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회귀의 전설
516장. 내조와 외조
파아아앗!
대륙에서 첫 손에 꼽히는 사르칸 마탑의 이동 마법진에서 빛이 터졌다.
“!!!”
경비를 서던 마법사들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적의 습격일 수도 있었다.
마탑의 이동 마법진은 전략적 장소였다.
좌표는 은밀했지만 항상 경계는 철저했다.
차자작.
마법사와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비상 마법진에서 나타난 자는 당황스럽게도 7서클 마법사이자 10여 명의 장로 마법사들 중 한 명이었다.
귀족가에 파견 나갔다고 들었던 그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나타났다.
“허억……. 헉.”
무엇에 제대로 놀란 듯 거친 숨을 몰아쉬는 클로얀.
“클로얀 장로님!”
“무슨 일입니까?”
마법사들이 마법진 쪽으로 급하게 몰려왔다.
“타, 탑주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클로얀은 탑주부터 찾았다.
“연구실에 계십니다.”
타다다닥.
마법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킨 클로얀 장로는 미친 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르케우스! 세상에 골드 드래곤의 가호가 아직 남아 있다니!’
클로얀은 아직 모든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고 심정은 미칠 것 같았다.
죽다 살아났다.
탑주가 줬던 비상용 이동 마법 스크롤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포로가 됐을 것이다.
아라돈 후작의 허망한 죽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변에 기사와 마법사, 정령사가 버젓이 존재했지만 하르케우스의 울음소리에 모두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다.
7서클 마법사인 클로얀도 마찬가지였다.
7서클 마법을 파이어 볼 따위로 막았을 때부터 이미 패닉에 빠졌다.
거기에 더해 하르케우스의 등장은 결정타였고 정령을 이용한 후작의 참살은 공포의 완결판이었다.
세상에 10만이 넘는 대군을 홀로 격파한 무지막지한 베커 장이라는 놈.
귀족들과 기사들, 병사들 모두 제국과 드래곤 그리고 놈의 감당하기 힘든 무력 앞에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존재한 적 없던 승리였다.
과거 제국 초대 황제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전과였다.
그런 승리를 놈이 거머쥐었다.
스스로 제국 황실의 수호 공작이라 신분을 밝혔다.
철두철미하게 계획했던 일이 틀어졌다.
소문은 바람처럼 달릴 것이다.
대귀족들 밑에서 공포에 떨던 귀족들과 기사들이 움직일 건 뻔했다.
크로얀 제국 황족이 살아 있다면 제국의 부활은 꿈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국의 부활은 마탑의 몰락을 불러올 것이고 그것은 저주였다.
수백 년 동안 제국으로 인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마탑들.
그늘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기회를 눈앞에 두고 대사건이 터졌다.
“클로얀 장로님?”
“타, 탑주님께 전하게! 급한 일이라고!”
클로얀은 미친 듯이 탑주가 거주하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온몸에는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마탑은 비정상적인 공격에 대비해 마나가 제안되는 곳이 많았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기에 온 힘을 다해 달렸던 클로얀.
숨은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연신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마탑의 탑주는 장로들도 함부로 접견할 수 없는 존재였다.
탑주가 거주하는 공간 앞에는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경비를 섰다.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쉽게 파괴할 수 없는 철저한 경호였다.
각종 보호 마법과 견제 장치가 쉼 없이 가동됐다.
두툼한 철문에는 방어 마법진과 룬어가 각인되어 있다.
시동어 하나면 주변 전체가 지옥으로 변할 만한 강력한 폭발력까지 내재하고 있었다.
탑이라 불렸지만 거대한 왕성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마탑은 말 그대로 하나의 왕성 도시였다.
그리고 탑주는 모두 위에 군림하는 왕이었다.
퉁퉁.
문 앞에 있던 마법사가 신호를 보냈다.
찰칵.
안쪽에서 눈만 보이는 작은 창이 열렸다.
“아즈론 장로. 급히 탑주님을 뵈어야 하오.”
클로얀이 상대를 확인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상대를 확인한 탑주의 시종장인 아즈론 장로가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오시오.”
스르르릇.
거대한 문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시종 마법사 아즈론 장로가 클로얀을 맞이했다.
장로인 클로얀은 다급한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로브를 매만졌다.
각 마탑의 탑주가 되기 위해서는 8서클을 개방해야 했다.
탑주는 언제 봐도 긴장이 되는 인물이었다.
마법사들에게 서클은 곧 자격의 증명이었다.
나이와 마탑 입문 기수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고서클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저서클 마법사들의 마법 선배가 됐다.
그리고 8서클은 곧 마법사들의 왕이 됐다.
대륙에 존재하는 세 곳의 탑주들 모두 그러했다.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마탑과 그 주변 영역은 마탑 직할 관리지였다.
모든 행정이나 사법, 경제 그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마탑이 결정했다.
반란만 아니라면 황실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았다.
제국 황실이 사라진 후 그 제약조차 완전히 풀렸다.
진정한 마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마탑 중심지 영지를 삼켰다.
도시가 아니라 이제는 대영주급 정도의 땅을 확보한 사르칸 마탑.
클로얀이 탑주가 있는 내실로 들어섰다.
스스르르릇 쿵.
다시 닫히는 문.
“…….”
긴장감이 클로얀을 짓눌렀다.
마탑의 왕이 머무는 공간.
대귀족들의 연회 홀처럼 거대한 공간을 탑주는 홀로 사용했다.
오직 탑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진귀한 마법서적들이 빽빽하게 벽면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마법진을 연구할 수 있는 강화 마법진들이 빛을 번쩍였다.
상급 이상의 마력석들이 연구실 탁자 위에서 흔한 돌처럼 뒹굴었다.
탑주는 황제도 부럽지 않을 만큼의 부자였다.
이곳은 마탑의 역사이자 모든 힘의 상징이었다.
스스스슥.
한 남자가 황금색 로브를 착용한 채 생각난 것들을 탁자 위에서 필기 하고 있었다.
나이는 젊었다.
길게 늘어진 백발이 이채롭다.
키는 적당했고 인상은 부드러웠다.
백발만 아니라면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탑주님을 알현하옵니다.”
황제나 왕에게 하는 최고의 예를 갖춰 인사를 전하는 클로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1서클 차이지만 8서클과 7서클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난 차이였다.
7서클이 마법사가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면, 8서클은 마나의 진정한 축복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클로얀 자네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니…….”
탑주가 고개를 들어 클로얀을 바라봤다.
올해 나이 100세에 가깝지만 마나 체인지로 건강한 육신을 획득한 마탑주 데오드란.
“황송하옵니다. 제가 불민하여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사옵니다!”
대귀족 가문 파견은 마탑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7서클 마법사를 빌려주고 받는 소득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요즘 같은 난세에는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마탑에서도 장로급부터 고서클 마법사들을 정기적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클로얀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고했다.
“허겁지겁 돌아온 걸로 보아 아라돈 후작이 명을 다한 것이로군.”
탑주는 귀신 같이 모든 상황을 알아챘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가끔 일어나는 변수로 취급했다.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크로얀 제국이 부활했습니다!”
“!!!”
하지만 다음 순간 들려오는 클로얀의 말에 탑주 데오드란은 크게 놀란 것을 감추지 못했다.
“크로얀 제국? 설마…….”
“살아남은 황족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 아라돈 후작이 공격했던 베커 장 백작이라는 놈은 스스로를 황실 수호 공작이라 밝혔사옵니다!”
“황실 수호 공작……. 그런 지위가 있긴 하지만 그 자가 그걸 어떻게 증명했단 말인가?”
데오드란 탑주가 다급함에 물었다.
중요한 문제였다.
클로얀의 말이 사실이라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하르케우스의 절대반지를 그 자가 사용했습니다!”
“뭐라고! 저, 절대반지!!!”
절대반지라는 말에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진 데오드란 탑주.
그의 눈동자가 마음의 격랑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
“베커…….”
와락 그녀가 날 안았다.
며칠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건만 아린은 내가 몹시 보고팠던 것 같다.
하긴 그 시간 동안 나 또한 불안했다.
인생은 언제나 계획된 바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깔끔하게 빈집털이를 성공하고 아린과 다시 만났다.
어린 새가 어미의 품을 파고들 듯 안겨온 아린.
“수고했어.”
그녀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샴푸가 없는 세상이지만 아린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맡아졌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그렇다.
자세히 안 봐도 당신은 예쁘다.
“나도.”
수고한 아린을 부드럽게 안아줬다.
우린 서로 외조와 내조를 번갈아 가며 맡았다.
아린 덕분에 신분이 상승해 공작이 됐다.
그녀는 나로 인해 제국을 찾을 수 있는 정당한 발판을 마련했다.
상부상조의 두레 전통이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거기에 달달한 러블리는 덤이다.
아린을 기다리며 성에서 외롭게 버텼다.
지구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은 꿀떡 같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할 일이 많았다.
아라돈 후작이 죽고 포로로 끌고 온 인원이 10만 단위가 넘었다.
귀족들과 기사들만 수백 단위였다.
7서클 마법사 놈은 쥐새끼처럼 튀었다.
무기를 회수했다.
내친 김에 넘쳐나는 인력을 활용해 성 주변의 밀들과 온갖 농작물들을 모두 수확했다.
돈 안 들이고 올해 농사를 끝냈다.
수익 계산도 안 됐다.
귀족들과 기사들의 마력 갑옷과 무기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귀한 물자였다.
싹 쓸어 담았다.
귀족들은 목숨만 살려준다면 엄청난 양의 목숨 값을 지불하겠다고 협상해 왔다.
그들을 볼모 삼아 귀족들의 영지까지 싹 털었다.
영주 직인이 찍힌 문장 하나에 성문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전직 용병 탈만은 성털이 전문가가 다 됐다.
아라돈을 따르던 귀족들은 한순간 빈털터리가 됐다.
졸지에 반역자가 돼 버린 귀족들에게 베풀 자비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아라돈을 따랐을 정도의 정신 상태라면 안 봐도 싹수가 노랬다.
그래도 기사들 중에는 괜찮은 자들이 제법 섞여 있었다.
황실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는 자들을 솎아 끌어 들였다.
명분이 좋았다.
원래 남자는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일개 지방 귀족의 기사가 아닌 망해버린 제국 건설의 열정페이 기사가 되고 싶은 로망이 그들에게 순수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막 뽑지 않았다.
관상은 이곳에서도 통했다.
순식간에 기사 100여 명이 충원 됐다.
공작 급에는 못 미치지만 백작 급 수준은 넘었다.
병사들은 말 할 것도 없었다.
제국과 황실이라는 말 앞에 모두 벌벌 떨었다.
귀족과 기사들 없는 병사들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만큼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다.
집도 없고 가족도 없는 병사들은 스스로 영지민이 되기를 청해왔다.
화끈하게 4000명 정도 받아줬다.
어차피 주변에 널린 게 영지고 땅이었다.
이왕 시작한 영지 싹쓸이 재테크 루트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는 사이 일을 마친 아린이 도착했다.
카이루 후작과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금의환향한 아린.
그녀를 향해 영지민들이 크로얀 제국과 황녀 폐하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감동이었다.
잘키운 여자 친구 한 명은 열 명의 귀족과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아린이 오기 전까지……. 당신을 보기 전까지 내 심장은 말라 있었어. 어제까지 어두운 밤도 당신이 없어서였지. 그러나 오늘은 달라. 아린 당신은 나의 인생이고 그리움……. 오늘 난 행복해.”
아린을 위해 쫙 닭살 멘트를 깔았다.
“베커……. 당신은…….”
눈빛이 촉촉해지는 아린.
이 동네에서는 아직 이런 말들이 먹힌다.
순수함이 산소방울처럼 숨 쉬었다.
아린이 다시 한 번 깊게 안겨왔다.
이제 우려했던 일들이 대충 끝났다.
휴가를 가도 될 정도는 됐다.
그러나 가기 전에…….
“아린. 배고프지. 당신을 위해 특별 요리를 준비했어~.”
열심히 돈 벌고 온 여자 친구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했다.
“요리요?”
아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요섹남의 매력에 아린도 푹 빠졌다.
“이리와~.”
아린을 식탁 앞에 앉혔다.
마법을 사용해 아직도 따끈한 온기를 품은 채 뚜껑 덮인 스테인리스 원형 냄비.
냄비 뚜껑을 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요!”
아린이 단숨에 냄새에 취했다.
맛있는 건 당연했다.
살집 좋은 돼지 갈비에 양념치킨 양념을 바르고 구웠다.
2019년에 유행했던 영화 ‘빡센 직업’에 나왔던 레시피였다.
윤기 좔좔 흐르는 큼직한 갈비 덩어리 하나를 아린의 접시 위에 놓았다.
달콤함과 약간의 스파이시한 맛이 조화를 이룬 새로운 양념 고기 요리.
아린이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 한 점을 깔끔하게 썰어 입에 넣었다.
“!!!”
입속에 들어간 고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린.
“어때? 맛있어?”
내가 새로이 창작한 요리에 대한 칭찬이 듣고 싶었다.
“베커……. 이건 돼지고기인가요 치킨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