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
회귀의 전설
522장. 진심
스르륵.
눈을 뜬 로리아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둠과 빛의 경계를 나누는 가장 경건한 시간인 새벽 4시.
신께 올리는 첫 기도 시간이었다.
시차가 존재했지만 몸은 시간에 그대로 반응했다.
잠이 부족하다거나 피곤함 같은 것은 없었다.
신성 기운의 영향으로 알코올과 피로 같은 기운은 로리아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자정이 넘도록 맥주를 나누어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사라와 함께 그동안 쌓여 왔던 개인적인 오해를 풀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와의 관계에서 달라질 건 많지 않았다.
앞으로도 방계와는 계속 알력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쌓여온 직계와 방계와의 권력 다툼을 두 여인이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야훼 바트인 로리아나도 직계 가문의 수장들에게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권력이 막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재 수장들의 회의를 거쳐 중요한 일들이 결정 됐다.
존중받는 위치이지만 보이지 않는 직계들 간의 드러나지 않은 이익 다툼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더해 방계들도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자손이 많아지면서 챙겨야 할 가족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타인에게보다 가까운 피붙이들 중심으로 권력과 돈이 흘러들어가길 모두 원했다.
세계의 부를 반절이나 소유했다는 소문과 달리 조각조각 쪼개진 수백 개 이상으로 차일드 가문의 핏줄들이 나눠가지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있는 깊이 관여하고 있는 차일드 가문의 뿌리.
그렇다고 모두가 다 차일드 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데이터를 만들어 관리했다.
서로서로 연줄이 되어 보이지 않는 그물을 펼쳐 세상을 지배했다.
물론 한 그물의 코를 담당하고 있다고 해서 다 선택받는 건 아니었다.
능력이 떨어지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후계자들은 조용히 데이터에서 사라졌다.
그 감별사가 바로 야훼 바트 로리아나로 그녀가 맡고 있는 가문 수장의 주 역할이었다.
사라락.
로리아나는 옷을 갖춰 입고 기도숄로 머리를 감쌌다.
오늘은 야외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야훼는 기도 장소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사박사박.
로리아나는 큼지막한 VIP실을 혼자 사용했다.
항상 따라다니던 경호원들은 리조트 외곽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자유로운 새벽의 시간.
로리아나의 발걸음은 바다로 향했다.
하늘에 뜬 달이 수평선에 닿을 듯 말 듯 걸려 있었다.
별빛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여명을 알리는 붉은 기운들이 한가득 넘실거렸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야훼는 나의 주인이시며 목자이시니……. 언제나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길로 인도하소서. 이 부족한 딸은 예비하신 모든 것들을 따라갈 것이옵니다. 오직 나의 야훼시여…….”
철썩이는 파도가 보이는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은 로리아나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형식은 별 의미가 없었다.
마음으로 올리는 진실함이 신께 드리는 기도의 모든 것이었다.
사라라라라라랏.
성스러운 은빛 광채가 로리아나를 감쌌다.
파도 소리는 신의 목소리가 되었다.
깨끗한 새벽 공기는 신의 손길이었다.
로리아나는 온 우주에 가득한 신의 사랑을 흠뻑 느꼈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신의 응답.
로리아나는 응답과 같은 청결하고 고결한 신의 손길을 느끼며 마음을 정화시켰다.
신과 세계의 부가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야훼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모두 부자이기를 원했다.
유대인의 경제력이 남다른 이유가 모두 거기에 있었다.
탈무드를 비롯해 여러 경전들을 통해 부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신을 모시는 자라고 해서 결단코 가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베풀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야훼는 명령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은 일종의 경고였다.
부를 얻어도 그걸 움켜쥐지 말라는 신의 가르침이었다.
“하아…….”
기도는 짧았지만 신의 응답은 오늘도 계속됐다.
“???”
눈을 뜨고 파도를 바라보던 로리아나.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잠들지 않았던 거야?’
로리아나가 숙소에 들기 전까기 맥주를 마시며 유쾌하게 대화하던 다니엘 장.
홀로 깨어 아름다운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휘르르르르릉.
먼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을 맞고 서 있는 남자는 마치 거인 같았다.
오늘을 맞이하고 있지만 내일을 준비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남자의 넓은 어깨가 이 순간 더 크고 넓어 보였다.
사박사박.
로리아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할 말이 있었다.
아직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새벽에 찾아온 기회.
로리아나는 살짝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니엘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
오랜만에 제대로 술을 마셨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스트레스 해소에 제대로였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잊은 채 먹고 마시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 즐겨보는 제대로 된 휴가였다.
일찍 취한 김한별은 비비안과 친구가 됐다.
로리아나와 사라는 웃음을 터트리며 지나온 과거 이야기를 나눴다.
도도희와 유세라 팀장도 덩달아 분위기를 탔다.
쌍둥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언니들 얘기를 들으며 충격을 받았다.
간간이 나누는 대화 주제는 가벼운 것들이 없었다.
또 다른 차원의 대화였다.
앞으로 세상사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확실했다.
로버트는 리조트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나와의 대화 뒤 한참 후에 돌아온 루이스는 조용히 맥주를 마시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밤은 깊어갔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숙소로 향했다.
여인들은 더 긴 시간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지만 외면했다.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깊은 밤과 시간을 보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인도양의 파도는 한국의 동해안과는 그 맛이 달랐다.
자연의 맑은 기운들이 서로 섞이며 아름다운 리듬에 맞춰 춤을 췄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같았다.
맥주를 마시며 나 홀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사박사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코끝을 스치는 체취로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안 잤어요?”
걱정과 호기심, 그리고 기대가 담긴 로리아나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듣기 좋았다.
신성이 함께하는 로리아나의 분위기는 크로얀 제국의 황녀 아린과 사뭇 비슷했다.
“이곳 요정들이 날 좋아하나 봅니다. 밤새 재잘거려 잠들 수 없었습니다.”
“요정들이 보는 눈은 있는 것 같네요~.”
“칭찬이죠?”
“그럼요~.”
로리아나를 감싼 분위기가 많이 가벼워졌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거룩한 성녀 모습이 아니었다.
사라와의 사이에 있던 묵은 감정을 털어낸 게 큰 것 같았다.
“…….”
잠시 그녀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번까지 그녀를 두 번 봤다.
비밀에 싸여 있는 차일드 가문의 가주.
거기에 야훼의 딸.
보이지 않는 온라인 경제 전쟁 속에서 나도 그녀와 수백 번은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봤다.
“기사단 쪽이 많이 예민해 있죠?”
로리아나가 루이스 쪽 이야기를 꺼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기사단은 유럽이 사업체 아닙니까.”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유럽을 발판으로 성장했던 기사단이었다.
그 뿌리와 역사는 기사단과 운명을 같이했다.
“나도 알지 못하는 비밀의 투자자금 때문에 유로화가 엉망이에요. 지난 1년 동안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몇 천억 유로 이상 투입한 것 같아요.”
로리아나가 지나가는 말로 유럽 상황을 설명했다.
나를 콕 찍어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몇 천억 유로……. 대부분을 내가 먹었다.
개꿀맛이었다.
여러 계좌를 돌리고 돌려 추적도 안 됐다.
차일드 가문의 주인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로리아나의 묘한 눈빛.
이거 위험하다.
“비밀 투자자금요? 세상에 차일드 가문이 모르는 자금도 있습니까?”
일단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차피 증거는 없다.
자금은 유럽 및 미국, 홍콩, 일본 등등을 돌고 돌아 안전하게 분산되어 있었다.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수많은 계좌.
비밀스러운 만큼 내가 죽으면 모두 다 사라지는 숫자였다.
“차일드 가문에서 금융을 담당하는 가문이 수십 개가 넘어요. 제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요~.”
오! 그래?
새로운 정보를 취득했다.
“그래서 방계와도 그렇게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는 중이군요.”
“힘이 약한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랍니다……. 모두 다.”
이 누나 오늘따라 약한 척한다.
아니……. 그녀 목소리가 촉촉해졌다.
이거 쥐약이다.
묘하게 동정심을 유발해 감정을 자극했다.
“모든 일이 신이 준비한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통속적인 대사를 날렸다.
신을 모시는 성녀 로리아나에게 다른 위로는 필요 없었다.
약한 척하지만 그녀의 통장 개수와 찍혀 있는 숫자는 나보다 훨씬 클 게 확실했다.
“정말 그럴까요?”
로리아나가 날 보며 묻는다.
휘리리리링.
바람이 희롱하듯 로리아나의 기도숄을 날렸다.
머리칼이 바람에 함께 날렸다.
진갈색 눈동자에 담겨 있는 눈빛이 떨렸다.
아무리 신의 딸이고 세상의 모든 돈을 관장하는 차일드 가문의 주인이라고 고민이 없을 수는 없었다.
경중의 무게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모두 자기만의 고통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로리아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야훼의 딸이라 불리고 추앙받는다 해도 아직 20대였다.
리처드 요한슨 같은 노회한 정치인들과 싸우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신이 있어 버텨냈지만 인간의 한계는 명확했다.
신들이 고대처럼 번개로 신벌을 내린다고 말하는 시대는 지났다.
부리는 자식과 종들의 능력에 따라 신들의 운명도 천차만별 달라지는 법.
“믿으십시오. 자신과 당신이 믿는 신을.”
나 역시 얼굴도 초면이었던 꿈속 조상 할배만큼은 철썩 같이 믿었다.
말도 안 되는 회귀의 기연은 실존했다.
그 경험만으로도 그녀에게 충고를 해 줄 수 있었다.
“다니엘의 말에서는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느껴져요. 왜죠?”
로리아나가 궁금해 했다.
“저도 저만의 신을 간절하게 믿습니다. 아주 고맙게~.”
여러 신들과 포인트를 주고받으며 거래하는 사이였다.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이능.
“그렇게 신실한 신의 자녀는 아닌 것 같은데……. 제 눈이 틀렸나요?”
빙고!
맞았다.
신들에게 뒤통수 맞다보면 믿을 건 카르마 포인트밖에 없었다.
“수십억 인류는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저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정해진 신실한 믿음이란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로리아나와 대화하는 게 심도 있고 재밌다.
저 반짝이는 눈동자 봐라!
보석이다.
“푸후후.”
로리아나가 웃었다.
저렇게 밝은 미소는 처음이다.
특급 비타민 종합 세트가 따로 없다.
“왜 웃습니까?”
“특이해서요. 신의 선택을 받았음이 확실한데 이렇게 또 믿음이 없다니……. 신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나요?”
“죽으면 어차피 다 같은 신분입니다.”
“네?”
깊게 알면 로리아나도 다친다.
여러 신들 만나다 보면 로리아나도 신심이 확 떨어질 거다.
포인트를 위해 사기치고 설계하고 불쌍한 척하는 각종 신들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아름답습니다. 진심.”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와 버린 진심 멘트.
어쩌랴 아름다움이 죄였다.
“…….”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그녀.
차일드 가문의 주인에게 순수하다 말하면 모두 다 나를 미친놈이라고 말할 것이다.
얼굴을 사르르 붉히는 로리아나.
서서히 떠오르는 새벽의 붉은 빛 때문이 아니었다.
“다니엘도……. 멋있어요. 진심.”
습득 능력 뛰어나게 금방 따라하는 로리아나.
바람에 섞인 그녀의 향기가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일출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묘한 분위기.
거리도 가까웠다.
손만 뻗으면 닿았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핑크 라이트 분위기.
로리아나도 거부할 수 없는 본능에 이끌려 묘한 눈빛으로 날 봤다.
이 분위기는 바로…….
손을 그녀를 향해 뻗었다.
파르르 잘게 떠는 로리아나.
내일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은 확실했다.
나와 그녀 둘 다 가슴의 열꽃을 식혀 줄 화끈한 키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 야훼가…….
그때 갑자기 산통을 깨며 들려온 야훼라는 알림음.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아무리 신의 딸이라지만 이런 사생활까지 터치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지금 이 분위 딱 좋았다.
손이 로리아나의 뺨에 거의 이르렀다.
거부하지 않는 로리아나였다.
그런데 야훼가…….
- 당신에게 지참금을 요구합니다.
뭐? 뭐라고? 지, 지참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