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1
회귀의 전설
511장. 수호 공작 (1)
“허어억!”
카이루 후작은 허공에 뜬 황금빛 그림자를 보고 경악했다.
이제는 잊혀진 전설이었다.
한때 대륙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존중하고 경배했던 한 가문의 표식.
“크, 크로얀!”
카이루 후작을 따르는 가신 귀족 입에서 크로얀이라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
아직 나이 어린 기사들은 구전으로 전해들었던 크로얀이라는 이름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모든 기사들에게 영원히 그리워해야 할 향수 같은 존재가 크로얀이었다.
기사의 제국이라 불렸던 크로얀.
그렇게 갑작스럽게 멸망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대륙을 통치하고 있었을 위대한 이름.
그 이름이 드보르 후작성 홀에서 다시 불리고 있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드래곤이 포효했다.
“헉!”
“크으…….”
실재하는 드래곤 피어가 아님에도 생생한 포효에 카이루 후작과 그 가신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몸은 벌벌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
오직 크로얀 제국의 적통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황제의 인증 반지.
황제가 직접 참전하는 순간 이 반지의 드래곤이 전장에 임했다.
드래곤의 가피는 일순간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100전 100승의 찬란한 전과가 황제의 뒤를 따랐다.
제국 건국 시절 드래곤의 가호가 담긴 반지는 절대 반지로 불렸다.
특별한 마법이 장착된 것도 아니었다.
반지에 마력을 주입하면 제국과 수호 계약을 맺었던 하르케우스의 모습이 나타날 뿐이었다.
하지만 그 현상 자체가 제국의 상징이었다.
모두 다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골드 드래곤 하르케우스는 인간들에게는 신에 버금가는 신화적 존재였다.
그러나 그 절대 반지는 제국 멸망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전설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가며 간간이 회자되는 정도가 됐다.
그런데 오늘 그 사라졌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제국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골드 드래곤 하르케우스.
드래곤이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제국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앗.
드래곤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로브 모자를 벗은 아린.
천상의 선과 지옥의 악을 대변하는 듯한 그녀 얼굴이 드러났음에도 누구 하나 놀라지 않았다.
절대 반지의 힘은 인간이 가진 흉터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다.
“…….”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모두의 시선이 아린에게 향했다.
“……누구십니까.”
카이루 후작이 바짝바짝 마른 입술을 겨우 떼며 물었다.
중요한 문제였다.
두려움을 담은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의 절대 반지는 드래곤이 직접 제작한 것이다.
오직 적통으로 황제의 핏줄만이 반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신비한 마법으로 당대 황제와 그 직계 후손에게서만 절대 반지의 효용이 발휘되었다.
황제와 직계는 모두 죽었다.
황궁의 멸망 소식에 고위 귀족들 대부분이 기사가 마법사를 이끌고 황도로 몰려갔다.
황성은 폐허였다.
황제가 거주하고 다스리던 황성은 지독한 마법에 당한 듯 부셔져 내렸다.
카이루 후작도 직접 눈으로 본 바였다.
수백만 황도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싸움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그 어떤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황제를 비롯해 대단하기 그지없었던 황실 마법사와 기사들, 황도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 또한 없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황실을 위용을 싫어했던 블랙 드래곤들이 몰려와 황도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마족 탓이라는 말도 흘러 나왔다.
신전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신들도 그 어떤 신탁도 내리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황도를 떠난 이들을 찾아 헤맸지만 그 누구도 산 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약속 된 것처럼 수백 년을 이어왔던 제국은 산산이 분열 됐다.
곳곳에서 고위 귀족들이 스스로 왕이 됐다.
의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자들이나 힘이 미진해 선뜻 나서지 못한 자들만이 귀족가로 남았다.
그들의 행보 중 카이루 후작은 전자였다.
과거 조상들의 왕국을 문 닫게 만들었지만 크로얀 제국은 별 탈 없이 제국을 운영했다.
반란을 비롯해 이민족과 오크들 따위가 문제를 일으켰지만 제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든든한 귀족 가문이 황실의 후원자가 돼 주었다.
황실과 카이루 후작 가문 또한 혼맥으로 강하게 얽혀 있었다.
후작가를 계승할 당시 황제가 직접 화려한 임명식을 거행해줬다.
후사도 없는 카이루 후작은 아직도 그런 황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황제의 절대 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나이가 아직 어려 보이는 여자 마법사 손에서 말이다.
반지를 쥐고 있다면 황제의 피를 이어 받은 직계 황족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카이루 후작은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우선 어린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았다.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여자 마법사.
“내 이름은 아린 하르케우스 크로얀입니다.”
“!!!”
하르케우스라는 황실 수호 드래곤이 직접 사용하는 중간 이름을 쓰는 아린.
드래곤이 허락한 일로 대륙에서 이 중간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직계 황족뿐이었다.
당대 황족이 아닌 자가 사용하게 되면 드래곤이 저주를 내린다는 전설이 함께 내려왔다.
파르르르 카이루 후작의 몸이 떨렸다.
황제의 딸로 짐작되는 아린은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절대 반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과거 황제 손에서 펼쳐진 절대 반지 골드 드래곤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내 어머니는……. 아바마마의 보이지 않는 연인이셨습니다. 이름은 비올라 드 타이란……. 경도 알고 있는 분입니다.”
“타, 타이란 백작가!”
카이루 후작도 알고 있는 가문 이름이었다.
황도에서 황가를 보필해 온 유명한 백작가문이었다.
영지는 없었지만 대대로 귀족가를 유지했다.
비록 백작가였지만 그 충성심과 힘은 능히 공작가와 버금갔다.
비올라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황후는 아니었지만 황제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돌았다.
나이가 찼음에도 결혼하지 않았던 비올라.
그녀의 미모는 과거 젊은 시절 카이루 후작도 상사병에 걸렸을 만큼 대단했었다.
‘닮았다!’
온전한 반쪽 모습은 비올라와 많이 닮은 아린.
‘그런데 나이는? 왜 황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아린의 생존이었다.
“내 스승님은 루르멜이십니다다.”
“아!!!”
루르멜이라는 이름 앞에 카이루는 그제야 답답했던 속이 뻥 하니 뚫렸다.
황제와 황도뿐만 아니라 제국을 수호하던 위대한 대마법사 루르멜 공작.
그는 8서클 마법사였다.
“황도에 위기가 불어 닥칠 때……. 아바마마의 명령으로 스승님이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마력 대법 속에서 10년 동안 긴 잠을 잤습니다.”
황태자나 마탑의 후계자들에게 펼쳐지는 마력 대법.
마력석을 이용해 몸의 체질을 바꿔버리는 가히 놀랍고 대단한 마법이었다.
이 마력 대법을 받은 자는 평생 어떤 병에 걸리지도 않고 마력에 대한 대단한 감응력을 소유하게 된다.
앞뒤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황태자가 아닌 아린을 선택한 건 여전히 의문스러웠지만 그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황도에서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사건에 대해 카이루가 물었다.
“신과의 맹약입니다……. 아직은 밝힐 수 없습니다.”
아린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답했다.
‘황녀님이 맞다……. 그러나 왜 이제야…….’
충성스러웠던 귀족들 상당수가 감출 수 없는 욕망을 품었다.
30년이 넘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크로얀 황실의 이름 아래 깃발을 들 자들은…….
“경은 아직 크로얀 가문의 기사입니까?”
그 순간 조용히 울리는 아린의 물음.
“…….”
카이루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제에게 직접 하사 받았던 기사 작위.
그 순간이 떠올랐다.
스무 살 그 시절에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실 기사 학교에서 황제와 선후배로 지냈던 카이루 후작.
아직도 그 날 서임을 받던 순간의 떨림과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었다.
카이루 드 드보르 후작은 작위를 떠나 황제와 황실의 기사였다.
그 진정성을 확인하려는 듯 지금 황가의 후손이 물어왔다.
크로얀 가문의 기사임이 맞는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부정하게 되면 크로얀 가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인정하는 순간 다시 깃발을 들고 크로얀 가문을 위해 검을 들어야 했다.
선택의 순간 가신 모두의 시선이 카이루 후작에게 향했다.
저벅저벅.
권좌에서 내려오는 카이루 후작.
스릉.
권좌 옆에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황제에게 하사 받았던 기사의 검.
모두를 에워싼 공기마저 긴장하는 순간.
철컹.
카이루 후작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공손히 양손으로 들어 올려지는 검.
“신…… 카이루 드 드보르 후작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크로얀 가문의 신실한 검이었사옵니다! 제 목숨과 이 검은…… 오직 황가와 황녀님을 위해 제물로 바쳐질 것이옵니다!!!”
그 어떤 때보다 쩌렁쩌렁 울리는 후작의 충성 맹세.
“황가와 황녀님을 위하여!!!”
처저저정.
뒤에 서 있던 가신과 기사들이 검을 바닥에 찍으며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완벽한 복종!
“경들의 충성심을 아린 하르케우스 크로얀으로 이름으로 받겠노라.”
아직은 어리고 여린 황녀의 선포.
“망극하옵니다!!!”
그만큼 뜨겁게 울려 퍼지는 기사들의 외침.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가던 크로얀 제국 부활을 신들과 세상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
이, 이게 뭐야!
당황하면 바보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마법사 아린이 황녀란다.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나 황녀.
이런 전개는 원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부터 적당히 물건 팔고 지구로 귀환하는 게 목표였다.
점점 일이 커졌다.
성에, 영지민에, 기사에, 귀족이라는 적들에 이제는 황녀까지 합세했다.
아린을 만났을 때 알파닥이 했던 의미심장했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서 손에 꼽히는 위험인물이라고 아린을 대놓고 평가했다.
그때 들었던 말의 의미를 이제 알겠다.
아린은……. 황녀였다.
한마디로 망해버린 과거 이 동네 넘버원 재벌집 딸.
그녀가 다시 재벌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내 영지 살리자고 깔았던 판이 감당 안 되게 커졌다.
준 왕국을 다스리는 후작이 고개를 조아리며 처박았다.
나만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좀 우스웠다.
지금 와서 아린에게 고개를 숙이고 황녀님이라고 부르기에도 입장이 뭐했다.
이곳에 오는 와중에도 모닥불 피워놓고 우리 뽀뽀했던 사이다.
사기 결혼에 준하는 사기 연애였다.
이쪽 세상에서는 이래봬도 나 아린만 만나기로 다짐했었다.
뭔가 당한 것 같았다.
스윽.
아린이 나를 돌아봤다.
하아……. 저 촉촉한 눈빛 어쩔 거야!
날 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순수농도 100%로 진심만 담겨 있었다.
사기 연애는 아님이 확실했다.
아린은 날 돕기 위해 마지막 패를 꺼내든 것이다.
불쌍한 남자 친구 영지 좀 살려보겠다고 그녀가 절대 반지를 꺼냈다.
후작을 엮기 위해서는 그녀가 가진 뒷배가 절실히 필요했다.
지구에서 하도 막장 스토리를 많이 봐서 머리에 싹 그려졌다.
이제부터 아린 인생도 고달파지는 거다.
그녀가 황족이라는 게 알려지면 사방에서 난리가 날 게 확실했다.
제국 황실을 수호하려는 자와 잡아먹으려는 자들의 전쟁이 벌어질 건 불을 보듯 빤했다.
그녀는 이제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베커…….”
적반하장으로 그녀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 나 쪼잔한 남자 아니다.
살다 보면 그 정도 비밀은 다들 품고 사는 거다.
나도 아린에게 말 못 한 비밀들이 덤프트럭 사이즈로 몇 대다.
“그럴 수도 있지…… 요.”
이제 그녀와 편하게 말 트는 건 끝났다.
신분이 바뀐 왕족과 연애하는 기분이 새롭다.
그녀가 날 보며 슬프게 웃는다.
“……제국의 유일한 적통자인 나 아린 하르케우스 크로얀 황녀의 이름으로 크로얀 제국 부흥을 책임질 황실 수호 공작으로…….”
황실 수호 공작 그래 이름 좋다!
카이루 후작님! 이제 공작 되는 겁니다.
아린이 머리가 좋았다.
후작을 공작으로 임명한 뒤 홀딱 벗겨 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흐뭇하게 아린을 바라봤다.
“베커 장 백작을 임명하는 바입니다!”
……응? 뭐라고? 베커 장 백작? 나?
아린! 이, 이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