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3
회귀의 전설
493장. 전설의 훈련병 (2)
“자애로운 모든 이들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시여……. 불쌍한 훈련병들을 위해 간식을 허락하소서.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긍휼히 여기사 자비로 보살피어 주시옵소서……. 부족한 딸이 간절히 원하옵니다.”
육군 훈련소에 위치한 천주교 성당에서 한 수녀가 눈물을 흘리며 성모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시집은 가지 않았지만 집에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훈련병들을 볼 때마다 크리스티나 수녀는 동생이 떠올랐다.
국가에서 지원되는 비용으로는 훈련병들 간식비를 대는 데 어림없었다.
교구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성도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보내오지만 배고픈 훈련병들의 허기를 채워주기에는 늘 부족했다.
요즘 들어 부쩍 신도 수가 늘어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수녀도 익히 알고 있었던 쫓겨난 소장의 행태 때문에 훈련병들이 더 배가 고파졌다.
신을 찾는 것까지는 좋은 일이었지만 배고픔이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지금은 한여름.
훈련병들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초코파이 한 개에 눈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요즘은 기도 제목까지 정하고 크리스티나 수녀는 정진했다.
배고픈 훈련병들이 간식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달라고 매달려 보는 것이다.
타다다닥.
그때 급하게 성당으로 한 수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장엄하고 정숙해야 할 장소임을 모를 리 없는 수녀의 발걸음이 토끼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크…… 리스티나.”
나이 지긋한 수녀가 크리스티나 수녀를 불렀다.
“아멘.”
급히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끝마친 크리스티나 수녀가 고개를 들었다.
“마리아 수녀님…….”
다름 아닌 성당 재무를 책임지고 있는 마리아 수녀였다.
“됐어요! 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크리스티나 자매의 기도를 성모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익명의 기부자가 크리스티나 수녀님께 감사하다며 10억을 보내왔습니다. 그 돈이면 훈련병들에게 초코파이를 넉넉하게 줄 수 있답니다!”
마리아 수녀가 크리스티나 수녀의 손을 붙잡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아!”
크리스티나 수녀는 이 같은 신의 응답에 탄성을 터트렸다.
기도에 응답하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성모와 성자의 은총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먹먹해졌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아는 분인가요? 도대체 누가 그런 거액을…….”
“이름이 없나요?”
“네~ 다만 크리스티나 수녀 이름 뒤에 ‘국제전화’라는 말만 적혀 있었습니다.”
“국, 국제전화요?”
국제전화라는 말에 떠오르는 한 명의 훈련병 얼굴.
언젠가 자신에게 핸드폰을 빌려 미국에 전화를 했던 훈련병이 있었다.
영어가 대단히 유창했다.
그리고 얼굴도 반듯하고 잘생겼던 멋진 훈련병.
주님을 모시는 종이 아니었다면 마음이 흔들렸을 정도로 훌륭한 외모를 가진 훈련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훈련병이 세례명을 물어봤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무심결에 세례명을 말해 주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아무리 달리 생각해 봐도 자신 앞으로 10억을 기부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성모시여…….”
크리스티나 수녀는 성호를 그으며 성모 마리아를 불렀다.
다시 만나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 훈련병의 이름도 몰랐다.
주말마다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훈련병들 중에 한 명이었다.
또로록.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하기만 한 이 순간.
크리스티나는 두 손을 모으며 신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
***
- 최상위 신이 당신의 행동에 감동해 카르마 포인트를 화끈하게 쏘셨습니다.
신들의 계산은 언제나 정확했다.
성당에 입금된 돈이 주인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절실하게 필요할 때 빌려 쓸 수 있었던 전화 한 통.
4주 인생뿐만 아니라 육군훈련소 훈련생들 모두의 추억을 바꿔놓았다.
포인트 수입이 생각 이상으로 짭짤했다.
그리고…….
“다시 보는군. 장태산 훈련병.”
“충성!”
소장실의 호출을 받았다.
용창호라는 돼지가 쫓겨나고 그 자리에 임시로 이인태 참모장이 앉았다.
마음에 드는 장군이었다.
병사들을 보는 시선이 일단 따뜻했다.
말 한 마디를 건네도 정이 담겨 있었다.
부식비 같은 비용을 손대지 않게 되면서 당장 음식질이 좋아졌다.
훈련복도 과거 내가 경험했던 수준으로 돌아왔다.
참모장은 인상도 좋았다.
강직한 무관의 상이었다.
관상 중에서도 중요한 귓불이 도톰해 인생 중반기를 넘으면서 귀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헤쳐 나갈 운명이었다.
“자리에 앉지. 시원하게 아이스커피 어때?”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전직 병장의 자세는 생이 반복되어도 어디 가지 않았다.
경례부터 시작해 모든 자세들이 내가 봐도 완벽했다.
“부관. 아이스 커피 둘 부탁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따라왔던 부관이 밖으로 나갔다.
회귀해서 살다 보니 별걸 다 경험하고 있었다.
장군 집무실이라 확실히 기운이 달랐다.
태극기와 육군훈련소를 상징하는 별과 빨간 검이 그려진 깃발이 장식되어 있었다.
크기는 일반 회사 임원급 사무실 크기 정도였다.
집무를 보는 원목 책상과 그 아래 10인용 소파가 놓여 있었다.
책장에는 여러 책을 비롯해 훈련소에 관한 상패가 가득 찼다.
별들이 노는 곳답게 품격이 넘쳤다.
“고맙다. 장태산 훈련병.”
“???”
각 잡고 앉아 있는 내게 참모장은 고맙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장태산 훈련병 덕분에 훈련소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인사였다.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별을 날리는 게 하고 싶은 일이었나?”
“네???”
“장태산 훈련병 덕분에 소장님이 명예퇴직한 건 아나?”
“…….”
나를 보며 짓궂게 묻는 참모장.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제 덕분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가 그러했을 뿐입니다. 전임 소장님 운세가 올해 구설수에 극관의 사주였음이 확실합니다!”
“극관의 사주? 관상도 볼 줄 아나?”
“넵!”
“……난 어떤가?”
“참모장님은 귀인을 만나 올해 진급하실 것 같습니다.”
“진급? 하하하하하하. 말이라도 고맙다.”
진급이라는 말에 호통하게 웃는 참모장.
믿지 못하는 눈치다.
지금 이 자리가 그의 면접 자리라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 된다면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약속하셨습니다.”
“물론이다.”
장군의 약속은 결코 가볍지 않은 법.
현직 장군에게 미래에 가서 받을 수 있는 약속 하나를 챙겼다.
“그건 그렇고 내일 퇴소식에서 장태산 훈련병을 훈련소 사단장 명의로 29연대 최우수 훈련병으로 표창할 생각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일반 훈련병이었다면 환장하다 못해 감사함으로 찬송가를 100번은 부를 내용이었지만 난 아니다.
최우수 훈련병은 훈련소 퇴소와 함께 4박 5일 휴가와 함께 대부분 논산 훈련소 자체로 차출 되는 게 관례였다.
그런 혜택 전혀 받고 싶지 않았다.
보충역들도 퇴소식 전날까지 떨어지는 낙엽을 조심하라는 속설이 있었다.
괜히 이런 곳에서 언론에 얼굴 알려지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졌다.
조용히 이름 없는 일반 보충역 훈련병들처럼 사라지기를 원했다.
“참모장님.”
“말하게.”
“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받고 싶지 않다고? 최우수표창은 2,500명의 훈련병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훈련병에게 전달되는 영예로운 상장이다. 그게 싫다는 건가?”
“네.”
“…….”
할 말을 잃고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이인태 참모장.
“알겠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더욱더 마음에 드는 참모장.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혹시 진급하게 되시면 대대장 한 분을 끌어 주십시오.”
“대대장? 누구? 훈련 대대장?”
“아닙니다. 1사단 소속 박성욱 중령님입니다.”
“어? 박 중령을 아나?”
내 말에 참모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서 물어왔다.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것도 인연인가? 박 중령은 과거 나와 함께 근무한 적 있는 장교다.”
“아!”
세상 참 좁았다.
내 친구 형철이의 대대장이면서 전생에서 나의 대대장님이었던 박성욱 중령.
별을 달았다는 얘기를 그 당시에 듣지 못했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실하지만 연줄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만약……. 진급하면 반드시 부르겠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관상 좋게 봐줘서 고맙다. 장태산 훈련병……. 세월이 지나가면 잊히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귀관을 전설의 훈련병이라 부른다더군.”
전설의 훈련병?
그건 됐고요.
빨리 국방부 시계가 돌아 내일 아침이 밝았으면 다른 소원이 없겠다.
유난히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 군대 시계.
전설의 훈련병 따위는 군견에게 던져주고 싶은 별명이었다.
“전설의 장태산 훈련병 수고했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악수를 건네 오는 이인태 참모장.
그의 따뜻한 손을 잡았다.
그는 정말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 악수 한 번으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
“누구야? 어떤 놈이야? 도대체 누가 뒤에서 조종했어? 남창승이야?”
국방부 장관실에서 장관진 장관이 불같이 화를 냈다.
해외에서 열리는 국산 방산물품 홍보차 일주일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건이 터졌다.
핵심 라인은 아니지만 소장급 장군이 비리 문제로 조사를 받았다.
흔적이 남아 구제도 어려웠다.
이를 갈고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퇴직 처리를 했다.
그리고 사건 파악을 지시했다.
“남창승 대장님도 연관이 있지만 다른 라인입니다.”
기무사령관이 진땀을 흘리며 보고 했다.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군대 핵심 보직 중 하나인 기무사령관도 장관진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대한민국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한 장관진.
“그럼 누구냐고! 감히 그딴 일로 부하들 자르면 누가 명을 받겠냐고!!!”
자기 라인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보호하는 장관진.
지금껏 그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한 번 자기 사람이 되면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끌고 보호했다.
그걸 믿고 후배들이 끊임없이 따랐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주한미군 벨 사령관입니다.”
“뭐, 뭐라고! 벨 사령관?”
장관진은 생각지 못한 이름 앞에 화들짝 놀라며 말까지 더듬었다.
대통령을 제외한 최측근도 장관진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관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자였다.
당연히 장관진도 그 이름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벨 사령관과 친분이 있는 훈련병이 있습니다. 그 훈련병을 만나러 갔다가 용창호 소장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벨 사령관이 일개 훈련병을 만나러 육군훈련소에 갔다고?”
“그것까지는 파악 못했습니다. 벨 사령관이 연합사 부사령관님과 후방 관할인 2작사 유재홍 대장님을 직접 동행 요구했다고 합니다.”
“미친! 이건 월권이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장관진을 비롯해 누구도 그의 행보를 두고 월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시작전통제권을 비롯해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에 상당 부분 의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보에 의하면 벨 사령관이 청와대에 직접 장군 승진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도 아침에 알게 된 정보입니다. 육군훈련소 참모장 이인태 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연합사 부참모장에 임명해 달라고…….”
“뭐라고!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장관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합사 부사령관인 대장에게는 한직이지만 그 밑의 휘하 장군과 장교들에게는 진급을 위한 핵심 코스였다.
장교들 중에서도 연합사 근무 경력이 있는 자들만이 주요 보직을 차지했다.
미군에 종속된 관계였기에 그들과의 인맥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자리였다.
그런데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에게 장군 승진을 요구했다.
과거에도 비공식적으로 이런 일들이 있어 왔지만 요즘은 드물었다.
이것이야 말로 명백한 월권이자 내정간섭이 아닐 수 없었다.
삐이이잇.
그때 장관실 인터폰이 울렸다.
“누구야?”
장관진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 대통령 비서실장님 연락입니다.
“비서실장? 바꿔줘.”
대통령의 심복인 비서실장.
실장급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장관보다 서열이 높았다.
- 장관님, 비서실장입니다.
“비서실장님, 잘 지내시죠? 내일 국무회의 때 따로 찾아뵈려 했는데…….”
장관진이 조심스럽게 응대했다.
- 그 전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네?”
- 대통령님께서 준장 한 분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달라고 하십니다. 육군훈련소 이인태 준장을 특별 진급시켜 바로 연합사 부참모장으로 보내주십시오.
국방부 장관의 결재가 필요한 사항이었지만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감출 수 없는 분노에 입술을 깨무는 장관진.
그렇다고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특히 미국에 약점이 많이 잡힌 대통령.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부탁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폭발해 버린 분노에 장관진의 포효가 장관실이 떠나가라 크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