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장. 호랑이 패밀리 (2)
“절 아십니까?”
“당연하지. 난 한국대 법학과 02학번 석성욱이라고 한다. 한국민법판례연구회 41기 회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네 학교 선배이자 연구회 회원들이다.”
석성욱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비밀스럽게 연구 회원을 모집하는 한국 민사 소송 연구회와 달리 민법 판례 연구회는 표면적으로 사법연수원 연구회 1위였다.
가볍게 연구회 회원들을 모집하지 않았다.
한국대 법학과 출신인 순혈들, 그중에서도 성적 우수자들만 선별해 뽑았다.
대부분 엘리트들이었기에 훗날 거의 판, 검사가 됐다.
지난 세월 누적되어 온 연구회 회원들 숫자만 해도 수백 명에 달했다.
법조계에 견고한 아성을 구축한 셈이다.
그런 만큼 연구회 입부 신청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명성과 달리 예외 상황이었다.
“그래서요?”
‘소문대로 까칠하군.’
연구회 회장 석성욱은 후배를 훑으며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한국대에 재학 중인 동문들로부터 인정할 만한 후배이며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조교를 통해서 이미 장태산의 진가를 알아본 후였다.
집안도 대단했다.
장태산 어머니가 모 그룹 회장의 딸이었고 현재 중용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었다.
장태산이 투자 회사를 운영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게다가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을 정도의 체육 인재이기도 했다.
장태산은 뭐니 뭐니 해도 전면에 내세우기 무척 좋은 상품이었다.
한국대 법대생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
교수들도 하나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장태산이었다.
다만 성격이 몹시 까칠하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있었지만,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서 석성욱은 후배에게도 고개를 숙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5대 로펌 중 한 곳인 강촌의 대표 변호사였다.
유한 법인인 강촌에서 가장 지분이 많았다.
그런 아버지를 돕고 싶었고, 장태산은 미래 큰 고객이 될 가능성이 무척 커보였다.
“후배님이 잘 모르나 본데. 우리 연구회 아무나 받아주지 않아. 벌써 입회 원서가 수십 장이 들어왔어.”
석성욱 옆에 있던 연구회 임원이 부연 설명에 나섰다.
특권 의식이 몸에 배어 있는 태도였다.
“장태산. 우리 연구회에 들어와라. 42기 연구회 회장 내줄게.”
석성욱이 큼지막한 미끼를 던졌다.
자치회 임원에 버금가는 자리였다.
잘나가는 연구회는 카르텔이 장난 아니었다.
연구회 임원들은 그 연구회 소속 선배나 후배들과 돈독한 사이로 지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관계였다.
결국 법원도 사람들이 모여 움직이는 다른 형태의 세상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로 인도해 주는 인맥이 전무하면 결코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싫은데요.”
단칼에 제안을 잘라 버리는 장태산.
석성욱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켜 올라갔다.
“장태산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연구회 졸업한 선배님들이 대부분 법원과 검찰 쪽에 포진해 있다. 그 수가 무려 400명이 훌쩍 넘어. 그 의미를 모르겠어? 우리 연구회 출신들이 상당수 법조계 권력을 쥐고 있다는 소리야!”
석성욱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래서요?”
“…….”
시크한 장태산의 반문에 석성욱은 물론 회원들은 멘붕에 빠졌다.
지금껏 이렇게 건방지고 당돌한 후배는 없었다.
어느 정도 소문은 들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대놓고 눈앞에서 당하니 입맛이 떫었다.
석성욱을 비롯해 연구회 임원들 표정은 처음과 달리 차갑게 굳어졌다.
“입회를 거부하는 이유나 알자.”
석성욱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물었다.
다른 곳에서 먼저 입회 제안이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제부터 인재를 끌어 들이기 위해서 연구회 임원들의 물밑 접촉이 활발했다.
‘벌써 한국민사소송연구회에서?’
유일하게 실력으로 누를 수 있는 연구회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려서요.”
“???”
짧고 강한 장태산의 대답에 연구회 임원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장태산의 말.
“그, 그게 무슨 뜻이지?”
석성욱이 정신을 차리고 재차 물었다.
“연구회 이름부터 시작해서……. 선배들까지 모두 다 구린 냄새가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똥내~.”
피식 웃음까지 흘리며 싸가지 없게 대꾸하는 장태산.
“야! 너 말 다했어?”
“와아아……. 이런 미꾸라지 같은 새끼를 봤나. 후배라고 대접해 줬더니 여기가 학굔 줄 알아?”
“너 이제 제대로 찍혔어 새끼야! 앞으로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석성욱이 입을 떼기도 전에 자존심 강한 연구회 임원들이 다다다 쏘아붙였다.
농담이 아니라 연구회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면 법조계 생활이 골치 아파진다.
그런 이유로 파워 있는 연구회들은 서로를 견제하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또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게 개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신입 사법연수생 따위 정도는 철저하게 밟아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여전히 비웃음을 지은 채 답하는 장태산.
“…….”
강의실을 채운 공기가 차갑게 바뀌자 석성욱과 임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낯선 공포가 공기 중에 섞여 서늘하게 느껴졌다.
분명 학번이 한참 뒤인 까마득한 후배였지만 장태산의 눈빛은 무서웠다.
눈동자에 담겨 있는 서늘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냉기가 서려 있었다.
“성년에 학교도 아니고. 연수원에서는 나나 당신들이나 똑같은 연수생인데……. 미친 새끼? 찍혀? 국물? 푸하하하하하하하.”
장태산이 강의실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수준 낮게 그것도 협박이라고……. 곱게 졸업해서 판검사 해야죠?”
도리어 협박 같은 압력을 느낀 석성욱 일행.
“착하게 살아요. 괜히 나 건드려서…… 험한 일 겪지 말고. 조용히 좀 지냅시다. 영혼까지 털려 쥐고 있던 것까지 다 뺏기기 전에~.”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장태산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본 채 나긋나긋 내뱉는 말.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몸을 옥죄는 것처럼 의지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으으…….”
가는 신음이 석성욱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왔다.
“그럼 선배님들 다음에 뵙겠습니다.”
장태산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가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뚜벅뚜벅.
협박이 분명한 한마디를 날리고 유유히 강의실을 벗어나는 장태산.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허어억……. 헉.”
“미, 미친 놈…….”
공부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매진해 온 범생이 연수원생들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기운이 쫙 빠지고 맥이 탁 풀렸다.
장태산이 강의실 문을 벗어날 때까지 숨을 쉴 수 없었다.
“회장……. 어떻게 할 거야? 저 자식 그대로 놔둬?”
“아우! 또라이들은 건드리지 말자. 저놈 말고도 들어오려는 애들 많아.”
의견이 분분이 나뉘었다.
으드득.
분한 듯 이를 갈며 장태산이 나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석성욱.
“보면 알겠지……. 얼마나 잘난 새낀지.”
‘넌 나한테 제대로 찍혔어! 이 X새끼!’
석성욱은 본의 아니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무릎 꿇고 싹싹 빌기 전에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
진짜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나의 뺨을 때렸다.
하긴 내 성격도 참 문제다.
못들은 척 좀 참으면 되는데 왜 그게 그렇게 아니꼬왔는지 모르겠다.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연구나 하자고 접근해 왔다면 관계 진행이 달랐을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선배들에게 귀여움 좀 받고 생활하는 착한 연수원생(?)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풍겨오는 악취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나이는 서른도 안 된 것들이 나쁜 것만 배웠다. 잘난 조직과 선배라는 타이틀을 믿고 너무 나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태도를 보며 깨달은 게 있었다.
법원의 적폐가 아주 뿌리 깊다는 사실을 말이다.
학교부터 시작해 연수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끼리끼리 패거리가 없는 곳이 없었다.
이러니 유전무죄 소리가 나오는 거다.
돈 많은 놈들은 하나같이 죄를 짓고도 전관이나 인맥 변호사를 고용해 보란 듯이 비웃으며 쉽게 빠져 나왔다.
그런 자들의 연료가 돼 줄 선배들의 작태를 눈앞에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새끼들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
한 번 부딪힌 걸로 끝날 인연 같지 않았다.
똑똑한 놈들은 특히 자존심 상했던 일을 잘 잊지도 않았다.
얼떨결에 뒤끝과의 전쟁이 예상됐다.
오정 임 회장과 손대균 선배가 당부한 ‘얼마간 조용히 살라’는 말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다.
“날 좋다~.”
아직 3월 초였지만 날이 좋았다.
사법연수원 2일차.
그새 많은 일들이 발생했다.
앞으로도 무수히 예상되는 그 무엇.
하늘 한 번 보고 한 숨 한 번 쉬고 미래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연수원 안에서도 닥칠 일이고 벌어질 일이라면 즐겨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디서 찾나?”
돌석 장군님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걱정이 됐다.
덩치만 컸지 순박한 에너지를 풀풀 풍기던 신덕수가 마음에 걸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나와 인연이 깊었다.
“밥 먹으러 갔나?”
강당에서 3시간 가까이 자치회 임원들을 뽑았다.
이 시간이면 배고픈 연수원생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밤이 찾아온 연수원.
오가는 그림자가 많았다.
“저기 있겠군.”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보였던 신덕수였다.
그를 지지하던 이들 중에도 연호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신림동에서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 그룹이 전멸했다는 의미였다.
신덕수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걸음이 공원 쪽으로 향해졌다.
일산의 명소인 호수공원.
상처 받은 촌놈이 갈 곳은 뻔했다.
사법연수원 근처에 그나마 자연에 파묻힐 만한 곳은 호수공원이 유일했다.
어둠에 물들어가는 호수공원에 가로등이 켜졌다.
일상을 끝내고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그리고…….
덩치 큰 산적이 의자에 앉아 넋을 뺀 채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있는 것 자체가 위협적이다 보니 그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피해서 다녔다.
양복 차림이 아니었다면 신고를 당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휴우우우우우우우.”
긴 한숨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동아줄을 잡은 듯 앞만 보고 달렸을 신덕수.
세상사가 냉정하고 지극히 계산적이라는 걸 오늘 다시 한 번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 신덕수를 인정만으로 뽑기는 힘들었다.
자치회 수석 총무 자리도 그만한 자질이 갖춰져야 기수 선후배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신덕수는 돈도 없고 학벌도 딸리는 그저 그런, 1000명의 사법연수원생들 중에서도 하위 그룹에 드는 이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세상 다 산 듯한 그를 다크한 에너지가 휘감고 있었다.
“밥 먹었어요?”
신덕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밥이라도 챙겨 먹었는지 물었다.
“…….”
신덕수는 큼지막한 눈동자로 나를 돌아봤다.
누군지 묻지 않았다.
이미 나의 얼굴을 아는 눈치였다.
“저 누군 줄 아세요?”
“네……. 연수원에서 봤음니더. 제비처럼 생겨가지고……. 눈에 확 들어왔음더.”
“끙…….”
일단 한 번 참았다.
“고기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는디.”
전 재산이 70만 원 안짝인 신덕수가 고기 사먹을 돈이 어디 있겠나.
월급 들어오기 전까지 그걸로 버텨 내기도 힘들 것이다.
한 달에 복사비만 수십만 원이 나간다는 연수원이었다.
“일어나요. 라페스타 쪽에 등갈비 맛집들 많아요.”
“마, 지금 내캉 괴기를 먹자는 말씀이신지라?”
“네.”
“와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 신덕수.
처음 보는 연수원 동기인 신덕수와 나.
이유도 없이 밥까지 먹을 관계가 아니라는 걸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얽히고 설켜 버린 인연인 것을.
자신의 후손을 부탁한다고 말했던 신돌석 장군님.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시고 운명을 달리했던 호국영령의 자손을 굶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돌석 장군님 옆에 있던 호랑이와 여기 앉아 있는 산적의 기운이 아주 비슷했다.
툭 멋대로 입이 열렸다.
“덕수야……. 내가 아무래도 전생에 네 형 같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