원하십니까? 정재계와 야합해 타락한 사법부 개혁을 위해서는 양심 있는 판사들의 힘이 필요하다고요? 그것도 원장님이 추천하신 인권법연구회 같은 조직을 등에 업고 움직이는?”
“!!!”
장태산의 말을 듣고 조인수는 깜짝 놀랐다.
눈앞의 청년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은 학생이었다.
사법연수원 1년 차 신입연수원생 입에서 나올 만한 대답이 아니었다.
법원 내부에서도 쉬쉬하는 비밀이 아무렇지 않게 장태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판사들은 자존심이 높아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대통령도 재판장 안에서는 판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판사봉만 들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듯 그 어떤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비사가 많았다.
판사들은 판사들 스스로 징치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검찰도 재판장에서 서로 껄끄러운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 판사들의 비리는 대부분 눈감아준다.
언론 역시 법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라 적극 논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개 연수원생이 원장에게 타락한 사법부 운운하며 거침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 녀석 정체가 뭐야!’
다시 한 번 장태산을 천천히 훑어 봤다.
구렁이였다.
능력과 열정이 넘치는 청년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은 장태산의 상대가 안 될 만큼 눈빛이 깊었다.
어느새 조인수 손에는 땀이 맺혔다.
긴장감이 폭풍처럼 순식간에 밀려왔다.
“원장님이 그리고 계시는 밑그림은 이미 실패입니다.”
“뭐라고?”
대꾸를 넘어 이제는 가르치려 들었다.
“사법부에 쌓여 있던 적폐들을 모두 걷어냈다고 칩시다. 그럼 새로운 적폐가 안 나타날까요? 먹을 판은 작은데 인원은 넘친다……. 한국 인권법연구회도 파벌이 존재할 겁니다. 그중에서 성공하는 이들은 성공하고 패배하는 자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죠.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그곳에서도 야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린가! 그래서 지금 이 꼴을 계속 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자네가 뭘 아는지 몰라도 법원에 팽배한 부조리는 상상을 초월해! 그 모든 건 국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로 돌아갈 것이야!”
조인수의 목소리가 원장실에 폭탄처럼 터졌다.
그럼에도 꿈쩍하지 않는 장태산.
“원장님은 깨끗하십니까?”
훅! 날카로운 검이 조인수의 심장을 사정없이 쑤셨다.
“자네…….”
입술을 파르르 떠는 조인수.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장태산이란 녀석이 자신의 과거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 답답한 법원에서는 못 느끼시겠지만 과거와 달리 감춰진 모든 폐단들이 서서히 까발려질 겁니다. 법원 자체의 자정 능력은 이미 상실 됐습니다. 한국인권법연구회 출신들도 권력을 잡으면 지금과 다르게 변할 게 확실합니다. 잠재적 적폐가 빤한 그런 인물들로 거침없이 깨어나는 국민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안 늦었어! 우리 법원도 변하고 있어! 그리고 과거부터 쌓아온 적폐들과 우리는 달라! 좀 더 깨끗하고 청렴한…….”
“말씀하시는 판사들 모두가 양심을 지키고 모두 다 정당한 판결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혈연, 지연, 학연 하다못해 연수원 인연까지 모두 무시하고 말입니다.”
장태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도 100원짜리 동전 도둑질 한 놈과 10000원짜리를 훔친 놈들은 달라!”
조인수는 재판장의 변호사처럼 인권연구회 판사들을 위해 항변했다.
“맞습니다. 정치인이라면 덜 먹는 자들을 뽑는 게 맞죠. 하지만 여기는 국민들이 신처럼 마지막에 가서 의지할 법원입니다. 한 번 금이 간 판결봉은 언젠가 쪼개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장님이 평생 쌓고 사는 한처럼 치유될 수 없습니다.”
“크으!”
조인수는 심장을 쑤시는 아픔에 치를 떨었다.
장태산은 피아를 구별하지 않았다.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런 자신조차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성경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스윽.
녹차 주전자를 손에 잡는 장태산.
마치 방의 주인이 바뀐 것처럼 편안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일격을 얻어맞은 조인수 원장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반박하고 싶어도 과거의 일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장태산이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 아니었다.
죽어서 염라대왕 심판장에라도 선 죄인처럼 조인수의 영혼은 심하게 떨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또로로록.
장태산은 보란 듯이 다기 세트 중에 비어 있는 깨끗한 잔에 녹차를 따랐다.
“아무리 질 좋은 포도주도 한 번 발효를 거친 썩은 옛 가죽주머니에 넣으면 똥물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담으라고요?”
장태산이 조인수를 향해 물었다.
“자네 말은 알겠지만 개인이 바꿀 수는 없어. 그들이 쌓은 견고한 성은 요새와 다름없지. 과거부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분야의 사회층을 점령하고 있어. 하나가 공격을 받으면 다른 곳에서 지원 사격을 하게 되지.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도 그들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여. 대통령 밑에 있는 관료들 상당수가 알게 모르게 다들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아쉬운 대로 서둘러 힘을 모아야 하네. 적을 잡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납득해야 할 법적 하자 감수성 정도라고 해두지.”
30년 판사 경력은 그냥 쌓이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킨 조인수 원장이 장태산을 다시 설득하기에 나섰다.
‘이 녀석이라면…….’
분노 따위는 잠시였다.
자신 앞에서 당당히 차를 따르는 모습도 건방져 보이지 않았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자라면 괜찮았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법원에 근무하면서 몸에 밴 고리타분함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 것 같았다.
원장 앞에서 이만큼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장태산이라면 뭔가 해낼 게 확실했다.
“법적 하자 감수성이라……. 성인지 감수성과 비슷하게 재밌는 발상입니다.”
친구 주태열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장태산의 눈동자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판사 생활 동안 깨달은 게 있다면 저런 눈빛을 소유한 자들은 일단 진실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된 관상법.
아무리 입으로는 진실을 주장해도 타락한 영혼은 밝은 빛을 뿜어내지 못했다.
양심을 버린 썩은 영혼들의 초점 없고 혼탁한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장태산은 정확히 이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조인수가 말려들 만큼 말빨도 좋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은 건 누구나 마음이 같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최선 대신 차선을 선택하는 법. 나도 오늘 너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이왕 나온 김에 다 까놓도록 하겠다.”
조인수의 말투가 변했다.
신입 연수생이 아닌 동등한 입장의 조력자를 대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경청하겠습니다.”
그러자 장태산의 태도도 달라졌다.
“밖에서 얼마나 알고 왔는지 몰라도 지금 대한민국 사법부는 풍전등화의 위기다. 대대로 내려온 사법 권력이 상속되고 있다.”
결단코 밝히고 싶지 않았던 집안의 치부.
조인수도 얼마 전에야 그 정체를 알아챌 정도로 무섭고 치밀했다.
“한국변협을 위시해 대법관 상당수, 서울중앙지법을 비롯해 법원 핵심부를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적절하게 각 연구회 출신들을 이간질하거나 경쟁을 붙여 활용한다. 상부로 끌어주겠다는 미끼를 대부분 거절하지 못하고 물 수밖에 없다. 수도권에 근무해야 판사들의 마지막 꿈인 대법관이 될 수 있으니까.”
판사들은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신분이 보장 된다.
10년마다 펼쳐지는 재임용 심사도 대부분 형식적이었다.
어지간히 찍히지 않는 이상 근무평정표에 ‘하’가 찍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블랙 리스트가 존재한다.”
아픈 법원의 흑막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조인수.
오늘 이 순간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흐음……. 블랙리스트요?”
놀라지도 않고 지그시 눈을 깔고 듣고 있는 장태산이 조용히 되물었다.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해 자기들끼리 돌리는 건 예전부터 있던 방식이다. 근무평정표를 조작해 판사를 길들이는 삿된 무리들이 지금 대법원과 행청처 고위직에 포진해 있다. 그들을 몰아내야 판사들이 여러 압력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어떤 판사도 시골 법원에서 판사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큰 사건을 맡아 자신의 뜻을 펼치고 싶었다.
찍히면 오지로 발령이 나 일거리 천지인 민사사건이나 처리하다 끝났다.
아이들 교육 문제도 발생했다.
판사라는 선망의 직업 때문에 결혼한 여성들이 불만을 표시하는 건 기본이다.
능력 없는 존재로 낙인 찍혀 한순간 패배자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말뿐인 순환근무제 때문에 서울과 경기도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끝나는 판사들이 수두룩했다.
판사도 욕망이 살아 숨 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연수원장님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장태산.
“……지금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학회에 들어와 준다면!”
“싫습니다. 그림이 안 그려져요.”
“그게 무슨?”
“저 판사 안 합니다. 물론 검사도~.”
“무슨 소린가? 그 성적이면 충분히 수도권 판사를 해도 되는데!”
“싫어요.”
애처럼 말하는 장태산을 조인수는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꿈이 없는 건가? 아니면 말만 청정을 부르짖는 도인?’
장태산의 속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네는 방관자인가?”
“아니요. 행동 실천가입니다. 저희 집 가훈이 ‘행동하는 삶만이 증거다’입니다.”
“그런데 왜? 힘을 가졌다면 응당 그걸 사용해 사회 정의를 위해…….”
“제 성격이 누가 이미 만들어 놓은 무대를 싫어합니다.”
“???”
선뜻 이해를 못하는 조인수.
뜬금없이 무대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말과 달리 장태산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뭔가 활활 타올랐다.
“원장님과 뜻을 같이 하고 있는 동료 분들이 그려내는 그림들은 진부한 것들뿐입니다. 막연한 도전이 아니라 확실히 적의 목을 꺾고 다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할 그 밑그림이 없습니다.”
“!!!”
강한 장태산 말투에 조인수는 눈을 부릅떴다.
착각하고 있었다.
눈앞의 청년은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연신 몸에서 풍겨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들.
적의 목을 사정없이 베어 넘기는 전쟁터의 장수나 다름없었다.
“극적인 효과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드라마틱한 한판 승부! 그게 제가 원하는 미장센입니다. 클리셰가 아닌 나만의 미장센!”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