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
회귀의 전설
508장. 미친 천재 (4)
“…….”
깊은 침묵이 예술관 전체에 감돌았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의 계절 오후 시간에 찾아온 뮤즈의 방문.
음대 실기실의 문들이 활짝 열렸다.
교수와 학생들이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무대를 바라봤다.
지하까지 파고든 화음에 저격당한 미대생들이 붓을 든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법 피리와 같은 피아노 소리에 홀렸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꿈결 같이 흐른 20여 분의 시간.
보통의 피아노 연주 소리는 실기실 내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뿐만 아니라 일정 거리 이상의 공간을 울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왔던 피아노 소리는 달랐다.
모두의 귀에 아름다운 선율로 똑똑히 박혔다.
먼 곳이나 가까운 곳 거리와 상관없이 듣는 이들 모두의 영혼을 울렸다.
환희의 절정에 대부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흑…….”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던 은여현의 감정 폭발이 가장 컸다.
이게 바로 음악이 주는 카타르시스였다.
어릴 적 자폐증상을 보였던 자신을 구원했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F장조 열정.
들판에 서 있던 자아의 외로움에서 폭풍우 같은 음계의 뜨거운 비가 은여현을 흠뻑 적셨다.
그때 은여현은 다시 태어났다.
베토벤을 사모하는 연인이자 죽어도 떼어낼 수 없는 소나타의 외동딸로.
그때 받았던 화음의 장엄함을 뛰어넘는 환희의 찬가가 방금 울렸다.
또다시 깨어난 것 같았다.
이제야 껍질을 깨고 온전히 세상 밖으로 나왔음을 은여현은 깨달았다.
고지가 명확히 보였다.
이번 생에 주어진 운명의 과제.
“들었지?”
“네……. 전부 다.”
베토벤 재림자는 가만히 물었고 은여현은 답했다.
오직 둘만이 알 수 있는 화답.
“베토벤이 널 사랑한단다.”
“네! 저도 사랑해요!”
은여현은 확실하게 답했다.
그동안 갑갑한 멍에처럼 뭔가에 씌어있던 인격의 가면 페르소나가 산산이 깨졌다.
“어머 사랑?”
“뭐야? 저 두 사람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거야?”
가까이에 있던 여학생들이 사랑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두 사람의 대화 전부를 몰랐다.
은여현은 이번 생에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가 따로 있었다.
눈앞의 장태산도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을 화음으로 뜨겁게 안아줬던 베토벤만이 은여현의 유일한 남자였다.
그 사실을 장태산이 알고 그렇게 말해 왔던 것이다.
베토벤이 그의 고백을 들었냐고 말이다.
‘베토벤도 응답했어……. 그분은 나를 사랑하고 계셔!’
신의 계시 같은 천상의 환희.
은여현은 장태산의 피아노 연주 속에서 자신에게 속삭이는 베토벤의 고백을 들었다.
“앵콜! 앵콜! 앵콜! 앵콜! 앵콜!”
그러는 사이 주변 사방에서 앙코르 연주 요청이 쇄도했다.
돈을 받고 펼쳐지는 연주가 아니었지만 청중들은 더없이 환호하고 열광했다.
스윽.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들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장태산.
그리고 그는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띠딩!
다시 울리는 정중한 화음의 시작.
띠디디디디디딩 띵~♬.
거침없이 장태산의 손이 화려하고 거세게 건반 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오빠…….’
주아는 수많은 예술대생 앞에서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오빠를 보고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쿵쿵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저렇게 멋진 남자가 우리 오빠라고 외치고 싶었다.
미대에 들어와서야 주아는 오빠의 미친 존재감을 확인했다.
자존심 강한 미대 교수들이 모두 다 오빠를 미친 천재라고 말하며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오빠 집 거실에 널려 있는 그림들은 모두 다 대가의 그림들이었다.
그걸 흉내 내며 발전해 온 주아는 오빠를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 오빠가 음악에도 엄청난 재능을 보였다.
가끔 오빠 집 열린 창문을 통해 아래층까지 퍼져가는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는 전문 오케스트라가 주는 감동을 뛰어넘었다.
아직도 불가사의였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는 오빠였다.
그러나 지금의 오빠는 마에스트로 그 자체였다.
강의를 듣던 중 열린 창을 통해 들려온 천상의 화음.
미대 친구들이 피아노 소리에 홀린 듯 모두 뛰쳐나갔다.
고단한 미대생을 위해 하늘에서 선물한 음계의 꽃비 같았다.
듣는 모두가 다 가을 감성에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저마다 느끼는 감정의 색깔은 다르겠지만 주아는 맑은 블루를 봤다.
듣는 것만으로 청아해지는 블루의 색깔과 맛.
따단 따다다단~♫.
피아노 소리가 경쾌한 재즈풍으로 바뀌었다.
어깨가 절로 들썩거려졌다.
“와아아아아아아!”
찌들었던 일상에서 탈출한 예술대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주아 역시 목을 열고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방방 뛰고 싶었다.
아니 흥을 좀 아는 학생들은 이미 무대 앞으로 달려 나가 몸을 흔들었다.
퇴폐적이고 끈적이는 클럽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초등학교 시절 동요에도 행복했던 순수한 소년 소녀처럼 밝은 햇살 아래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영화에서 보던 그들만의 축제 같은 풍경.
“주아야! 우리도 나가자!”
친구가 손을 잡아끌며 무대로 이끌었다.
“응!”
주아는 친구 손에 이끌려 함께 무대 가까이 달려 나갔다.
딴딴딴딴딴딴~♬ 따라라라라라라~♫.
경쾌하게 예술대에 울려 퍼지는 맑은 피아노 소리.
예고 없이 펼쳐진 가을날의 카니발이었다.
***
- 보스……. 정말 대단하십니다!
로버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뭐가 말입니까?”
- 선물 시장이 보스 예측대로 정확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일 가격이 대폭락 뒤 엄청난 상승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배럴당 145달러에서 25달러까지 수직 낙하할 것이라고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보스는 폭락 뒤에 상승에 배팅해서……. 진정 보스는…… 신이십니다!
죽은 자들 중심으로 신을 기준 한다면 나도 신이 맞다.
그것도 주식을 비롯해 선물 동향을 꿰뚫고 있는 전공자였다.
내 계좌와 달리 로버트 계좌는 합법적이었다.
금융 위기로 폭락하던 원유는 바닥을 찍고 1년 만에 배럴당 80달러 고지를 탈환했다.
잠시 숨고르기가 진행되는 중이었지만 곧 100달러를 뚫게 된다.
선물 널뛰기판에서 방향성을 모르고 배팅했던 투자자들은 하루아침에 쪽박을 찼다.
지금처럼 세계적 경제 위기가 아니었다면 절대 맛볼 수 없는 투기판이 벌어졌다.
돈을 쓸어 담았다.
로버트 라이언이 신이라 말하는 게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오일 가격이 상승함과 동시에 세계 경기도 기지개를 켰다.
각종 선물 지표들이 무섭게 상승했다.
상승에 배팅했던 선물 포지션에서 엄청난 수익이 났다.
“비행기는 준비됐습니까?”
- 휴가 계획에 맞춰 새로 구입한 녀석을 보냈습니다. 오늘 저녁쯤 도착할 예정입니다.
최신형으로 한 대 더 구입했다.
보는 눈이 많아 내 비행기를 내 비행기라고 말도 못했다.
이렇게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사용했다.
추석이 됐다.
학교에서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예술대에서 베토벤의 연인을 봤다.
세상에…….
베토벤이 지상에 강림했다.
그동안 포인트 많이 축적한 베토벤이 은여현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처음에는 변태인 줄 알았다.
베토벤이 인간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다 은여현과 베토벤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인연의 실을 보았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전생부터 서로 사랑했던 연인 사이였다.
베토벤이 베토벤이 아니었던 시절일 수도 있었다.
수많은 환생을 거듭하며 인간의 삶을 살아왔던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만났을 두 인연.
불멸의 인연이었다.
축복을 빌어주었다.
다른 여성들은 나를 보고 반했지만 은여현의 눈빛은 담백했다.
나를 이성으로 바라보지 않는 많지 않은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물었다.
베토벤의 고백을 들었냐고.
은여현은 모든 걸 들었다고 고백했다.
베토벤을 대신해 사랑한다는 말도 전했다.
그녀도 베토벤을 사랑한다고 답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나는 모든 게 이해가 갔다.
은여현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업에 의해 감춰져 있던 베토벤의 운명 같은 사랑.
이 생에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봤다.
나 같은 매개체가 없어도 이미 음악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갈 것이다.
베토벤이 넘겨 준 악보는 앞으로 나와 은여현만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베토벤이 그녀를 축복했다.
나도 카르마 포인트를 투자해줬다.
다른 음악신들 중에서도 베토벤과 나는 인연이 깊었다.
은여현의 탁한 전생의 업들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맑게 깨어나는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
그녀 앞에 뮤즈의 신들이 나팔을 불며 축하하는 환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장주시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이 가기 전에 한 번 보도록 하죠.”
- 보스가 명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가겠습니다.
“한국은 지금 추수감사절 같은 휴가 기간입니다. 참아주십시오~.”
- 보고 싶습니다. 보스…….
이 아재 약발 떨어진 것 같다.
뭔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떤 간절함이 스마트폰을 타고 전달 됐다.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군요.”
- …….
로버트가 침묵했다.
돈 많은 월가의 이혼남은 더 없이 매력적인 상품임에 틀림없다.
“그럼 조금 더 일찍 볼까요?”
- 보스! 보스는 진정 저의 보스이십니다!
속이 빤히 보이는 로버트의 아부가 싫지 않았다.
내가 뿌린 마사지 밑밥을 잘도 물고 파닥거렸다.
로버트와 같이 휴가를 보내게 될 것 같았다.
군대 문제로 주변 대부분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가지 못했다.
추석 성묘를 끝내고 회사 직원들을 비롯해 쌍둥이들과 휴양지로 여행을 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지역 유지가 된 부모님은 손님 접대로 연일 바빴기에 열외됐다.
농한기인 겨울에 오붓하게 두 분을 여행 보내드리면 되니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비행기 표를 비롯해 일체 모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은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내 소유인 팰튼 호텔에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돈이 샘물처럼 넘치니 참 좋다.
“휴가 같이 가죠.”
- 보, 보스!!!
“로버트와 휴가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신의 축복을 받을 겁니다! 보스!
휴가 같이 가자는 한 마디에 로버트는 신의 축복까지 언급했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죠.”
-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세팅해 놓겠습니다.
월가의 거물이 준비하는 휴가.
애도 아니고 로버트는 몹시 들떴다.
통화가 끝났다.
“오빠! 준비 다 됐어!”
주희의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쌍둥이들을 챙기지 못했다.
연수원에 들어가면 2년 동안 매인 몸이 되어 더 챙기지 못할 것이다.
그 전에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쌍둥이들도 고학년이 되면 얼굴 볼 기회가 적어질 게 빤했다.
아쉬웠다.
나도 이런 기분이 드는데 부모님은 더할 것이다.
부모님이 쓸쓸해하시는 모습을 요즘 자주 보았다.
장성한 자식들이 떠난 집은 비어버린 겨울 제비집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전에 가족들과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었다.
“지금 간다.”
집안은 지금 웃음이 넘쳤다.
친척들이 사방에서 찾아왔다.
아버지에게는 인심을 쓸 수 있도록 넉넉하게 용돈을 드렸다.
요즘 들어 장 씨 집안이 제대로 운영됐다.
돈이란 것은 불가능한 많은 것을 가능케 만드는 마술 재료였다.
사랑~ 그 어떤 무엇보다 사랑~♬.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것도 02로 시작되는 서울발 국내 전화.
“???”
추석 전에 주변 사람들과는 인사를 대충 끝냈다.
수십 통이 넘게 중요 인사들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번호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스팸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스팸을 날리는 이들도 추석 대명절에는 쉬어갔다.
띠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십니까?”
정중하게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 …….
답이 없었다.
“???”
- ……하.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니었다.
참았던 숨인 것 같았다.
“누구……!”
장난 전화는 확실히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는 그 누구.
다시 정체를 묻던 그 순간.
갑자기 심장 한쪽이 짜르르 전기가 통하듯 아파왔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먼 공간을 달리해 떨어져 있었지만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녀의 기운.
“하아…….”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