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0
회귀의 전설
510장. 전쟁 (2)
디링 따라라라라라라라 따라라라라라라라라~♫.
잔잔한 기타 선율이 울려 퍼졌다.
해가 저무는 이계의 성.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내성 가장 높은 망루 위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웬일인지 아공간이 기타는 거부감 없이 받아줬다.
수제로 만들어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명품 기타를 아공간도 알아본 것 같았다.
붉은 햇살을 받으며 울려 퍼지는 기타 선율은 섬세한 슬픔을 품었다.
명곡으로 알려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한때는 영광스러웠지만 전쟁에 패배한 알함브라 궁전의 왕이 남기고 간 처절한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감정이 올올히 선율에 담겼다.
내가 지금 그 왕의 심정이었다.
한가하게 이렇게 앉아 기타 칠 시간이 있냐고 누군가는 묻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는 위안이 됐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전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라돈 드 주넨이라는 후작 놈이 요구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쪽 업계가 항복하는 순간 평생 머리를 조아리는 종처럼 살아야 했다.
죽어도 그 짓은 싫었다.
러셀이라는 남작을 박살냈으니 후작이 가만있지 않을 것임은 예상했다.
바람을 타고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명예와 자존심을 목숨처럼 숭배하는 곳이 이 동네였다.
불붙은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법.
화려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쪽배를 타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던 알함브라 성의 주인.
그와 나의 처지가 다를 바 없었다.
여차하면 나 혼자 몸 빼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저 멀리 집집마다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쌀쌀해지는 가을에 접어든 이곳 대륙.
빵 굽고 수프 끓이는 음식 냄새가 내성까지 퍼져왔다.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은 꼬맹이들이 외성 곳곳을 소리 지르며 달렸다.
영지민이 된 용병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술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외성벽 위는 밤의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해 병사들이 놓는 화톳불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이들 모두를 버릴 수 없었다.
나 한 사람 믿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떤 연유로 내가 이 낯선 곳까지 오게 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도 신들의 안배 같았다.
그러니 지켜내야만 했다.
모든 순간이 위기 아닌 순간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좀 더 달랐다.
후작가라면 최소 수만 단위 병력을 몰고 올 것이다.
진짜 기사단에 마법사까지 대동하고 미처 생각도 못한 전력을 준비해 쳐들어올 게 뻔했다.
띠리리링……♪.
기타 연주가 끝났다.
“……베커.”
나의 이름을 부르며 아린이 다가왔다.
로브 모자를 뒤집어쓴 채 걸어오는 그녀.
사라락.
내 앞에서만큼은 얼굴의 흉터를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듣기 거북했죠?”
아린을 보며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예요. 그 악기 이름이 뭔가요?”
“기타라고 합니다.”
“나무로 만든 하프 같아요. 듣기 좋아요. 슬펐지만 행복했어요.”
내공을 담아 연주하다 보니 소리가 유난히 풍부하고 좋았다.
“다행이군요.”
“베커…….”
아린이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힘내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전 믿어요.”
믿음이 가득한 아린의 눈동자.
“그래야죠.”
스륵.
아린이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왔다.
낯선 이계에서 그 누구보다 내게 힘이 되는 그녀.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중하게 아린을 안았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베커 장 백작이었다.
수천 명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실제 가장.
아린 또한 내가 책임져야 할 소중한 인연이었다.
사라라라랑.
바람이 불어왔다.
흩어지듯 성벽 위에 불어오는 차가운 저녁 기운을 느끼며 아린을 온 마음으로 품었다.
북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이 차가운 바람.
당도한 가을이 생각보다 빨리 겨울을 끌고 올 것만 같았다.
***
“전쟁이라…… 전쟁.”
유베스 상단을 운영하는 상단주 칼몬이 계속 중얼거렸다.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베커 영지에서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아라돈 후작이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모든 휘하 가문에 깃발을 전했다고 합니다.”
“전쟁입니다. 일개 영지 전쟁이 아니라 베커 영지의 씨를 말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아쉽지만 베커 영지에서 상단을 철수시켜야 합니다.”
회의에 참석한 상단주들 대부분이 상단 철수를 요구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절대적으로 한쪽이 치우치는 전력 차였다.
같은 수준의 영지전이라면 지금껏 드러난 베커 영주의 능력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왕국 급에 해당하는 아라돈 후작가였다.
왕국이 되기 위해 그간 암암리에 힘을 비축해 왔음을 상인들 모두 알았다.
그만큼 전쟁 물자가 충실하게 축적됐다는 얘기였다.
휘하에 7서클 마법사에 정령사, 기사단이 존재했다.
베커 영지는 그들과 부딪치는 순간 산산 조각 나며 박살날 게 뻔했다.
“흐음…….”
칼몬 상단주는 신음을 토했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었다.
베커 영주 덕분에 유베스 상단은 엄청난 이득을 올렸다.
오로지 베커 영주만 공급할 수 있는 드워프와 엘프 물건은 귀족들과 마법사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그깟 가죽이나 곡식 따위를 팔아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차원이 달랐다.
드워프 접시 한 마차가 수백 대의 밀 마차보다 더 큰 이문을 남겼다.
그 덕분에 유베스 상단은 경쟁 상단을 따돌리며 위세를 떨쳤다.
“상단주님, 더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비나를 비롯해 상인들을 불러와야 합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후작가의 기수 가문들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지 않습니까! 더 이상 뜸을 들일 시간이 없습니다!”
“분노한 후작이 상단이라고 해서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신전의 사제라면 모를까…….”
“후작가와 계약한 노예 상단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상단이라 사방에서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만큼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그대로 머문다.”
“네???”
“그게 무슨…….”
예기치 않은 칼몬 상단주의 선택에 고위 상인들이 당황하며 반문했다.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상단주 권한이 막강하다고는 하지만 상단 회의는 엄연한 협의체였다.
상단주가 자칫 독선에 빠져 상단을 망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제정된 규칙이었다.
그런데 상단주가 그걸 무시하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만약 베커 영지가 무너진다면 상단주 자리를 내놓겠다.”
“!!!”
더 과한 말이 이어졌다.
5급 상인으로 시작해 상단주의 자리에까지 오른 칼몬이었다.
유베스 상단을 칼몬 상단이라고 부를 만큼 그 명성이 작지 않았다.
그런데 칼몬답지 않게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80세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단이 넘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감이 말해주고 있다. 이 전쟁……. 결코 아라돈 후작이 유리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칼몬 상단주가 말하고 있는 직감.
“…….”
그의 말에 상인들은 침묵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칼몬 상단주의 판단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거나 위험을 회피한 적이 있었다.
황금의 신 듀에라의 축복을 받은 자라 불리는 칼몬 상단주의 결정.
다시 한 번 칼몬 상단주의 그 예리한 감이 발동한 셈이었다.
“아라돈 후작군이 도착하기 전…… 베커 백작이 요청한 군수물자를 비롯해 여러 물품들을 공급하도록……. 이건 상단주 명으로 행해지는 급행명령이다.”
거두어들일 수 없는 도박패를 확실히 던지는 칼몬 상단주.
“이행하겠습니다!”
상인들은 고개를 숙였다.
상단을 걸고 던진 도박패인 만큼 따라야 하는 상인들.
그저 신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이 전쟁이 마무리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럇!”
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말을 몰았다.
“이얍!”
옆에서 아린도 함께 말을 몰았다.
원군 요청이 결정 났다.
루벡 남작과 전투가 있을 때부터 결정이 났던 내용이었다.
말에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
피로가 덜한 말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달렸다.
영지와 영지를 가로질러야 했다.
성수로 목을 축이게 한 후 힐링 마법으로 전신의 근육을 풀어줬다.
컨디션이 최고를 찍은 말은 거침없이 내달리며 영지를 넘었다.
유베스 상단에서 전서구로 아라돈 후작군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보병까지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어 2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 안에 원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근방에서 유일하게 아라돈 후작을 견제할 수 있는 카이루 드 드보르 후작가를 향했다.
기사들이 대신 가겠다는 것을 말렸다.
그들로는 씨도 안 먹힐 소리였다.
영주인 내가 직접 찾아가도 수락 가망성이 낮았다.
그래도 일단 달려야 했다.
나 혼자 대응 가능한 전투가 아니었다.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후작군이 성벽을 넘는 순간 패배하게 되는 전쟁이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었다.
아린도 나와 동행을 자처했다.
영지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영지에 있는 모든 남성들에게 무기가 지급 됐다.
그들은 후작가를 앞에 두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곳이 마지막 안식처라는 걸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영지를 달리고 또 달렸다.
땅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었다.
지도를 숙지하며 최단거리로 달렸지만 드보르 후작령까지 나흘이나 걸렸다.
그리고…….
저 멀리 구릉 위로 거대한 성이 웅장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한때 왕국이었던 드보르 후작의 성.
베커 성보다 몇 배나 큰 후작성은 오만하게 서서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이랴앗!”
스피드를 냈다.
아라돈 후작이 머리 좋게 별동대라도 보냈다면 내가 다시 돌아가기도 전에 영지는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다.
***
“베르샤 성의 주인이 찾아왔다고?”
“그렇사옵니다. 주군.”
노회한 대귀족 카이루 후작은 가신의 보고를 받았다.
늦은 오후였다.
아라돈 드 쥬넨 후작이 베르샤 성을 점거한 베커라는 자를 죽이기 위해 출병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가신들과 회의를 거친 후였다.
아라돈 후작은 가문의 적이었기에 이번 기회를 놓고 판단해 보려 했다.
하지만 가신 모두 출병에 반대했다.
베르샤 성의 주인과는 안면이 없었다.
괜히 패배할 전쟁에 뛰어들기보다는 전쟁 후를 노리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카이루 후작도 동의했다.
가문을 배신한 아라돈 후작과는 어차피 검을 나누어야 했다.
그 전에 미리 쓸데없는 피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베르샤 성의 주인이 찾아왔다.
톡톡.
홀의 중앙 권좌에 앉아 있던 카이루 후작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박자를 탔다.
고민에 빠졌다.
“쫓아낼까요?”
“들여보내라.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달려온 자다. 식사 한 끼 대접해서 보내는 것도 예의다.”
원군은 될 수 없지만 쫓아낼 정도로 카이루 후작은 박정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가신이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홀의 문이 열리며 두 남녀가 들어왔다.
‘호오?’
카이루 후작은 홀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감탄했다.
검은 머리칼이 특히 인상적인 기사였다.
눈빛은 횃불처럼 빛났다.
위험에 처한 입장임에도 전혀 비굴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기사였다.
아라돈 후작이 전력을 다해 전쟁에 참가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베커 장 백작이 인연의 신 쥬피로 님의 이름으로 카이루 드 드보르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귀족가의 예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베커 장 백작.
일체의 행동이 깔끔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카이루 후작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손이 없는 탓에 패기 넘치는 젊은 기사를 보면 기분이 좋았다.
저렇게 늠름한 아들 하나만 있었다면 소원이 없었을 것이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공의 영지가 어려움에 처한 건 알고 있소. 그러나 본 영주는 도와줄 수 없다는 걸 미리 선언하는 바이오. 안타깝지만 저녁이라도 먹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소.”
후작령에 불똥이 튀는 걸 원치 않는 카이루 후작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
베커 백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치란 언제나 명분이 필요했다.
베커 장 백작이 진작 후작가의 가신이 됐었다면 참전의 명분이 생겼겠지만 지금은 늦었다.
각 가문에 깃발을 돌려도 며칠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전에 베커 영지는 패망할 것이다.
뚜벅.
그때 베커 기사 옆에 있던 로브를 입은 여인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엄하다!”
허락 없이 귀족에게 다가서면 암살자로 간주됐다.
홀에 있던 기사들이 눈을 부라렸다.
당장 여인을 향해 달려들 기세.
스윽.
로브 모자를 걷지도 않은 채 여인이 오른손을 앞으로 쓰윽 내밀었다.
“???”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그 순간.
파아아아앗.
갑자기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허공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