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2
회귀의 전설
502장. 너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와아아아아! 서련 선배님이다!!!”
“예린 선배님!”
장 씨 집안 쌍둥이가 서련과 예린을 보고 난리가 났다.
둘 다 장주여고의 전설이었다.
동시에 이예린은 한국대 선배였다.
“어머님. 저 왔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도도희가 안면 있는 주설란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잡았다.
지금은 11시가 다 된 늦은 밤.
오랜만에 내려오는 장태산을 기다리며 장 씨 집안은 평안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견치 못한 손님들이 등장했다.
“어서 와요……. 도희 양.”
주설란은 아들 회사에서 몇 번 얼굴을 봤던 도도희를 반갑게 맞이했다.
본래 오늘은 아들의 제대 기념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본가에 내려오던 아들은 친구들에게 잡혔다는 소식만 줬다.
고향에 오면 으레 친구들을 만나 늦거나 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며칠 동안 본가에서 머문다 했었기에 욕심을 내려놨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세 명이나 되는 미모의 여성과 들이닥친 아들.
‘태산이 이 녀석…….’
오정 그룹 막내딸 임윤아가 떠올랐다.
여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홍콩 미녀 클라라와의 인연도 있었다.
성인이 된 아들에게 이제 와서 뭐라고 충고할 말도 없었다.
인생은 각자 사는 거라고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 와서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남녀 사이는 특히 두 사람의 문제였다.
한눈에 봐도 함께 온 여자들이 아들을 좋아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런 그림이 나온 것을 두고 아들만 탓할 수도 없었다.
“엄마~ FOB 메인 센터인 서련이 언니 알지?”
장주아가 서련을 소개했다.
“응……. 알지.”
지금 잘나가는 걸그룹 중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서련을 모를 리 없었다.
한눈에 봐도 광채가 달랐다.
“어머니 뵙고 싶었습니다. 서련이라고 합니다.”
서련은 예의를 다해 인사를 했다.
며느리 후보감 면접 보는 자리도 아닌데 서련은 잔뜩 긴장했다.
“반가워요.”
주설란은 품위를 잃지 않았다.
곱게 미소를 지으며 서련의 인사를 받았다.
“엄마. 여기 이분은 장주여고 이예린 선배님. 오빠 법대 선배님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이예린입니다.”
주희가 나서서 예린을 챙겼다.
이예린 또한 주설란 눈에 참하고 고와 보였다.
모두 다 개성이 있는 미모의 여성들이었다.
“누구야? 손님들 왔어?”
그때 밖에서 장 씨 집안의 가장인 장대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
장대국은 생각지 못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방학이라고 서울에서 내려온 쌍둥이들 말고도 젊은 여성이 셋이나 더 있었다.
거나하게 약주를 한잔하고 들어오던 장대국은 멀뚱멀뚱 눈만 껌벅거렸다.
잘난 아들 덕분에 면을 떠나 장주시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영농회장이 아니라 진짜 대기업 회장처럼 곳곳에서 대우를 받았다.
시장도 장대국이 시청에 가는 날이면 재깍 달려 나왔다.
오늘도 친분 있는 이장들과 한잔하고 들어오던 장대국.
선녀 같은 세 미녀가 왜 집안에 있는지 이해 못했다.
“아버님~ 이제 오셨어요~”
TV에서 많이 보던 처자가 웃으며 아버님이라고 인사를 해왔다.
“시원한 물 한 잔 드릴까요?”
도도해 보이는 도시 미녀가 물을 대령할까 하고 물어왔다.
그에 반해 참해 보이는 미녀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그 다음 순간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아들.
‘태산이 저 자식……. 나를 닮아가지고~ 큼.’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때도 주변에서 난리도 아니었다.
아내 주설란의 미모는 친구들 와이프들 중에 탑이었다.
아들도 다르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다들 태산이에게 호감이 많아 보이는 눈빛들이었다.
장대국은 술이 확 깼다.
“다들 반가워요.”
이런 일 몇 번 겪어본 경험이 있다 보니 당황하는 순간은 잠시였다.
장대국이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
에어컨이 켜져 있는 시원한 거실은 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시원한 바람 대신 어색한 분위기가 구석구석 돌았다.
“아버님……. 약주 한 잔 더 하시겠어요?”
도도희가 눈치 빠르게 나갔다.
“그럴까…… 요?”
장대국은 함부로 말을 안 놓았다.
누구든 이 중에서 나중에 며느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심 긴장했다.
“술상 봐올 테니 다들 편하게 쉬고 있어요.”
주설란도 내심 이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쌍둥이도 나가서 생활하고 있어 저택은 늘 고요했다.
자식들이 떠난 자리가 텅 빈 게 확실히 표가 났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씩은 재단이나 갤러리 때문에 서울로 출근하지만 바쁜 아들 보기는 힘들었다.
그 적적한 집에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온 아들과 반가운 손님들.
집안이 오랜만에 북적거렸다.
“어머니~ 저도 도울게요.”
싹싹한 서련이 주설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보기보다 솜씨가 좋아요~.”
도도희도 경쟁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갔다.
스윽.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이예린은 말없이 조용히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집안에 활기가 넘치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
“하아…….”
술자리는 새벽 2시가 돼서야 끝났다.
1차로 고향 친구들과 만나서 거하게 마셨다.
미녀 셋이 무리에 끼자 동창 녀석들 모두 정신줄을 놓았다.
게다가 서련은 요즘 가장 잘나가는 걸그룹의 센터 메인이었다.
거기에 더해 쌍벽을 이루는 예린 선배와 도도희가 또 한몫 했다.
당장 내일부터 눈 뜨면 친구들은 구운몽에 나오는 성진처럼 인생무상을 맛볼 것이다.
연예인 급에 가까운 미녀들과 술자리를 즐긴 후유증이 생각보다 심각할 게 뻔했다.
앞으로 꽤 오랫동안 장주시의 모든 여성들이 눈에 안 들어올 것이다.
그런 후일의 사태를 모르고 좋다고 불나방처럼 각종 게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노래방에서 서련이 불러준 노래를 듣다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놈도 나타났다.
소문이 쫙 돌아 야간 알바를 하던 놈들까지 모여들었다.
막판에는 20명이 넘어갔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열광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녀석들과 진한 시간을 보내고 본가로 왔다.
몇 잔 마신 술은 가볍게 내공으로 모두 희석해 버렸다.
본가에 도착한 뒤 마주한 상황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 진행됐다.
아버지가 등장하자마자 술판이 벌어졌다.
어머니표 제육볶음과 소시지야채볶음을 비롯해 먹음직스러운 안주로 한 상 차려졌다.
빠질 수 없는 내가 제조한 소맥이 몇 바퀴 돌았다.
쌍둥이들까지 가세했다.
주거니 받거니 아버님, 어머님, 언니, 동생 소리에 웃음이 더해졌다.
그 사이에도 빠지지 않고 오가던 여자들의 눈치 게임.
아버지만 오늘 개 탔다.
애교 많은 미인들 공세에 함박웃음을 연속 터트렸다.
“내일도 비가 오려나…….”
따로 마련된 게스트 룸으로 세 명의 여인이 사라졌다.
술자리를 다 치우고 나 홀로 밖으로 나왔다.
더위가 절정인 계절이었지만 시골의 깊은 새벽 공기는 선선했다.
주변에 가득한 신선한 공기에서 벌써 촉촉한 가을 냄새가 맡아졌다.
마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공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년 후 들어서게 될 나의 성.
저 아득히 먼 산맥에서 발원해 이곳에서 머물게 될 산맥의 종착지.
아른아른한 서기가 공사장 주변을 감쌌다.
오로지 내 눈에만 보였다.
명당은 하늘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법이다.
“기반 공사는 얼추 끝났고…….”
주 설계 도면을 내가 만들었기에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했다.
천천히 건축하더라도 완벽을 기하라는 명을 충실히 따랐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면대로 시공이 되고 있었다.
군주남면(君主南面)의 이치에 따라 방향이 잡혔다.
동쪽 양택을 낮추고 서쪽을 높였다.
들어설 건물의 중요도에 따라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의 서열이 정해졌다.
저벅저벅.
그때 누군가 랜턴을 들고 공사장을 돌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누구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어르신, 아직 새벽이 깊은데 무슨 일이십니까?”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 장 대표 아닌가. 언제 내려왔어?”
윤용곤 대목장이었다.
날이 밝으려면 멀었지만 얼굴에는 이미 하루치의 활기가 넘쳤다.
“조금 전에 왔습니다.”
“안 쉬고 나왔어? 서울에 두고 온 애인 생각이라도 난 거야?”
대목장이 농을 걸어왔다.
“대목장 어르신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자식들 잘 있나 나와 봤지. 다른 놈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여기 이놈들이 자식이야. 그것도 이 생에는 더 만날 수 없는 가장 큰 자식.”
아직 제대로 된 건물이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대목장은 이미 눈앞에 건물이 다 선 듯 꿈을 꿨다.
농부에게는 쌀이 자식이고 건축가에게는 건물이 자식일 테니 그럴 만했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아직 찬 이슬 맞았다고 입 돌아갈 나이 아냐. 그리고 내일도 비가 올 건데 어디 손볼 곳 없나 살펴봐야지. 손을 타고 정성이 들어가야 건물도 튼튼한 법이야.”
대목장의 고집이 느꼈다.
고마웠다.
“기초는 완벽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기초와 뼈대가 튼튼한 놈이 천년을 가는 법! 여기는 걱정 말고 사업이나 잘해. 괜히 건축비 떨어졌다고 짓다 말면……. 나 화병에 죽어버릴 것이야.”
협박 아닌 협박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장인들이 만들어 낸 창조물들의 가치는 이런 것이다.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 정성으로 일궈낸 작품이었다.
“내일 저녁에 시간 비워놓으십시오.”
“알았네. 비 오는 날에는 파전에 막걸리가 제격이지. 큼큼.”
안주와 술까지 정해주는 윤용곤 대목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울 곳이 이곳이라는 걸 대목장은 알고 있었다.
규모와 자금, 지원 되는 재료는 왕궁 건설 급이었다.
후에도 전에도 이런 한옥 건축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 나 먼저 가네. 아직 둘러볼 곳이 많아.”
“수고하십시오.”
대목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네도 수고하게~.”
랜턴을 들고 대목장은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씨큐리티에서 파견한 경호원들이 곳곳에서 경비를 보기 때문에 안심했다.
“내일 돼지 좀 잡아볼까~.”
잔치에 막걸리에 파전, 그리고 수육이 빠지면 섭한 법이다.
쉬는 날 잘 먹으면 그게 다 건축물에 기로 발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언제 내가 오늘 같은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몰랐다.
2010년 가을도 바쁠 건 확실했다.
훈련소 나온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런저런 사건이 많았다.
삼룡 건으로 인해 정치권에 적을 하나 더 만들었다.
“X바…… 신이 그 시바 신이겠지.”
힌두교인들이 추앙하는 최고신이 나에게 축복을 내렸다.
인도와의 관계에 조만간 접점이 있을 것 같았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다.
짱개와 으르렁대는 인도야말로 친구로서 관계 맺기에 제격이었다.
인구도 엄청났고 앞으로 미래 경쟁 사회의 주 무대 시장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는 나라 살림 규모가 작았지만 점점 옛 영광의 힘을 찾아가는 인도.
시바 신의 축복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가교 역할 톡톡히 할 것 같았다.
우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스마트폰에서 기본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각에 날 찾을 수 있는 이.
액정화면에 저장된 한 남자의 이름이 떴다.
틱.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친구~. 나야 나~.
나이도 많은 그가 서슴없이 나를 친구라 불렀다.
“잘 지내셨죠?”
- 내가 오정 놈들 때문에 머리가 아파! 이 얌체 같은 놈들이 내 회심의 역작에 상처를 냈어! 가만 두지 않겠어! 내 가진 바 모든 돈과 힘을 이용해 박살을 낼 거야!
세상에 알려진 바대로 그의 성격은 거침이 없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황소처럼 길길이 날 뛰는 스티븐 메튜.
“몸 상합니다. 살살 하십시오. 그게 그렇게 몸을 헤칠 정도로 분노할 일입니까?”
- ……나 아픈 거 알고 있었어?
목소리가 한풀 꺾인 남자.
그가 세상에서 숨 쉴 날은 겨우 1년만 남아 있었다.
“……Treasure love for your family, Love for your spouse, Love for your friends…… Treat yourself well, Cherish others…….”
분노하는 그에게 미래에 그가 남기고 떠났던 그의 마지막 유언을 들려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침묵.
스티븐과 나는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 서로의 숨소리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