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8화 (497/1,284)

 # 498

회귀의 전설

498장. 저안저견 불안불견(猪眼猪見 佛眼佛見) (2)

‘욕심 많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라……. 하아.’

노조위원장 강일권은 장태산의 일갈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강일권도 세계 자동차 시장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걸 잘 알았다.

90년대 초반 입사할 당시부터 삼룡차 입지는 이미 좁았다.

그랬던 회사가 망해가면서 인력을 조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잘려 나가는 걸 보면서 모른 척한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하고 지금 남은 건 비참하게도 항복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구세주.

미국 자본 사모펀드 컨소시엄이 인수를 요청했다.

감정적으로 들떴던 건 사실이다.

삼룡에 아직 매력이 남아 있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물에 빠진 삼룡 자동차 노조원들을 구해준 게 분명했음에도 욕심을 부렸다.

말도 안 되는 손해배상에 더한 조건을 내걸려고까지 했다.

수석부위원장 정성동은 다소 멍청하고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거칠었다.

대한노총 금속노조 상임 직원들과 어울리면서 문제가 더 생겼다.

강일권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장태산을 다시 살펴봤다.

‘하늘이 보내준 동아줄…….’

노조원들 뒤에 딸린 식솔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무만 보고 정작 숲은 생각지 못했다.

파업 할 때마다 지역 주민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던 게 떠올랐다.

당시에는 정당하다 생각하고 행동했던 일들.

하지만 회사가 망하고 나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동료들이 위원장인 자신을 바라봤다.

여기서 어떤 결단이든 내려야 했다.

장태산이 말했듯 사나운 사자 같은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의 기로였다.

그때 아침에 자신에게 힘내라고 안아주며 말하던 아내의 근심 가득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학교 가기 바빠 정신없이 집을 나서던 초등학교 쌍둥이들의 모습도 스쳤다.

가정이 엉망이 돼버린 옆집도 떠올랐다.

강일권은 두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꽃.

아직 식지 않은 자존심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스윽 손으로 머리띠를 풀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어설픈 짓거리였다.

머리띠 맨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감았던 눈을 뜨며 강일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투자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약속 시간에 늦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투자자 실무진들을 상대로 거친 언행을 뱉은 점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위, 위원장님!!!”

자존심 세기로 소문난 정성동이 강일권을 불렀다.

“이건 아니죠! 왜 우리가 고개를 숙여야 합니까! 저들은 철저하게 천박한 자본주의 사상에 물든 점령군일 뿐입니다! 우리는 더 투쟁해야 합니다! 그래서…….”

“뭘 더 얻어내려고? 그만해! 천막 안에서 모기에 피 빨리는 동료들 보기 안 부끄러워?”

강일권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정성동을 바라봤다.

파르르 흔들리는 정성동의 눈동자.

“……자본에 농락당한 더러운 조직의 배신자! 당신은 이제 위원장도 아냐!”

우당탕.

정성동은 손가락으로 강일권을 가리키며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하지만 나머지 노조 위원들은 강일권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

거친 소리를 내지르는 정성동.

“이 배신자 새끼들 모두 다 똑똑히 기억하겠어! 모조리!”

콰앙!

악에 받친 독한 말을 내뱉고 회의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 버렸다.

“…….”

조용히 내려앉는 적막.

“저 또한 감정에 휘말려 격한 말로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장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죠.”

서로 사과를 주고받고 나자 곧바로 협상을 주도하기 시작한 장태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버린 정성동에 대해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먼저 투자자들은 2009년과 올해 정리해고 됐던 직원들에 대한 복직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복직? 웃기는 새끼네.’

장태산의 말을 듣던 임유일은 속으로 비웃음을 토했다.

자동차 공장이 재가동 돼도 막상 차를 팔 곳이 없었다.

국민들 신뢰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오래된 디자인과 구린 내장재로 소비자들을 다시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동시에 인수 후 디자인팀과 연구직에 대한 신입 및 경력직 영입을 추진하겠습니다. 과거와 다른 임금체계로 그들에 대해 혜택을 확대할 생각입니다.”

“……임금 체계는 그대로 유지됩니까?”

“법으로 정한 원칙에 근거하여 과도한 연봉에 대해서는 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직원 복지 차원에서 지원됐던 직원 할인은 대대적으로 손을 볼 겁니다. 3년 기간 동안 차 한 대 기준으로 1년 이상 10년 이하 직원은 5% 할인, 20년 차까지는 10% 그 이상 재직한 직원에게는 20% 할인율을 적용할 예정입니다.”

“그건……. 직원들 사기에 별로 좋지 않은 조치입니다. 1년이 아니라 3년이라뇨!”

위원들 중 하나가 강하게 반발했다.

“소비자에게 좋은 일입니다. 자동차 메이커의 평판 유지는 중고차 값으로 결정됩니다. 지금껏 삼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중고차 값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연대 자동차는 중고차값 하락이 심하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삼룡은 큰 폭의 중고차 값 하락이 발생합니다. 제품 품질도 문제지만 직원들이 과도한 할인을 받아 구입한 자동차가 1년 뒤에 시장에 풀리는 이유도 한몫 합니다. 소비자들은 여러분들 생각만큼 바보가 아닙니다.”

장태산의 말은 거침이 없고 과감했다.

“…….”

부정할 수 없는 팩트에 노조 위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새 차를 구입해 1년 동안 운행하다 중고로 팔아도 남는 장사를 해왔던 건 사실이다.

최대 30% 할인을 받아 운행하다 팔아도 용돈을 쏠쏠하게 벌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겠다고 말하는 투자자.

“동시에 기존에 있던 야간 철야 작업도 폐지합니다. 생산직은 1일 2교대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기본 8시간 근무에 2시간 연장 근무가 최대입니다.”

“헛!”

노조 위원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야간 근무와 철야 근무 수당은 무시 못할 만큼 쏠쏠했다.

그런데 그것도 사전에 막겠다고 말하는 투자자 대리인이었다.

“그렇게 되면 직원들 임금 보전에 문제가 따릅니다. 본봉이 낮아 생활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동반됩니다. 준 수도권 내 주거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강일권이 지금 당장 떠오르는 문제점을 나열하려는 순간.

“직원들에게 복지 차원에서 아파트를 지원할 생각입니다.”

“네? 아, 아파트요?”

“!!!”

위원들은 지금 귀로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자자 대리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과거 IMF 전에는 잘나가는 대기업에서 주거 시설을 제공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복지였다.

“입사 1년 차 이상 독신은 15평, 신혼부부와 3인 가족은 25평, 4인 가족 이상은 32평을 회사에서 무상 지원할 겁니다.”

“퇴사하게 되면 반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직하지 않고 20년 이상 장기 근속한 자에게는 소유권을 이전해 줄 생각입니다. 단, 투자자 인수 후 10년 후부터 적용될 조건임을 감안하십시오.”

“!!!”

꿈에서나 가능한 엄청난 복지 지원이었다.

생활비가 빠듯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대부분 주거비용이 높기 때문이었다.

1년마다 집값과 전셋값이 폭등했다.

정해진 월급 받아서 빠듯하게 생활하는 직원들에게는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잠재된 공포를 싹수부터 잘라버리겠다는 투자자 대리인.

분명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맞았다.

“직원 자녀들에게는 대학까지 무상 학비 지원도 가능합니다. 단, 평균 B+학점이 유지될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천사의 선물은 계속됐다.

공부하는 직원 자녀에게만 학비를 지원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아무리 일감이 많아도 주 5일 근무를 정착시킬 겁니다. 동시에 자기 개발에 대한 지원비도 복지 차원에서 지급할 생각입니다.”

“흐음…….”

이건 복지 차원을 넘어 무한 혜택에 가까울 만큼 파격적인 플랜이었다.

오로지 회사 일을 내 일처럼만 일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당근만 내놓고 바라는 게 없을 리 없었다.

“앞으로 단체교섭 협의는 미국과 비슷하게 최소 4년마다 진행할 생각입니다.”

“네?”

장태산의 느닷없는 선언에 노사위원들의 안색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1년마다 단체교섭을 핑계로 보너스나 휴가비용을 얻어 냈었다.

그 일이 대규모 노동조합의 가장 큰 일 년 일과였다.

회사 임원들에 대해 노조가 무르지 않다는 걸 단체교섭을 통해 보여 왔었다.

법에도 그에 따른 규정이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건달도 아닌데 회사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삥을 얼마나 더 많이 뜯어내느냐가 그 노조의 실력으로 인정됐다.

부정할 수 없는 악습이었다.

그런데 투자자 대리인은 그런 과정 자체를 원천봉쇄했다.

“왜 이 조항이 불만이십니까?”

“다른 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하지만 노사 단체협약은 법규대로 행사할 수 있는 노동자들만의 권리입니다. 그걸 뺀다는 건 부당합니다.”

강일권 위원장이 납득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 월급은 물가상승률에 연동되어 자동 반영될 겁니다. 보너스 대신 연봉이 상향될 겁니다. 그리고 회사에 순이익이 발생하면 10% 이상 투자자 회의를 거쳐 특별 보너스가 나갈 겁니다. 적자 시에는 기본 보너스만 지급됩니다. 투자자들은 봉이 아닙니다. 그 이상 요구하면서 무리하게 쟁의행위를 발생시킨다면……. 국내외 모든 로펌을 이용해 손해배상을 비롯해 그 동안 지급했던 복지를 회수할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전달하는 바입니다. 그 또한 법규에 명시된 회사의 권리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확실히 못을 박는 투자자 대리인.

꿀꺽.

다시 한 번 회의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장태산이 내뱉은 모든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걸 모두 알았다.

“확실히 말씀 드리지만 삼룡 인수는 사실 노조 측 입장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 망해버린 회사는 채권은행들과의 협약으로 끝낸다는 걸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기 위해 참여시켰습니다. 그 점을 참고해 주십시오. 조금 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정성동 씨는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를 저버렸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회사에서 볼 일이 없을 거라는 걸 확인시켜드립니다.”

장태산의 일방적인 통보는 계속 됐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결단의 시간.

강일권을 비롯해 노조위원들은 장태산이 제시한 모든 내용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 이상의 긍정적인 제안을 어디서 받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따지고 보면 나쁜 조건은 없었다.

문제는 그놈의 자존심.

“……노조원들에게 통보해서 찬반 투표를 거치겠습니다.”

강일권은 다시 한 번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라면 90% 이상 압도적으로 찬성할 게 뻔했다.

“투자자 측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임명한 정당한 법정관리인으로서 오늘 회의는 그렇게 유의미한 협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투자 인수 대금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투자자 측이 제시한 조건들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노조와의 협약은 그렇다 치더라도 채권자들과의 협약도 거쳐야 할 필요합니다.”

임유일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피며 어깃장을 놨다.

만약 이대로 계약이 체결된다면 메커리로부터 받기로 약속된 20억 보너스가 날아갈 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권 눈 밖에 나서 다음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협상 중인 투투자동차의 인수가격은 5000억이 맥스였다.

그 금액 중 상당액도 국내 은행에서 조달하겠다고 제시했다.

자기 돈 몇 푼 안 들이고 SUV와 대형 세단에 대한 기술 노하우를 가져가겠다는 심보였다.

그런 마당에 장태산이 초를 제대로 쳤다.

폼을 보아하니 노조는 장태산의 말에 완전히 넘어갔다.

누가 들어도 기대 이상의 호조건이었다.

대략적인 복지 비용으로 1조 이상 투입될 내용이었다.

수도권이라 땅값도 만만치 않았다.

‘저 자식 마음에 안 들어. 윗선을 움직여 확실히 털어버려야겠어.’

모든 내용을 듣고만 있던 임유일은 장태산을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다.

윗선에 보고하고 눈앞에서 치워버리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뭐가 문제일까요?”

장태산이 웃으며 물어왔다.

“현재 삼룡차 회생채무가 7000억이 넘어갑니다. 그 자금에 더해 구조조정 명목으로 차입한 신규 차입급이 1000억, 의무이행금을 비롯해 각종 채무도 남았습니다. 출자전환을 통해 상당한 손실을 입은 채권단을 만족시킬 만한 조건을 제시해야…….”

“빚 다 털어 줄 겁니다. 그것도 국내 자본에 의지하지 않고 말입니다.”

“!!!”

빚을 털어낸다는 말에 임유일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보통 투자자들은 채권단과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 게 일반적인 협장 전략이었다.

“돈 몇 푼 하지도 않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주식도 채권단이 70% 소유하고 있죠? 그것도 시장가로 매입하겠습니다. 망한 회사 주식 값 해봐야 수천억밖에 더 하겠습니까!”

‘저 새끼 뭐야!’

임유일은 수천억을 간식비 정도 되는 양 언급하는 장태산을 어이가 없어 빤히 쳐다봤다.

이 정도면 투투자동차와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인수 조건이었다.

채권단 모두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도 남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임유일.

“법정관리인은 머리 그만 굴려요. 이곳 삼룡 자산은 어설프게 팔아먹을 매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자산입니다! 돈 몇 푼에 팔아먹을 생각 집어치우라고……. 장만수 장관에게 전하세요, 그리고 그 윗선에도 내 이름 말하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겁니다.”

“흐꾹……. 흐꾹.”

다시 터진 임유일의 딸꾹질.

장태산은 모든 정황과 진실을 꿰뚫고 있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고 무서워지는 어린 놈.

임유일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짓는 모습은 더욱 소름끼쳤다.

그 모습을 보며 임유일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저놈은 자신이 상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 그 누구도 만만히 상대할 수 없는 흉악한 괴물이 확실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