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8화 (487/1,284)

 # 488

회귀의 전설

488장. 나를 구해줘 (1)

“인연의 신께서 결투의 증인이 돼주실 것을 허락했습니다.”

“에레카 님도 정의로움으로 이 자리에 임하셨습니다.”

‘이건 도대체!’

러셀은 많이 당황했다.

영주의 도발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항복 선언을 받으러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결투 신청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도발 한마디에 판이 깔리고 말았다.

영주가 명을 내리자마자 일사천리로 외성 중앙 광장에서 결투가 진행됐다.

규모와 달리 영지에는 신전이 몇 개나 됐다.

신전에서 온 이들은 한눈에 봐도 고위급 사제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명망 있는 후작가를 위해 중재하기는커녕 바로 결투 증인이 되기를 자처했다.

“베커 장 백작님의 신실한 검 카르스가 증인이 될 것을 여러 신들께 발원합니다!”

영주 기사가 증인이 됐다.

“……러셀 드 파드온 남작님의 신실한 검 하크만이 증인이 될 것을 신들 앞에 발원합니다.”

러셀 휘하 기사도 증인이 됐다.

‘당했다…….’

러셀은 상황이 이렇게 되고서야 자신이 철저하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베커 영주라는 작자는 갑옷도 입지 않고 검만 들고 등장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감히 본 영지에 항복을 통보하러 온 아라돈 드 쥬넨 후작가의 러셀 드 파드온 남작에게 본 백작은 이 땅의 주인으로서 신들 앞에 겸손히 그 자격을 심판 받도록 하겠습니다!”

영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구경꾼으로 몰려든 영지민들과 병사들이 광장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영주에게 보이는 그들의 절대적인 신뢰.

러셀은 이런 광경도 처음 목격했다.

“라이트!”

마법사가 마법을 펼쳤다.

결투를 준비하는 사이 황혼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던 해가 저물었다.

파아아아앗.

중앙 광장 높은 곳에 달처럼 떠오른 빛 덩어리.

고위급 마법사답게 라이트 마법 하나로 어둠을 물리고 낮처럼 환하게 만들었다.

‘제국 결투장에 온 것 같군.’

과거 제국 시절 황제가 거주하는 황도에 큰 결투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몬스터와 인간들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결투는 죄수들이 대부분 했지만 가끔 황제가 이벤트로 기사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러셀은 그 시절의 기분을 느꼈다.

“시작하지.”

스릉.

영주가 먼저 검을 뽑아들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마력석이 박힌 명검이었다.

스르릉.

러셀도 검을 뽑았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드워프가 제작한 보검이었다.

“아라돈 그 쥬넨 각하의 이름으로 파렴치한 베커 영주를 용서치 않겠다!”

검으로 영주를 가리키며 준엄하게 호통을 치는 러셀.

“지. 랄. 마. 세. 요.”

그때 영주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씰룩이며 조용하게 러셀만 보도록 입을 달싹거렸다.

“네 이노오오오오오옴!”

짧은 머리칼에 용병 수준의 영주가 보인 도발에 눈이 홱 돌아간 러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파아아앗.

가문의 검술이 손끝에서 펼쳐졌다.

무거운 기사용 중검으로도 사용 가능한 빠른 일격이 일품인 검술.

이 검술에 걸리면 기사의 갑옷도 가벼운 천 조각처럼 찢겨져 나갔다.

뭣 모르고 검으로 막아내다가는 검도 튕겨내 버리는 기술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영주가 검을 부딪쳐왔다.

‘넌 죽었다!’

검을 날리고 영주의 몸뚱이까지 베어버리려고 러셀은 작정했다.

분명 영주가 말했다.

자신이 패배하면 이 영지를 가지라고 말이다.

쇄애애애앳.

검과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터졌다.

“!!!”

러셀은 당황했다.

손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검이 한낮처럼 밝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순간.

“꺼져! 개집으로!”

영주의 발이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뒷발질로 가격해 왔다.

투구 사이로 그 모습을 빤히 보였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절대 쾌속.

퍼어어어엉!

아랫배에 가해지는 묵직하고 단단한 통증.

“크아아아아아아악!”

뒤늦게 목구멍을 비집고 터지는 비명.

러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붕 떠 한참을 날았다.

콰다다다다다당.

그리고 내던져지고 널브러지는 몸뚱이.

‘내, 내가…….’

모든 게 악몽 같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당당한 후작가의 기사이자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했다.

그것도 단 일 합.

하늘에 떠 있는 마법구가 눈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본 영주에게 검을 뽑아 든 러셀과 그 휘하 기사들이 소지한 모든 것을 압수하라! 이는…… 신들이 허락한 승자의 권리다!”

먼 곳의 이야기처럼 아련하게 울리는 영주의 준엄한 음성.

그 소리가 마치 자장가인 듯 들으며 러셀은 깊은 무의식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다만 눈가를 적시며 흐르는 뜨거운 눈물만이 의식을 잃은 러셀의 원통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

“소장님. 무더위에도 불철주야 훈련병들을 위해 노고를 아끼시지 않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한 잔 받으십시오. 소장님.”

논산 시내에 위치한 조용한 한정식집.

구석의 룸에서 소장 용창호는 훈련소 행보관인 원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전방 사단이 아니다 보니 장교들 규율이 다른 곳에 비해 느슨했다.

비상 걸릴 일도 거의 없었다.

저녁을 빙자해 술이 오갔다.

“몸에 좋은 자연산 복분자줍니다.”

“그래?”

몸에 좋다는 말에 용창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돈과 여자 그리고 술이라면 그 어느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그였다.

“크으! 좋다!”

요리도 맛있고 술도 끝내 주니 용창호 입에서는 좋다는 말이 연발했다.

“소장님……. 이건 약소하지만…….”

행보관이 조심스럽게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수고하시는 소장님을 위해 제가 준비했습니다. 이 무더위에 자식 같은 병사들을 위해 고생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소장이 봉투를 보고 빙긋 웃었다.

최소 2천 단위는 될 것 같았다.

이 맛에 별을 단 보람이 있는 것이다.

알아서 챙겨주는 용돈이 쏠쏠했다.

별을 달기 위해 뿌렸던 돈은 진작 수금하고도 남았다.

퇴직 전까지 기회가 된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 챙겨야 한다.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에라도 나가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했다.

“알았어. 행보관이 보는 게 정확해. 요즘 애들은 오냐오냐 커서 군대가 놀이터인 줄 알아. 먹는 것도 얼마나 훌륭한데 밥을 남겨. 행보관, 훈련병들은 배가 고파봐야 자대가 소중한 줄 알아. 그러니까 더 조여.”

“네?”

행보관 최중식은 살짝 당황했다.

사실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조이라는 말은 더 빼돌리라는 말의 다른 말이었다.

부임한 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5천이나 챙겨갔다.

그런데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이었다.

‘X발. 먹보한테 걸렸네.’

소장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간부들에게 뜯기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월급보다 좀 많다는 것이었다.

행보관은 얼마 전부터 욕심을 내려놨다.

같이 먹어야 뒤탈이 없었다.

위에서 끌어주고 아래서 밀어주는 더러운 정으로 엮인 또 다른 형태의 조직 사회가 군대였다.

“알겠습니다! 내일부터 더 바짝 조이겠습니다!”

“크크크. 행보관 마음에 들어. 자 한잔 하자고.”

용창호는 말 귀를 잘 알아듣는 행보관의 대답에 입이 귀에 걸렸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더 쪼면 없던 것도 나올 게 뻔했다.

어차피 훈련병들은 자대로 떠나면 그만.

그 전까지 쫙쫙 꿀을 빨 생각에 기분이 한껏 고취됐다.

***

“성모 마리아께서는 독생자를 낳으시고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사랑하시니…….”

일요일이다.

영지에서 다시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쉬운 대로 러셀을 이곳 육군훈련소 소장이라 생각하고 명분까지 내세워 두들겨 팼다.

나에게 검을 뽑아들었던 기사 세 놈도 거지꼴로 만들었다.

빤스 한 장만 남기고 다 벗겨내 털었다.

마음 같아서는 놈이 끌고 온 기마병들까지 홀랑 벗기고 싶었지만 신전 사제들이 동석해 있었다.

세 명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것에 만족하고 성에서 쫓아냈다.

고구마 먹은 듯한 속을 좀 풀고 지구로 돌아왔다.

이계 들락날락 하다가는 포인트 거지꼴을 못 면할 것이다.

고역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이계에서 돌아온 깊은 밤.

장동구라 불리는 돼지부터 시작해 코골이가 돌림 노래로 재생됐다.

다들 저질 체력이라 훈련 몇 번과 기합에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골아 떨어졌다.

이튿날 총기를 받았다.

월남전 때 아버지들이 사용하던 M16이 지급됐다.

현역병들은 사용하지 않는 총을 들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리고 입소 이틀 차에 제식 훈련을 받았다.

교련 수업이 폐지된 후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훈련병들이 뭘 알겠나.

나만 잘한다고 눈감아지지도 용서되지도 않았다.

열과 줄이 뭔지도 모르는 훈련병들과 수없이 기합을 받았다.

과거와 달리 2010년에는 아직 조교의 권한이 막강했다.

구타는 사라졌지만 갈굼과 벌칙은 여전했다.

영혼이 쑥 빠진 훈련병 대부분이 그 날은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쓰러졌다.

선풍기가 돌아가며 그들의 날것 특유의 체취를 골고루 퍼지게 했다.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이빨 가는 놈들이 참 많았다.

왜 그토록 군대에 다시 입대하기 싫었는지 확실히 기억했다.

이곳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토요일이 됐다.

훈련병 번호를 옷에 달았다.

아침에 간단하게 훈련을 받고 비디오 교육을 받았다.

애들은 베레모 받고 환장을 했다.

인상 까칠한 조교가 그날은 친절하게 베레모 각 잡는 걸 가르쳐 줬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다.

음식 질이 갈수록 형편없어지고 있었다.

종교 행사를 신청했다.

초코파이와 콜라로 부처와 예수 님, 성모 마리아 님이 유혹했다.

각자 메뉴를 골라 훈련병들이 이동했다.

단 하루로 세례와 법명 받기가 가능한 군대.

실적에 목마른 군종병들이 신도들을 남발했다.

먹을 것 앞에 병사들은 신실한 신들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난 다른 목적으로 천주교에 잠입했다.

신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보니 신들보다는 요즘 나를 믿었다.

하지만 반드시 신에게는 종이 필요했다.

종교 행사를 감독하기 위해 따라온 일손 조교도 숫자에 묻혀 감시가 소홀했다.

어차피 도망쳐 봐야 훈련소 안이었다.

그리고 초코파이에 목숨을 거는 훈련병 생활을 아는 만큼 그들의 감시도 느슨해졌다.

그때가 기회였다.

이 엿 같은 훈련소는 전화 한 번 사용하는 게 신을 영접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빠졌다.

그리고 대상을 기다렸다.

“알겠어요. 수녀님. 오늘 오후 미사 끝나고 같이 가요. 끊어요.”

목표물을 발견했다.

수수한 옷차림의 수녀가 구형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나타났다.

“저기 수녀님…….”

통화를 끝낸 수녀 앞을 막아섰다.

삼십 대 중반의 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봤다.

“네. 형제님……. 무슨 일로.”

“제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요?”

수녀가 이상한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수녀, 그런 상상은 노노!

“딱 전화 한 통만 사용하겠습니다. 밖에 있는 친한 형님이 오늘 내일 할 만큼 위독하다는데……. 연락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아! 그런 일이…….”

“제발 부탁드립니다.”

“규율상 안 되지만 형제님의 딱한 사정을 마리아 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수녀는 성호를 그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성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드는 아더 왕도 지금의 내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띠띠띠 띠띠.

번호를 눌렀다.

나만 아는 직통 번호.

띠이이이이 띠이이이이.

신호가 갔다.

- 보스?

너무나 그리운 한 남자의 목소리.

“로버트. 납니다.”

- 보스! 어디십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로버트가 걱정된 듯 물었다.

그에게 군대 간다는 말을 깜박 잊고 하지 못했다.

“로버트, 나를 구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 보스 어딥니까!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올 것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이 지옥 같은 곳을 정화 좀 시켜줬으면 합니다.”

- 그곳이 어딥니까! 모든 힘을 동원해 바라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여기는……. 대한민국 논산 육군훈련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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