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4
회귀의 전설
484장. 아! X바! (1)
“오늘 컨디션은 괜찮아요?”
“제가 내린 커피 맛이 좋잖아요~.”
“그러게요. 유난히 맛있는 거 같습니다. 여름에는 아이스 더치커피가 제격이죠.”
그는 오늘도 여전히 상쾌하게 웃는다.
유세라는 긴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생면부지인 나쁜 깡패 놈들한테 예기치 못한 납치를 당했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건을 직접 접했다.
아직도 가끔 그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저 남자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깡패들 소굴로 직접 찾아왔다.
끝은 해피엔딩이었지만 중간 과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악몽에 몸서리치며 눈물을 흘리다 깨어 보니 아침이었다.
이후 그때 일에 관해 굳이 묻지 않았다.
그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세라는 하늘에 감사했다.
사람 목숨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던 깡패들이었다.
그녀가 미끼 신세가 돼 대표를 끌어들이는 데 이용됐다는 사실에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었다.
다행히 모든 상황은 원만하게 해결됐다.
요즘 유세라는 대인기피증과 공포에 시달려 사무실이 있는 건물 게스트 룸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치료가 됐지만 아직도 인상이 험악한 남자들을 보면 심장이 마구 뛰었다.
“대표님, 곧 여름휴가인데 계획 있으세요?”
대표의 1학기 학교 수업이 끝났다는 걸 유세라는 알고 있었다.
“러시아 어때요? 휴가지로는 최곤데~. 야생에서 사냥한 사슴 고기로 샤슬릭 요리를 해먹으면 아주 그만입니다.”
“대표님도 가실 거예요?”
유세라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와 함께라면 그곳이 어디여도 상관없었다.
유세라에게 대표는 그녀의 모든 세계를 구원해 준 히어로였다.
“어떡하죠. 내일부터 국가의 부름을 받은 몸이라…….”
“네? 국가의 부름요?”
유세라는 대표의 알 수 없는 웃음에 눈만 깜빡였다.
이해가 잘 안 갔다.
아직 학생 신분인 대표가 국가의 부름을 받을 일이 없었다.
“저 군대 갑니다.”
“네에? 구, 군대요!”
유세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군대라는 말에 과거 대학교 동기들이 불려가 몇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군대? 오! 우리 대표님 군대 가요? 그 4주짜리 군사 캠핑?”
도도희가 보는 눈이 시원해질 만한 아이보리 원피스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도희야. 군대라잖아……. 한국은 군대 가면 몇 년 동안…….”
본의 아니게 이를 악물고 슬픔을 참아보는 유세라.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언니 바보야? 대표님 올림픽 메달 땄잖아. 대표님 빅 픽처 몰라?”
“!!!”
도도희의 말에 유세라는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대표님 뭐에요……. 깜짝 놀랐잖아요.”
요즘 감정선이 예민해진 유세라가 금세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담았다.
그날 이후 대표에게 한없이 의지하는 어린양이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는 군대 가기 전날 코가 삐뚤어지게 술 마신다고 하던데 언니 맞지?”
“응? ……어. 맞아.”
군대 간 남자 동기들이 하루 전날 누가 빨리 개가 되는지 시합하는 걸 많이 봐온 유세라였다.
“대표님 들으셨죠. 지금 회사 셔터 내리고 달립시다! 군대 가는 님을 위해 오늘 밤 두 미녀들이 모든 걸 불사르겠습니다~.”
도도희가 대표의 왼팔을 자신의 온몸으로 휘감았다.
“언니~ 뭐해. 이런 날 자주 오는 거 아냐~.”
“어? 어…….”
유세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대표의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고!”
납치하듯 대표를 이끄는 도도희.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대표.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순간의 기회가 유세라는 좋았다.
바래지는 기억에 남아 있는 그날 밤 대표의 체취가 문뜩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과거 생에는 현역병이라 월요일에 입영했지만 이번 생은 4주 훈련 보충역이라 목요일에 입대한다.
“몸이 좋네. 운동선수인가?”
“네…….”
“머리 스타일이 짧아 금방 자라겠어. 4주면 나오니까 힘내.”
“네…….”
논산 훈련소 앞에 있는 이발소.
이발소 주인장 아저씨가 말을 섞어왔다.
맑게 닦인 유리를 보자 왈칵 눈물이 앞을 가리려 했다.
회귀 후에도 가장 두려웠던 꿈이 군대 다시 가는 꿈이었다.
그 두려웠던 꿈이 현실이 됐다.
위이이이이잉.
아저씨의 전기 이발기가 거침없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휭 하니 사라지는 사회인의 흔적.
어제 두 미녀 덕분에 술 많이 마셨다.
취하지 않았지만 군대 가는 기분은 한껏 냈다.
도도희가 유혹해 왔다.
4주간 자신들 없이 어떻게 살 거냐고 원피스 차림으로 안겨오는데…….
사고 칠 뻔했다.
군대 가기 전 남자들은 심리적으로 가장 심하게 흔들린다.
여우 같은 도도희 상무가 그런 심리를 알고 계획적으로 덤벼들었다.
지난 번 생에선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복학 전에는 여자 친구도 없었던 까닭에 친구들 몇 명과 논산에 왔다.
깡소주에 취해 정신 못 차리고 입영했다가…….
그날 오후부터 뒤지는 줄 알았다.
“다 됐어. 샴푸는 셀프야.”
아침부터 이발소가 만원이었다.
“아저씨~ 보건소로 출근하는 몸이니까 대충 깎아 주세요.”
사회복무요원, 산업기능요원, 공중보건의사, 전문연구요원, 공익법무관과 공중방역수의사 그리고 나처럼 메달을 딴 남자들이 모이는 보충역.
20대 후반의 배 나온 의사가 머리를 맡겼다.
“니X. 내가 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동사무소 출근하고 군사 훈련하고 무슨 상관이야. 좌우지간 윗대가리 새끼들 하는 짓 하고는…….”
찌익 이발소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침을 뱉는 양아치도 보였다.
인상이 더러운 게 꼭 살찐 돼지 같았다.
조폭 똘마니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사회복무요원으로 선발된 양아치였다.
“뭘 봐. 눈깔 확 파버릴라!”
침 뱉는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를 쳐다보며 인상 팍 쓰고 욕을 뱉는 놈.
“눈깔 빼고 개 눈 박아줄까?”
“!!!”
나도 밀리지 않았다.
피식 웃으며 한 마디 던지자 주춤 놀라는 양아치.
“너, 너 이 새끼! 다시 한 번 말해봐!”
그러다 한 박자 뒤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을 치떴다.
100킬로그램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체구였다.
“사료 먹은 돼지 새끼네……. 앉아라. 괜히 시비 털지 말고. 너 훈련소 두 번 가는 엿 같은 기분 알아?”
억눌린 화를 놈에게 풀며 다가갔다.
예상치 못한 나의 도발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놈.
이놈도 임성철 회장님이 말하던 신념 없는 중도인 부류인 게 확실했다.
악인인 척 포장했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돼지 새끼였다.
턱턱.
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윽.”
내공을 살짝 담아 묵직한 기운으로 쳤기에 신음을 흘리고 인상을 구겼다.
“훈련할 때 내 눈에 띄지 마라. 나 힘들게 하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됐다.
“보스. 입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굳이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함께 동행한 한진웅 대표가 이발소로 들어왔다.
한 여름인데도 검은색 여름 슈트를 차려입은 한진웅 대표를 유심히 바라보는 돼지 눈이 심하게 떨렸다.
나는 한진웅 대표가 열어준 문 밖으로 나갔다.
“오빠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우리 오빠 군바리 다 됐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줘~.”
“태산아. 김밥 먹고 들어가야지. 하나뿐인 아들 군대 가는데 엄마가 이것밖에 준비를 못했다…….”
쌍둥이들이 밖에서 기다리다 달려와 안겼다.
4주 훈련도 군대라고 엄마가 눈물을 훔치며 훈련병 어머니 코스프레를 했다.
“훈련이 쉽지가 않지만 남자라면 당연히 갔다 와야지. 나 때는 말이야 군대에서 보리밥이 나왔는데 먹고 나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아버지…… 방위셨잖아요.
“대표님……. 여기 술 깨는 약……. 웩.”
얼큰하게 취해 나를 어찌 해보려던 도도희가 약을 건네다가 우웩거렸다.
누가 보면 군대 가는 남친 애라도 밴 줄 오해하겠다.
“대표님 약소하지만 전자시계예요. 아저씨들이 반드시 필요하대요.”
훈련소 앞 장사하는 사기꾼 아저씨들에게 싸구려 전자시계를 구입한 유세라 팀장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이며 손에 전자시계를 채워줬다.
순진한 그녀는 훈련소 앞 봉이었다.
“헐? 뭐야? 재벌 3세라도 왔어?”
“헉! 훌륭한 미녀들이다!”
“연예인 아닐까?”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한진웅 대표와 씨큐리티 직원들이 군대 가는 날 동생 보듯 바라봤다.
다들 특전사 출신인 그들이 보기에 지금 이 광경이 얼마나 한심할까.
현역병도 아니고 보충병은 훈련이 훨씬 약했다.
“저 차 벤틀리 아냐?”
“슈퍼카다…….”
다들 타고 온 자동차가 범상치 않았다.
그에 반해 짧게 자른 머리칼과 평범한 청바지에 면티 하나만 입고 있는 나.
앞으로 버틸 4주가 미리 꾼 악몽처럼 떠올랐다.
“다들 이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영 시간이 다됐습니다. 퇴소식 때는 안 오셔도 되니 다들 각자 생업에 매진하십시오. 절대! 절대! 아무도 오시지 마십시오!”
이런 기분은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다.
훈련소 옆 유료주차장에 차를 가져다 놨다.
퇴소식 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들 퇴소식에는 반드시 와야지.”
“오빠~ 그날로 휴가 잡을게~ 으흐흐.”
“대표님……. 편지 하루에 한 통씩 보낼 게요.”
“보스! 직원들 모두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자랑스런 입소 장병 여러분. 곧 입소식이 개최될 예정이오니 대연병장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귀에 울리는 스피커 속의 딱딱한 군인 말투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다시 한 번 회귀해서 맞닥뜨리게 된 논산 훈련소 입영.
한진웅 대표가 이끄는 전직 특수부대 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훈련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와도 결코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이 곳.
“휴우…….”
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 친구들을 향해 경례! 추우우웅성!”
마이크를 잡은 훈련소 소장이 선창했다.
길고 긴 국민의례와 훈시가 끝났다.
할 일 없는 훈련소장은 이 날만을 기다린 듯 생기가 넘쳐 보였다.
“추우웅성!”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7월 초의 연병장.
군대의 군자도 모르는 입영병들이 사복을 입고 계단에 앉아 있는 부모님과 친우들을 향해 경례를 했다.
각도도 안 맞고 목소리도 엉망인 입영병들의 충성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반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고 반절은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불쌍한 것들.
앞으로 닥칠 일들은 상상도 못하고 감성에 흠뻑 젖었다.
나의 경례는 달랐다.
전직 말년 병장 포스는 어디 가지 않았다.
눈물?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니 진짜 눈물이 흐르려 했다.
[가족 여러분과 친우 분들은 훈련병들의 원활한 입영 생활을 위해 지금부터 귀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여기 계신 입영병들은 대한의 자랑스러운 병사로 육성될 것입니다. 모두 안심하시고 각자의 가정에 돌아가 군을 믿고 평안하게 생활해 주십시오.]
별 두 개를 단 훈련소의 대빵이 가족들에게 속삭였다.
“여러분~ 이제 열을 맞춰 저를 따라오십시오. 군가는 모두 알고 있는 ‘멋진 사나이!’ 하나 둘 하나 둘!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빨간 모자를 쓴 조교가 나타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병사들을 통솔했다.
“아이고……. 영철아!”
“주혁 씨~ 기다리고 있을게~.”
훈련병들이 움직이자 미련이 남은 가족들과 여자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 가족과 일행들도 보였다.
나를 향해 얼마나 손을 흔들어 대는지…….
“하나~ 둘! 하나 둘!”
조교들의 통솔에 따라 병사들은 다른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가족들 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엄습해 오는 낯설지 않은 공포.
“제자리 섯!”
때를 맞춰 들려오는 조교의 차갑게 변한 음성.
처저적.
엉망진창으로 발 떼기를 하던 발걸음들이 멈췄다.
“지금 장난 하십니까? 여기가 사회입니까? 정신들 안 차립니까!”
마이크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귓구멍에 쑥쑥 쑤셔 박히는 찰진 조교의 목소리.
마계에서 소환된 네크로맨서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모두 엎드려뻗쳐를 실시합니다! 실시!!!”
예상했던 대로 제때 시작된 공포의 얼차례.
타다다닥.
누구보다 빨리 자세를 잡았다.
오정의 주인 임성철 회장과 술잔을 나누던 천하의 나……도 어쩔 수 없는 2회 차 논산 훈련소 훈련병.
아! X바! 진짜 눈물이 앞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