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장. 마두 고등학교 (2)
“처음 뵙겠습니다. 42기 연수생 여러분. 전 41기 자치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함상현이라고 합니다.”
다짜고짜 단상 위에 올라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하는 41기 자치회 회장.
나이가 3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완전 아재였다.
“그리고 옆에 계신 분들은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을 41기 자치회 임원 분들입니다.”
소개에 이어 도열한 20여 명에 가까운 41기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
짧게 울리는 환영의 박수 소리.
마두 고등학교 학생회장과 임원 선출이 시작 됐다.
“다들 입소 안내장에 예고했듯이 오늘 이 시간에는 42기 여러분들을 대변할 자치회 임원들을 선출할 예정입니다. 먼저 자치회장을 뽑겠습니다. 19기부터 시작된 평화로운 전통에 따라 42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권주희 씨.”
“넵!”
가장 앞자리에서 안경 쓴 인상 좋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누님이 일어섰다.
“나오십시오. 42기 자치회 회장으로 방금 선출 되었습니다.”
“…….”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간단하게 학생회장과도 같은 자치회 회장이 그 자리에서 결정됐다.
장유유서의 아름다운 전통 미덕이(?) 사법연수원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에 누구 하나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자치회장이라는 권력자를 뽑는 가장 합리적 방법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았다.
기수 자치회장은 연수원을 나가서도 꽤 괜찮은 명함이 됐다.
변호사가 되어도 굶어 죽을 염려가 없었다.
과거 19기 이전에는 자치회장을 뽑기 위해서 상상을 뛰어넘는 로비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연수원 숫자가 적어 지금보다 더한 이득을 얻었을 건 불을 보듯 빤했다.
동기 판사와 검사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도 예쁨을 받았을 것은 당연했다.
그 결과 민형사 사건에서 승소율이 높은 건 당연한 일.
가만히 있어도 일거리가 몰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그런 폐단을 걷어내기 위해 선택한 강제 임명.
나름 현명한 조치였다.
“그럼 42기 자치회의 양대 기둥인 두 명의 부회장과 수석 총무, 그리고 각급 조를 대변할 반장이라 불리는 조장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들에게 이미 들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임원이 되면 혜택이 상당합니다. 교수님들과 수시로 접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공로가 넘치는 분들은 대법원장님 상을 비롯해 여러 가지 공로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파바밧.
41기 자치회장의 설명에 잠잠하던 사방에서 불똥이 튀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대박 찬스.
“이거…… 우리가 먹자.”
“다들 준비됐지?”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소리가 예민한 귓속을 파고들었다.
한국대 출신을 비롯해 연수원에 가장 많이 입소한 고영대와 연지대 출신들이 주로 몰려 앉은 곳이었다.
치밀한 수 싸움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흥미가 배가 됐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선택되면 미래의 수십억 수백억에 달하는 무형 자산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어른들의 반장 선출.
긴장감이 팽팽하게 공간을 채우며 돌기 시작했다.
“먼저 각 반을 대표할 부회장을 선출하겠습니다. 사법연수원 자치회는 가장 민주적인 방법을 선호합니다. 각 반에서 한 명씩 지원하면 무투표 당선, 그 이외 경선시에는 손을 들어 승패를 결정하는 직접 선거가 되겠습니다. 그럼 각 반을 대표할 부회장이 되고 싶으신 용감한 지원자들은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저를 기준으로 1반 지원자는 왼쪽에 2반은 오른쪽입니다.”
41기 회장의 진행방식은 능숙했다.
42기 회장으로 선출된 여자 회장은 단상 위에서 그의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내년에 자신이 담당해야 할 일을 미리 습득해 놓는 눈치였다.
턱턱.
자리에서 일어난 몇몇 지원자가 용감하게 단상 위로 올라갔다.
숫자는 각 반에서 서넛 정도.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1반 부회장 후보자부터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누가 먼저…….”
“제가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는 그녀.
“……와우.”
“어느 학교 출신이야?”
“어! 우리 후배다.”
남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처음 42기 동기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한국대학교 법학과 07학번 이예린이라고 합니다.”
예린 선배가 짧게 본인을 소개하고 조신하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똑똑했다.
신입 연수생 중에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한 한국 대학교.
신림동을 비롯해 학교에서도 붙임성 넘치는 예린 선배는 인기가 많았다.
한국대 법대 출신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이면 같은 대학교 후배를 밀어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더욱이 예린 선배는 품격이 달랐다.
요즘은 미녀들이 공부를 잘하는 편이지만 예린 선배는 그 정도 차원으로 설명이 어려웠다.
한국대에서도 탑에 드는 그녀의 행동에 평생 공부만 해왔던 범생이 연수원 남자들이 아주 뻑 같다.
미인계가 병법에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배시시.
예린 선배가 활짝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들 모두 이미 넋이 반쯤 나가버렸다.
“아직 연수원 전반에 걸쳐 아는 게 부족합니다. 하지만 41기 선배님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으며 42기 동기들의 공정한 경쟁과 활기찬 연수원 생활을 돕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부족하더라도 많은 지지 부탁드립니다.”
짧게 포부를 밝히는 예린 선배.
휘이이이이이~.
“좋았어! 후배!”
짝짝짝짝.
특강 들을 때의 칙칙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분위기는 한껏 들떴다.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고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함께 후보로 나섰던 이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썩어갔다.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
“감사합니다.”
상큼하게 승리를 확신하며 다시 한 번 예린 선배가 인사했다.
부회장 확정이다.
과거부터 미모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엄청난 경쟁 무기가 돼 왔다.
“후배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다른 후보님의…….”
계속 이어지는 41기 자치회장의 능숙한 진행.
예상대로 1반 500명을 책임지는 직선제 부회장은 예린 선배가 당선 됐다.
무투표 당선인 자치회장을 보좌하지만 실질적인 선출직 임원이었다.
2반의 부회장은 고영대 출신이 당선 됐다.
그리고 각 조를 맡고 있는 반장들도 모두 선출 됐다.
다들 이곳에 오기 전에 전교 회장이나 부회장 한두 번은 가볍게 해봤을 인재들답게 인사말들은 하나같이 기똥찼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더 잘 먹는다는 속담이 딱 맞았다.
“그럼……. 지금부터는 42기 자치회 회장님의 직접 보좌를 담당할 수석 총무를 선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관계는 바늘과 실 같으니 상성이 아주 좋아야 2년 동안 평안할 겁니다. 42기 회장님 앞으로 나와 진행해 주십시오.”
41기 회장이 뒤로 물러나고 42기 회장 권주희 씨가 앞으로 나섰다.
나이가 있어서인지 떨리거나 긴장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42기 동기 여러분, 그리고 여러 선배님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원 출신의 애 둘 딸린 미모의 미시 42기 자치회장 권주희가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연수원 생활이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애 엄마의 명찰을 달고 사회 초년생이 대부분은 연수원생들 앞에서 넉살을 떠는 권주희 씨가 조신하게 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인사했다.
“언니~ 멋있어요!”
“누나 파이팅!”
짝짝짝짝짝.
스터디 그룹 후배들 정도로 보이는 몇몇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여러분의 우레와 같은 환영 감사합니다~.”
넉살이 대박이었다.
얼굴 빛 하나도 변하지 않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대한민국에서도 상위급 아줌마 클래스였다.
애 둘을 낳고 키우면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이겨내고 오늘의 자리를 꿰찬 권주희 씨가 흥미로웠다.
“자랑 아닌 자랑 같은 자치회 회장이 된 영광을 하늘에 계신 엄마께 돌립니다. 제 첫째를 아프신 몸으로 몇 년 동안 아낌없이 보살펴 주신 엄마의 은혜에 하늘이 감동한 것 같습니다.”
권주희 씨는 허공을 바라보며 돌아가신 친정 엄마를 언급하며 감사함을 전했다.
괴짜였다.
몇몇 연수생들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분위기나 품격이 자리에 안 맞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과 달리 나는 꿀잼이었다.
지루할 것 같은 연수원 생활이 의외로 흥미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앞으로 2년 아니 앞으로 쭉 저와 함께 평생 케미를 이룰 수석 총무를 선출하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따로 자격조건은 없습니다. 그저 소소하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잡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힘도 좋고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아 일처리가 원활하고 빨랐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결혼한 후부터 남의 편 같은 남편보다 조금만 더 저를 챙겨줄 수 있는 여유 있는 분이면 충분합니다.”
미소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원하는 바 소신을 밝히는 42기 자치회장.
대놓고 여자보다 빠릿빠릿한 남자 일꾼을 원했다.
아줌마의 입담은 위대했다.
1000명에 달하는 관중들 시선 따위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럼 후보자님들 나와 주십시오. 제가 자비로 명함 팍팍 찍어 드리겠습니다.”
권주희 씨의 말이 끝나자 약 10여 명의 인물들이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보면 부회장보다 더 권한이 넘치는 자리임은 분명했다.
대부분의 모임은 총무가 실질적 권한을 소유했다.
회장과 함께 42기 연수생 전원의 연락처를 합법적으로 수집 사용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소곤거리던 소모임들 중에서 대부분의 지원자가 나왔다.
결연한 표정으로 나서는 이들이 다수였다.
“다들 고맙습니다. 어떻게 제 마음을 아시고 연약한 여성분들은 한 분도 지원자가 없네요~. 여성 동기 분들에게는 다음에 커피 한 잔씩 쏘겠습니다.”
욕심이 날 게 확실한 자리였지만 권주희 씨의 말 대로 여성 지원자들은 없었다.
아줌마 회장을 상대하기 벅찰 거라는 걸 여성들은 귀신같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수석 총무가 되실 분들은 자신의 포부와 앞으로의 자세를 밝혀주십시오.”
아줌마 시선으로 어린 애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권주희 회장이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시작된 수석 총무들의 의견 피력.
예상했던 대로 한 사람 한 사람 순서는 치열하게 흘러갔다.
“한국대 법학과 05학번…….”
“고영대 04학번…….”
“연지대 04학번…….”
SKY 출신들이 포문을 열었다.
그 뒤를 이어 내로라하는 한국 명문대 법학과 출신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간단한 소개였음에도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마~ 다들 처음 뵙겠습니다예~. 지는 산청에서 온 신덕수라고 합니데이~.”
지루함에 살짝 눈을 감고 있던 내 귀에 들려오는 종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그것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산적.
이제 막 산채에서 하산한 듯한 풍모에 19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그런 산적이 눈을 부라리며 조그만 마이크를 잡고 으르렁거렸다.
“…….”
우렁찬 목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졸고 있던 이들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누가 봐도 변호사가 아닌 씨름판 선수가 당연한 듯한 덩치였다.
아침에 제거했을 턱수염이 그새를 못 참고 삐죽삐죽 시커멓게 올라와 턱을 덮었다.
구겨진 옛날 스타일의 양복과 더벅머리는 갓 상경한 지리산 골짜기 산속 청년, 딱 그 모습이었다.
“누구야?”
“……어디 출신이야?”
워낙 연수생들 수가 많아 저런 덩치가 섞여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들 마이크를 잡은 신덕수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뒤에서 들어본께……. 다들 어마무시한 쓰빽을 자랑하는 분들이라는 걸 알았음더. 지는 가진 거라고는 울 어매가 맹글어 주신 이 호랭이 몸뚱이하고 통장에 75만 원이 전부임더~.”
뭐지?
묵음 처리 안 되는 강렬한 발음의 영어를 섞어 쓰며 자신의 재산 상황까지 공개하는 신덕수.
권주희 아줌마에 이은 강적의 등장이었다.
“…….”
다시 한 번 강당은 침묵에 휩싸였다.
자신들의 동기 중에 저런 산적이 있을 거라는 걸 다들 생각 못했던 눈치다.
“마, 지는 최종학력은 농고를 졸업했음더.”
“뭐? 농고?”
“……허어.”
“미친.”
농고라는 말에 강의실은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과거에는 농고 출신들이 숨은 인재들이 많이 섞여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변했다.
종합고등학교로 개편된 뒤 농고라는 학과 자체가 대부분 사라졌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신덕수 후보자.
웅성거리는 동기들의 반응에도 전혀 위축됨이나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지를 쪼매 도와주이소. 소싯적에 산에서 뒹굴어 머리팍이 깨진 뒤로 좀 맹해졌지만 본래는 똑똑했음니더.”
도, 도와줘? 뭘!
당황해 하는 표정의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이 상황에 몹시 흥미가 동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신덕수의 눈빛이 신경 쓰였다.
그의 눈빛에 황소처럼 순수한 정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는 걍 집에서 소 키우고 농사 지으며 살라고 했음더. 그란데 너무 억울한 일이 생겼음더……!”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스토리가 풀어져 나왔다.
“우리 아베가 6.25때 종살이 하던 집안 아들을 구해줬음니더. 그 은혜로 주인집이 집도 주고 땅도 줬는디……. 글쎄. 그 집 후손들이 땅이 고속도로 후보지가 되면서 10년 전에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서 재판을 걸었음니더…….”
예상치 못한 신덕수의 울분이 강당에 호랑이 울음처럼 울렸다.
“이리저리 알아봤는디……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는지라! 면서기하고 파출소 소장까지 다 짜고 우리 아베를 사기꾼으로 맹글어카고……. 땅은 뺏기고 아베는 화병에 돌아가셨음니더……. 그 집 아들 살리겠다고 지리산 빨갱이 시키들한테 총 맞아 다리 병신됐던 우리 아베가……. 으드득.”
주먹을 움켜쥔 신덕수가 이를 갈았다.
그의 분노가 생생하게 살아 강당을 뒤엎었다.
“마! 어메도 그라막손 먹고 아베를 따라갔음니더……. 내 독한 마음 묵고 있는 것 다 정리해서 10년만에 합겼음니더! 동기 여러븐 저를 쪼매 도와주이소! 이 대한민국 법이 X같다는 거 아님니꺼! 내 확실히 깨달음니더! 힘이 있으야 정의를 세울 수 있다는 거 아님니꺼! 총무 함 밀어주이소! 내 졸업해서 힘센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변호사 함 돼 보겠음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