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9
회귀의 전설
509장. 전쟁 (1)
참았어야 했다.
미친 듯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지금껏 그래왔듯 이를 악물고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보고픔과 인내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오랜만의 귀국이었다.
명절이라는 핑계가 좋았다.
예뻐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잠시 고국에 들렀다.
시간이 약이었다.
그렇게 미웠던 아빠도 눈에 띄게 흰 머리카락이 많이 보였다.
마음이 아프고 안쓰러웠다.
엄마와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나이를 먹자 손유리도 부모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강제로 떠밀리듯 떠났던 유학 생활은 이모가 엄마 못지않게 잘 챙겨줘서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 남자가 보여줬던 세계를 모방하며 위로 삼아 학업에 매진했다.
그런 만큼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특정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내는 자유로운 작품 세계에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 도시는 매력적이었다.
역사 속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사랑이 남긴 상처는 아팠지만 아직 젊었다.
지금 겪고 있는 삶의 무게를 붓으로 그려 화폭에 담았다.
서투른 사랑과 상처를 흘러가는 세느강 물결에 던졌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흘려보내긴 했지만 가끔 막막해지는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를 향한 그리움은 불면의 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찾아온 한국.
친구와 약속을 잡고 길을 걷다 흔하지 않은 공중전화기를 본 순간 그가 떠올랐다.
번호를 눌렀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만 같았다.
홍대에서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연인들의 모습에 단단하게 눌러두었던 둑이 터져버린 듯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번호는 바뀌지 않은 듯했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과거보다 훨씬 굵어진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 누구십니까?
여전히 정중한 그의 목소리.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심정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하.”
손으로 입을 꾹 눌러 막았지만 새어 나오는 숨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 누구……!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 자꾸 묻는 남자.
침묵이 흘렀다.
누구인지 밝히려고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하아…….
길게 새어 나오는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깐의 침묵 끝에 바로 알아챘다.
순간 전화를 끊으려 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가슴이 저렸다.
놀랍게도 그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텅텅 비워냈던 창고에 곡식이 들어차듯 마음에 에너지가 찼다.
이제 다시 또 많은 시간을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선배……. 잘 지냈어요?
공중전화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안부를 묻는 그의 목소리.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선배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자신을 배려해 절제하려는 그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됐다.
“…….”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하는 순간 곧장 그에게 달려가게 될 것만 같았다.
“응……. 잘 지냈어……요.”
어렵게 입술을 떼고 인사를 전했다.
그 순간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와 통화를 하게 되면 어떤 말을 나눌까 수없이 상상했건만 형식적인 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 다행입니다. 걱정했었습니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 순간 손유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유학 중에도 장태산에 관한 소식을 종종 듣고 있었다.
친구인 강아린이 간간이 그의 소식을 전해줬다.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것도 이미 알았다.
군대를 다녀오고 사법시험에 응시한 것도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그녀의 전부였다.
“…….”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손유리.
하지만 아직은 그를 만날 때가 아니었다.
아빠는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었다.
장태산과 얽혀있는 그 무엇.
그걸 알기 전까지는 지금의 거리를 유지하는 게 맞았다.
“유리야~!”
친구 강아린이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로 다가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산 씨……. 이만 끊을게.”
- 기다리겠습니다. 선배의 전화는 언제든 받겠습니다.
듬직한 그의 음성.
떠나버린 자신을 원망하거나 차갑게 대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손유리는 그제야 마음 속 짐을 내려놓았다.
언제든 전화해도 된다는 그의 말이 어떤 사랑의 밀어보다 뜨겁게 그녀의 마음을 적셨다.
“잘 지내…… 요.”
딸깍.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손유리는 수화기를 급히 내려놓았다.
“하아아아아.”
길게 터져 나오는 한숨.
몇 년 동안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렀던 묵은 체증이 모두 날아간 것만 같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시작될 긴 그리움의 시간.
버틸 수 있는 힘이 세차게 손유리의 피를 타고 돌았다.
***
“오오오오! 대박!!!”
“말로만 듣던 자가용 비행기라니…….”
씨큐리티 직원들 중에는 처음 자가용 비행기를 타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추석 보너스를 듬뿍 받고 휴가지로 여행을 떠났다.
경호 문제로 인해 휴가를 떠나지 못했던 직원들 중에서 인원을 뽑았다.
로버트 측 경호원들도 올 것이기 때문에 안전에는 문제없었다.
휴가지는 사방이 탁 트인 프라이빗 비치 호텔이었다.
“진짜 좋다……. 흐.”
한진웅 대표와 결혼을 약속한 드워프 가문의 따님 임혜린 누나도 동행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구름을 보며 누나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결혼하면 빌려주실 거야.”
한진웅 대표가 나를 쳐다봤다.
꿈도 야무지게 크다.
“태산아! 술 한 잔 말아줄게!”
넓은 좌석에 앉은 혜린 누나가 해맑게 웃었다.
드워프 어르신 따님 아니랄까봐 인사가 술이다.
드워프 공장은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이계로 가져갈 물건들뿐만 아니라 상품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국내 소비자들이 많이 찾았다.
씨익 웃어 보였다.
굳이 벌써 확답을 줄 필요는 없었다.
뭐든지 하는 것 봐서 대가가 주어지는 법이다.
“오빠? 이거 빌린 거지?”
“진짜 좋다…….”
특석에 앉은 쌍둥이들도 뿅 간 눈빛이다.
오빠 거라 말 못했다.
“오빠가 돈 많이 벌어도 자가용 비행기는 힘들지.”
이럴 땐 중국의 진짜 부자처럼 감추고 사는 게 세상사는 데 편한 법이다.
새 제품으로 내장까지 개조한 자가용 비행기는 예전 것보다 더 묵직했다.
황금으로 처바른 게 아니라 고급 원목으로 내부 장식이 되어 유럽 귀족들의 자가용 비행기 같았다.
“그런데…… 오빠 무슨 고민 있어?”
“응?”
조용하지만 눈치 빠른 주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달리 속이 깊은 아이였다.
“출발할 때부터 생각이 많은 얼굴이던데…….”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되묻는 주아.
사실 갑자기 통화가 이루어진 손유리 때문에 생각이 많았다.
빗속의 하룻밤을 떠나 그녀와의 추억은 남달리 깊었다.
대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인연.
친일파 집안의 딸이 분명한 유리 선배는 티 없이 맑았다.
쉽게 그녀를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정작 손유리는 아직 자신 가문의 숨은 역사를 몰랐다.
그게 밝혀진다면 그녀 성격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손대균도 그걸 가장 경계한 것 같았다.
다행히 손유리 목소리는 건강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강아린 선배 목소리도 안심이 됐다.
손유리와 아린 선배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 가문과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내야만 마음에 걸림이 없이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 선배가 원하지 않아도 나는…… 손 씨 가문과 한 바탕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사람 사는 데 고민 없다면 말이 안 되지. 매일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다. 화창한 날씨 뒤에 비바람이 부는 것처럼 신은 저마다 감당할 만큼의 고통을 던지는 법이야. 주아 너에게 쏟아지는 교수님들의 과제처럼 말이다.”
“흐으~. 우리 오빠 철학자 다 됐어. 어릴 적에는 말도 못하는 여드름쟁이 까칠한 오빠였는데~.”
주희가 끼어들었다.
과거 나의 흑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막둥이.
“가자마자 중간고사라며?”
“……으으으. 잊고 있던 악몽을 깨우다니!”
“다시 집에 돌아갈래? 휴가 가면서 전공서적 끼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족보는 받았어? 설마 성적을 C, D로 깔 생각은 아니지? 오빠는 전 과목 A+인데.”
“오빠!”
항상 징계는 빠르고 아프게 가해야 하는 법.
주희의 입을 간단히 막았다.
슈우우우우우우우웃.
그사이 비행기는 인도양 위를 날았다.
넉넉한 1등석 좌석에 앉아 이동했기에 피곤함도 거의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휴가지.
눈을 감았다.
아직 밀려 있는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남았다.
본격적으로 휴가를 즐기기 전에 깔끔하게 처리해 둬야 속이 편했다.
넉넉한 카르마 포인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동!
***
“감히…… 감히……. 감히!!!”
퍼걱.
손으로 잡고 있던 의자 손잡이가 거친 마력에 부셔졌다.
분노로 지역의 패자 아라돈 드 쥬넨 후작 눈동자는 핏발 선 채 벌겋게 충혈됐다.
이런 모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제국이 산산이 부서진 뒤로 쥬넨 후작가를 능멸한 자는 없었다.
반항하는 즉시 처단해 버릴 힘을 소유한 강자였다.
충성스런 휘하 가문들의 검은 매서웠다.
그런데 제대로 미친놈이 나타났다.
아량을 베풀어 항복 권유 사절을 보냈건만 겁도 없이 트집을 잡아 사자인 러셀 남작을 욕보였다.
쥬넨 후작가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참으면 안 됐다.
주군 된 자가 여기서 침묵하면 휘하 가문이 동요할 게 뻔했다.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명예를 소중하게 지켜내지 못하는 귀족 가문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각하!”
심복이자 후작가의 첫 번째 가는 기수 가데온 가문의 베른 자작이 아라돈을 뜨겁게 불렀다.
“말하라.”
“소신이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감히 각하를 욕보인 그자와 영지민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보낼 것이옵니다!”
패도의 기사 가문이라 불리는 베른 자작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크와 맞먹을 정도로 덩치가 거구였다.
과거부터 쭉 쥬넨 후작가를 호위해 온 가문이었다.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충성을 아끼지 않았다.
“불가하다.”
“각하!!!”
“놈은 강하다. 그리고 휘하에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마법사도 존재한다. 쉽게 상대할 자가 아니다.”
분노 속에서도 쥬넨 후작은 냉철함을 유지했다.
루벡 남작 가문이 망할 때부터 정보를 수집했다.
베르샤 백작성을 점령하고 있는 베커라는 놈은 평범한 놈이 아니었다.
“그러시다면…….”
“각 가문에 쥬넨 가문의 깃발을 전하라!”
“!!!”
베른 자작은 화들짝 놀랐다.
주군으로서 내리는 가문의 깃발은 총력전을 의미했다.
“전쟁이다! 내 친히……. 그곳에 임해 놈의 살점을 씹으며 명예를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