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
회귀의 전설
525장. 너희들이나 처먹어!
또로로록.
서초동에 위치한 한 고급 아파트 안 식탁에서 잔에 맑은 소주가 채워졌다.
꿀꺽.
잔에 술이 채워지자 안주도 없이 손의 주인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또로로로록.
한 병의 소주가 빠르게 비워졌다.
그래도 양이 안 찬 듯 냉장고에서 술병 하나를 다시 꺼내 마시는 사내.
머리칼이 희끗한 중년 남자였다.
강직한 인상의 미중년.
연신 술을 비워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술잔을 비울 때마다 내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색들이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욕망과 분노, 고결함에 대한 애증 등등.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 갔다.
딸깍.
그때 방문 하나가 열렸다.
주방 쪽으로 물을 마시려는 듯 걸어 나오는 여성.
“어? 아빠……. 안 주무셨어요?”
“잠이 안 와서 한잔 하고 있었다.”
“에이~ 그럼 절 불러야죠. 사랑하는 딸을 놔두고 그러면 안 되죠~.”
애교가 넘치는 딸이 아빠 앞에 앉았다.
“안주도 없이 이러면 안 돼요~ 아빠는 우리 가정을 떠나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고등법원 판사님이잖아요.”
이예린은 저녁에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가스레인지에 올리며 아빠 이강석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으시나?’
예린은 찌개가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생각에 빠졌다.
요즘 들어 아빠는 부쩍 자음자작하는 일이 많아졌다.
장주시에서 지낼 때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 부장판사로 임명받았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치셨던 분이다.
그런데 요 근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안 좋았다.
“짜잔~.”
아빠가 좋아하는 달걀 프라이 반숙을 금세 부쳐 내어놓는 이예린.
“안주도 만들어 왔는데 한 잔 주세요~.”
예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소주잔을 내밀었다.
한집에 살아도 늘 재판 때문에 집에서 얼굴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던 아빠와 딸이었다.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는 행운을 안았어도 간단하게 점심 식사 정도 했을 뿐이었다.
“우리 딸 언제 이렇게 큰 거야?”
딸의 애교에 미소를 지으며 이강석 부장판사가 예린의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언제 크다뇨! 학교에서 후배들에게는 하늘같은 선배인데~. 우리 아빠 딸한테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에요? 설마 제가 주워온 딸은 아닌 거죠? 그쵸? 으아아앙!”
“하하하. 미안 미안. 그러게, 아빠가 무심했다.”
이예린의 폭풍 애교에 이강석 부장판사가 수심 가득한 얼굴을 펴며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빠 건강하시고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승승장구하시기를~.”
예린이 두 손으로 소주잔을 잡고 부딪쳤다.
과거에는 감히 아빠라 해도 던질 수 없었던 농담이었다.
자신에게는 한결같이 다정하게 잘해 줬지만, 왠지 모르게 근엄한 아빠의 아우라 때문에 다가가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예린은 아빠의 어깨가 점점 작아지는 걸 느꼈다.
사회적으로는 분명 대단한 위치에 계셨지만 가끔씩 이렇게 혼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짠해 보였다.
사랑에 크게 데여 본 예린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얽혀 돌아가는 세상의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험난한 세상의 평지풍파를 견뎌내며 가정을 지켜내고 있는 아빠였다.
“크으~”
쓴 소주 맛에 예린이 인상을 썼다.
“이걸 무슨 맛으로 마셔요? 와인처럼 다채로운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맥주처럼 시원한 맛도 없는데…….”
“그건 세상 살다보면 알게 되는 맛이지. 아빠가 말해줘 봐야 의미가 없어. 소주 맛이란 아직도 적용되는 오래된 대법원 판례 같은 맛이지.”
“와아! 맛의 느낌이 쏙 들어와요! 아빠 짱!”
예린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딸의 티 없이 맑고 귀여운 행동을 이강석이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느 순간 어엿한 성인으로 훌쩍 커버린 딸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바쁜 초임 판사를 지날 무렵 중매로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 친정 쪽은 정치계와 법조계를 비롯해 사회 유력 인사들이 제법 포진해 있었다.
성품도 무난하고 예쁘기도 했기에 결혼식을 빠르게 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일반적인 결혼 생활.
직장과 집을 쳇바퀴처럼 오가며 반복적인 생활이 이어졌다.
승진을 거듭하던 와중에 딸이 태어났다.
당시에는 하급심 판사였기에 일거리가 많아 일에 치이며 살았다.
욕심도 많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명감에 판결문 하나하나에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점점 근면한 성실성과 실력이 내부에서 알려졌다.
그러나 밖에서 인정받는 만큼 반대급부로 가정에는 점점 소홀해지고 멀어졌다.
자식이라고 해 봐야 예린이 하나 밖에 없었다.
사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했었던 때가 있기나 한 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늦은 퇴근 후 집에 오면 잠들어 있는 딸의 얼굴을 매만지며 힘을 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알아서 잘 커준 딸이 한국 대학교에 떡하니 입학하더니 이제는 사법연수원 후배가 됐다.
성적도 우수해 별일이 없다면 자신의 뒤를 이어 판사가 될 것이다.
대견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했다.
이 시대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정의로운 판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변호사로 개업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과거 그 시대도 아니었다.
그나마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부장판사가 되기 전까지는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이강석 자신도 정치권을 비롯해 고위급 선배 판사들의 청탁 전화를 수시로 받았다.
말을 순순히 듣지 않으면 과거 자신처럼 지방으로 좌천될 수도 있었다.
점점 편향된 사법권력화가 심해졌다.
오늘도 역시 윗선의 청탁을 받았다.
2010년에 치러졌던 지방선거 여당 수도권 광역시장의 선거법 위반 2심 재판이 배당됐다.
1심에서 2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아 낙선 위기에 처한 시장의 윗선 권력 라인이 움직였다.
벌금 80만원으로 선고하라는 청탁을 가장한 명령이 내려왔다.
줄을 대고 있는 오승택 대법관 쪽에서 내려온 오더.
마음 같아서는 벌금이 아니라 징역을 선고하고 싶을 만큼 죄질이 불량한 건이었다.
그러나 이강석은 벌금 80만원을 선고하는 판결문을 미리 작성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좌천 후 어렵게 줄을 잡아 다시 서울로 인사이동을 받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대법관을 위해서는 이 위치가 필요했다.
실력과 성실한 노력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스스로 확신했지만 삶은 예상한 방향대로 흐르지 않았다.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는 지연과 혈연, 학연의 암초들.
거기에 더해 권력을 향한 탐욕스러운 자들의 욕망이 곳곳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승택과 연합전선을 형성했지만 아무래도 성정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참고 따라야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야심한 시각이면 잠들기 전에 마취제처럼 마시게 된 한 잔 술.
오늘은 그나마 딸이 동석해 위로를 해줬다.
‘그래. 이 녀석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난잡한 바닥에서 그나마 꿈을 완성해 놓으면 딸은 좀 더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법조계 권력 카르텔에 입성하게 되면 누구에게도 자신의 시작처럼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빠.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물어오는 딸.
“아무 일도 없다.”
빙그레 웃으며 이강석은 기운을 냈다.
딸을 위한다는 또 다른 목표를 흔들리는 성정 앞에 꽂았다.
변명거리라고 해도 좋았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누가 봐도 승리자의 길.
반드시 그 열매를 획득하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한 잔 더 할까?”
“콜!”
순결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배시시 웃는 어여쁜 딸.
안주로 부쳐낸 반숙 한 점을 야무지게 먹으며 이강석은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해서 무언가를 감내해야 한다면 작은 양심 한 점 정도는 버려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과거에도 그렇고 미래도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걸 이강석도 슬슬 깨달아 가고 있었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네…….”
대한민국의 수도 야경 중에서 손에 꼽히는 63빌딩, 그곳의 일식식당 룸.
고인태 부장판사는 예쁘장한 외모의 종업원 말에 짧게 대꾸했다.
스르륵.
종업원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뭐야……. 이 자식…….”
고인태의 표정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기분은 묘했다.
분명 연락은 자신이 먼저 했다.
오승택 대법관의 명령으로 라인에 합류시키기 위해 장태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법수험생 일체 서류를 볼 수 있는 신분이라 연락처를 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부장판사라고 하면 일반 회사의 부장급 직책인 만큼 인턴급인 사법연수원생들은 황송함으로 맞이해야 앞뒤가 맞았다.
더군다나 장태산은 나이도 한참 어렸다.
부장판사라는 신분을 밝혔을 때만 해도 장태산은 당황했다.
예상했던 바였기에 흐뭇하게 만나자고 말을 꺼냈다.
그 후의 일은 술술 풀렸다.
장태산도 한 번 뵙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잡게 된 오늘의 약속.
그런데 그 때부터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자신이 먼저 해야 할 일을 어린놈이 일정을 정해 도리어 제안했다.
보통 이럴 때는 선배들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잡는 게 보통이지만 얼떨결에 모든 상황이 장태산에 의해 주도 됐다.
고인태는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장태산이 제안한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
만 하루가 되지 않은 시간이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정도로 빨랐다.
오승택의 명령을 받은 일이기에 장태산 영입은 반드시 완수해야만 했다.
지금껏 무리 없이 승승장구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고인태는 출신 성분도 좋았고 학교에서나 어느 면에서나 성과들도 완벽했다.
오승택이 직접 간택했을 정도로 법조계 황태자 코스를 제대로 밟았다.
서울에서 줄곧 판사 생활을 했고 부장판사까지 승진했다.
잠시 경력을 위해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예약되어 있는 다음 코스.
부장판사 승진의 하이라이트이자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중앙지법 영장담당 판사로 내정이 돼 있었다.
더 큰 미래를 꿈꾸고 있는 만큼 고인태 부장판사는 이번 일 처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특이한 놈이라더니 사실이었군.”
장태산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가 부족했다.
집안이 먹고 살만하고 한국대 법학과에서 특별한 놈으로 불린다는 것 정도였다.
그밖에 동계 올림픽 때 동메달을 따 군 면제를 받은 케이스도 특이했다.
그러나 사법시험을 패스했다면 다음 코스는 불을 보듯 뻔했다.
연수원생들은 변호사나 검사보다는 끗발과 명예가 좋은 판사를 노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오늘 그 미래를 보장하고 약속해 포섭할 생각이었다.
스르르륵.
룸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훤칠한 키의 미남자.
‘얼굴마담으로 세우기에 그만이군.’
사진으로 볼 때보다 훨씬 미남이었다.
흔한 아이돌도 무릎 꿇릴 만큼 초 레벨급 모델 수준이었다.
고인태는 장태산의 외모에 만족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장태산은 고인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것 봐라?’
수많은 재판을 비롯해 재판연구관 시절 오승택 명을 받고 재계와 정계의 상류층들을 상대해 왔던 고인태였다.
인사 하나로 장태산이 어설픈 놈이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입고 있는 옷과 시계 같은 액세서리 하나까지도 모두 명품이었다.
한마디로 귀티가 좔좔 흘렀다.
행동 하나하나도 여유가 넘쳤다.
언뜻 봐도 재벌 3세 같았다.
그들은 죄를 짓고도 검사나 판사들 앞에서 당당했다.
“하하. 후배님 덕분에 좋은 곳에 와보는 것 같아.”
고인태는 63빌딩에 자리한 일식당은 처음이었다.
한 눈에 봐도 요리 가격이 꽤 높을 것은 당연했다.
“선배님을 뵙는데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경만큼 요리도 괜찮습니다.”
‘투자?’
고인태는 투자라는 말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자신이 아니라 마치 장태산이 면접관 같았다.
스르르릇.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나 둘 세팅되기 시작한 요리들.
보통의 일식 코스가 아니라 풀 세팅이었다.
장국과 샐러드부터 시작해 먹음직스런 해산물 요리가 깔렸다.
“제주에서 어제 잡은 다금바리입니다.”
총주방장이 아직 살아서 입을 뻐끔거리는 큼지막한 다금바리 회를 내려놓았다.
40년 넘게 산 고인태도 처음 보는 큼지막한 다금바리였다.
“잘 먹겠습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총주방장은 장태산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고 사라졌다.
스르륵 닫히는 문.
‘…… 뭐야?’
고인태는 일식당에서 처음 받아보는 특급 서비스에 내심 깜짝 놀랐다.
호텔급 이상의 일식당이었다.
이런 곳의 총주방장이 눈에 띌 정도로 장태산을 최고 대우로 모시고 있었다.
“선배님 술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응? 응…….”
얼떨결에 고인태가 잔을 내밀었다.
얼음 통에 담겨 나온 이름 모를 사케.
쪼로록.
맑은 액체와 함께 사케 특유의 향이 숨에 섞여 맡아졌다.
“오늘 만남이 아름다운 인연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나이도 어린 장태산이 먼저 건배사를 읊었다.
“하하. 좋은 인연 좋지~.”
지금껏 2인자나 3인자의 자세로 살아온 고인태는 이런 분위기쯤 간단하게 맞출 눈치는 넘쳤다.
예상 밖으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이 판의 끝을 보고 싶었다.
쭈욱 시원하게 사케를 들이키며 장태산을 관찰했다.
대선배이자 법원 부장판사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긴장한 빛이 없었다.
편안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러 나온 식도락가 모습이었다.
“회가 맛있어 보입니다.”
고인태가 먼저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장태산은 거침없이 회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
달콤한 사케 뒷맛이 썼다.
‘이 자식 정체가 뭐야?’
다시 들기 시작한 의문.
분명 나이는 어린놈인데 하는 태도는 재벌 3세를 넘어 그룹 회장쯤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자신 같은 부장판사 정도는 상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드셔 보십시오. 선배님.”
호칭도 그랬다.
부장판사님도 아니고 선배라는 말을 썼다.
고인태가 허락한 적 없는 호칭이지만 장태산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오늘 내가 자네를 만나고자 함은…….”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고인태가 분위기를 전환했다.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속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장태산의 표정과 웃음.
“장태산 군을 사법개혁을 이끌어갈 핵심 일원으로 삼고자 함이네.”
말에 무게를 한껏 실었다.
“저를요?”
의아한 듯 반문하는 장태산.
“작금의 대한민국은 재판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중이야. 학생 신분인 자네는 모르겠지만 사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권에 의해 법원은 오염이 심해졌네. 이에 사법독립을 위해 바람직한 사법환경 조성이 필요하고 그에 맞는 인재를 찾는 중이었지.”
“누가 말입니까?”
장태산이 호기심을 보였다.
미끼를 문 게 분명했다.
“사법부에 오래 몸담고 있는 성품과 덕이 넘치는 원로 분들이 계시네. 그 분들이 사법부를 위해 오연히 나섰네.”
“아! 오승택 대법관님이 주축인 민사소송연구회 같은 거요?”
“!!!”
장태산의 말에 고인태는 적잖이 깜짝 놀랐다.
민사소송연구회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특히 오승택 대법관이 관련되어 있다는 건 법원 내부에서만 조용히 소문이 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제가 사법독립에 필요한 인재가 될 그릇이 될까요? 법철학 분야의 대가이신 라즈 교수님이 법의 지배를 위해서는 ‘독립적 사법부의 원칙적이고 성실한 법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저와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아직 학생이라 잘은 모르지만…….”
말은 학생이라고 하면서 보란 듯이 저명한 법학자 이름을 언급하는 장태산.
“왜 그렇게 생각하나?”
“법관이라 함은 다양한 압력에 대해 부패하지 않는 성품과 냉철함, 여러 정치적 압력과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론적 법관의 도덕적 자세에 대해 장태산이 설명했다.
“그렇지! 역시 똑똑한 후배라 다르군!”
고인태는 맞장구를 쳐줬다.
뭔가 알 수 없이 양심에 찔려 찝찝하긴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까요. 그것 때문에 힘들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전 불굴의 용기와 정의감, 공정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처음에는 다들 그래. 자네도 감을 못 잡겠지만 그런 건 선배들이 알아서 교육을 통해…….”
“그러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
“법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오늘도 곳곳에서 오직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선배 법관들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금처럼 똥파리들이 자꾸 꼬이는 걸 보면……. 제가 절대 청렴할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고인태를 정면으로 웃으며 바라보는 장태산.
장태산의 비웃음 가득한 눈빛이 고인태의 심장을 쑤셨다.
부장판사씩이나 되는 고인태가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이 자식이!’
자신의 입지와 조직에 대해서 충분히 알면서도 제안을 거부하는 장태산의 확고한 거절 멘트에 고인태는 화가 치밀었다.
이 수모를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너 부장판사인 내가 우스워 보여? 이 어린놈의 새끼가 어디서 선배를 가르치려고 들어! 대한민국에서 살기 싫어? 너 같은 놈들이 머리만 믿고 까불면 뒈지는 수가 있어!”
조용한 룸에 울려 퍼지는 욕설과 호통.
고인태는 감추고 있던 폭력성을 드러냈다.
어떤 권력자도 자신이 속한 조직 이름 앞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없던 죄도 굴비처럼 엮어 소금물에 담그는 건 일도 아니었다.
형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은 이승에서는 생사를 결정하는 저승의 판관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겁도 없는 애송이가 대놓고 건방을 떨며 정중한 제안을 거절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은 더 찝찝했다.
조직에서 포섭하지 못하더라도 그 전에 기를 꺾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그러니까. 내 말이~ 고인태 부장판사…….”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함부로 호칭하는 장태산.
큰 호통에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뭐……. 뭐?”
“당신 그렇게 까불다 뒈지는 수가 있어. 지금까지 날 건드렸다가 제대로…… 숨 쉬는 놈들이 없었어. 그런데 일개 부장판사 따위가……. 감히.”
피식 웃는 장태산.
콰드드드득.
잡고 있던 술잔이 장태산의 손바닥 안에서 잘게 부셔졌다.
놀랍게도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촤라라락.
최고급으로 잘 차려진 요리들 위에 흩뿌려지는 술 잔 조각들.
순식간에 깨진 조각들이 요리 위에 퍼졌다.
먹음직스러웠던 회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됐다.
“이 쓰레기는 너희들이나 처먹어. 똥파리 새끼야!”
<1부 완결>
시리즈
회귀의 전설 2부 @김광수
<마계대공 연대기>, <21세기 대마법사>의 김광수 작가의 신작!
제2의 IMF가 휩쓸고 지나간 2020년의 한국의 노량진.
증권맨에서 고시 낭인으로 전락했던 장태산은 아이를 구하다 차에 치인다.
죽음의 순간, 장한 선업을 쌓았다며 정체불명의 노인은 그를 18살, 고2 때로 돌려보내는데!
생생하게 기억나는 증권 그래프와 미래! 불법 과외(?)로 전수 받은 어마무시한 무공까지.
강대한 힘을 가지고 전설을 써내려가는 태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