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
회귀의 전설
472장. 계파 (1)
“후우우우우…….”
술자리가 끝나고 혼자 남은 양우석은 담배 연기를 폐부까지 깊이 빨았다 길게 뱉었다.
소맥을 20여 잔 이상 마셨다.
평소 주량을 넘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취하지 않았다.
웃고 떠들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한민국의 병폐인 정치인들을 안주 삼아 씹고 재벌들의 귀족적 작태와 졸부들의 부동산 투기에 대해 신랄하게 까댔다.
오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토착 왜구 같은 현 정부 수장과 그 밑에서 개처럼 충성하는 하수인들의 처신을 두고도 성토했다.
금수강산을 말도 안 되는 짓거리인 대운하로 만들려는 무지막지한 대통령의 행동은 보통 인간의 상식 밖 발상이었다.
차라리 고속도로 몇 개를 만들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왕이라도 된 듯 사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다행히 깨어있는 시민들이 촛불로 막아내지 못했다면 한반도는 두 쪽으로 분리되어 섬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몹쓸 짓을 벌이려던 대통령을 보며 양우석은 절망을 느꼈었다.
일개 국회의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고 있었다.
자원외교라는 미명하에 건실하던 공기업들의 부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견제 장치가 아예 없었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은 의석수도 가장 많았다.
야당 의원들 중에도 여당을 은근히 지지하는 자들도 섞여 있었다.
나라와 민족은 생각하지 않고 철저하게 계파나 사적 이익을 따라 움직였다.
“세력 확장이라…….”
장태산의 뜻을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 측 현 시장을 밀기로 약정이 됐다.
합동민주당에서 당협 위원장인 양우석의 뜻을 묻지 않고 시장후보로 낙하산을 보냈다.
자당 중진의원의 보좌관 출신이 시장에 나선 것이다.
능력도 검증이 안 됐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인상이 밝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소문도 별로 좋지 않았다.
양우석이 국회의원이 된 것에 고무 받아 장주시를 공으로 먹으려고 작정했다.
고향도 아닌 곳에 정치적 기반도 없는 자를 시장으로 내보낸 건 패착이었다.
장태산도 그 일에 있어서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말 잘 듣는 여당 소속 현 시장이 일하기에는 편하다고 말했다.
장태산의 생각처럼 현 시장은 일을 잘 진행시켰다.
예산도 많이 내려와 장주시 기반 시설이 나날이 좋아졌다.
“세상이 바뀌고 있건만 정치인들은 아직 제자리야…….”
담배를 길게 빨았다.
답답한 현실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지만 정치인들과 고위 행정가들 마인드는 아직 1990년대쯤에 머물러 있었다.
“계파라…….”
장태산으로부터 처방을 받았다.
나이가 한참 어린 대학교 후배지만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농담처럼 툭툭 던지는 말들에는 의도한 듯 모조리 뼈가 담겨 있었다.
시국을 보는 안목도 누구보다 대단했다.
현 정권이 벌리는 작태로 결국 경제가 큰 병이 든다고 말했다.
저금리로 유동 자금이 넘쳐나며 부동산이 폭등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확신에 찬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러 소비가 눈에 띄게 증가하지만 결국 파멸이 다가올 거라 예견했다.
담담히 소맥을 마시며 말하는 장태산의 모습에 사실 소름이 돋았다.
미래를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대책을 물었다.
돌아온 답은 명료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와 경쟁하고 있는 저임금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서두르고 4차 산업에 지원을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럴 의지가 전혀 없다는 걸 양우석은 알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경제적으로 효과를 낼 단기 처방인 건설에 올인 했다.
선제적 산업 구조조정으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공구리로만 인력을 도배했다.
경제 방향타를 쥔 정부가 그러고 있으니 희망이 없었다.
그런 마당에 장태산이 계파를 만들라고 조용히 주문했다.
양우석은 고민스러웠다.
정치권이 엉망이 된 게 각 당의 계파 문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장태산이 그런 사실에 한 마디를 더했다.
똥물에서 1급수에 서식하는 산천어처럼 살지 말라는 당부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굳은 심지를 심장에 박고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위로했다.
“나라를 위한 모임이라……. 모임 이름도 좋고 명분도 단순하고 좋네.”
계파 모임 이름도 그 자리에서 정해줬다.
나모.
“나보다 후대에 태어나도 배울 게 있다면 스승이라 했던 성현의 말씀이 옳았어. 후후훗.”
양우석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장태산을 만난 이후 막연했던 정치생활의 맥을 잡았다.
말뿐인 대한민국과 시민을 위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행동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축이 되어야 했다.
“오랜만에 심장이 활활 타는군.”
의욕이 샘솟았다.
엄청난 부를 일군 장태산이 뒤에서 기꺼이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전진뿐.
불퇴전이었다.
담배를 다 태운 양우석은 꽁초를 털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번호 하나를 길게 눌렀다.
- 여보세요.
“어! 차 의원. 나야.”
- 여어~ 양 의원이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오랜만에 마장동 왔다가 자네 생각이 났어.
- 왜 혼자 먹다가 배불러서 생각난 거야? 난 오늘도 짜장면인데.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아직 의원실이지?”
- 당연하지. 임시 국회에 던질 법안 제출 문제로 정신없어.
“육회 샀는데 야식으로 콜?
- 육회! 뭐하고 있어. 빨리 와야지. 싱싱할 때 소주에……. 크으.
“채진석 의원도 있으면 불러. 넉넉하게 샀으니까.
- 오케이! 어서 오시게. 난 벌써 입에 침이 돌아~.
“택시 타고 갈게~”
양우석이 간단하게 통화를 끝냈다.
장태산이 넉넉하게 구입해 준 소고기 육회.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그의 말대로 계파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오직 나라를 위한 모임, 나모를 위하여!
***
- 보스. 볼부에서 20억 달러 국가지원을 받아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빠르네요.”
- 선거를 앞두고 있어 결정이 빨랐던 것 같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선거는 언제는 정치인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마법의 법칙이었다.
“법무팀 파견했나요?”
- 사모펀드를 대표하는 법무팀을 보냈습니다.
“추가 조건은요?”
- 최소 10년간 스웨덴 볼부 본사를 유지하는 조건입니다.
“보유 주식에 대한 비토권 같은 건 없습니까?”
- 포드에서 넘어올 때부터 없었습니다.
“그럼 바로 진행하십시오.”
- 알겠습니다.
“언제나 로버트 덕분에 인생 편하게 삽니다~.”
- 제 인생도 보스로 인해 샛별처럼 빛나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난은 칭찬보다 쉽다.
잘못을 지적하는 건 조건 하나만 충족되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칭찬이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짜여야 입이 열리는 법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로버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로버트 라이언이 나의 기준에 완벽하지 않다 해도 열심히 자신의 인생을 정직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로 칭찬받아 마땅했다.
“좋은 밤 보내세요. 로버트~.”
- 보스께서도 상쾌한 아침이 되십시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볼부에 대한 일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갔다.
올해 안에 삼용을 인수하고 볼부와 기술제휴 및 합자회사를 만들 생각이다.
정부가 개떡 같이 국정을 운영해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해 왔다.
내일을 위해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설계를 진행 중이다.
“봄이 왔네…… 봄이.”
어제 양우석 의원과 진하게 한 잔했다.
그리고 오늘은 학교에 찾아왔다.
수업 강의를 전부 듣지 않아도 되지만 간간이 학교를 휴식처 삼아 나왔다.
그렇게 크지 않은 학교 안 연못이 보이는 쪽의 나무의자에 앉았다.
진달래 꽃망울이 한두 개씩 터지고 있었다.
수령이 오래된 벚꽃 나무들도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한껏 부풀어 있었다.
세상사는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고 있었지만 이곳은 평화로웠다.
“양우석 의원님 쭉쭉 크십시오. 때를 기다렸다…… 한 방에 날려버립시다.”
아무리 내가 거대 자본을 갖고 있다 해도 개인이 갖는 한계는 명확했다.
그런 점에서 세력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국회와 법조계가 핵심 타깃이었다.
“한참 찾았잖아~.”
기분 좋은 목소리와 함께 옆 자리에 한 여인이 앉았다.
익숙한 향기와 음성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세월을 낚는 거야? 아니면 저기 봄바람 가득 찬 여학생들을 낚는 거야?”
멀리서 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며 수군거리는 여학생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공부 안 해요? 지금 그 실력으로는 힘들 텐데~.”
“와아아아……. 내가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듣고 살줄이야.”
“잘난 후배잖아요.”
“……쳇. 그건 인정. 자 이거 마셔. 잘난 후배님~.”
말과 함께 따뜻한 캔 커피가 건네졌다.
어중간한 아메리카노보다는 차라리 캔 커피가 좋았다.
“이 커피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스토커 아니거든! 너 학교에서는 이 커피만 마시잖아.”
“맞네. 스토커.”
“헐……. 예전에 버스에서는 니가 스토커였잖아.”
“그건 스토커가 아니라 이성에 대한 자연스런 호기심의 발로였죠. 예린 선배가 그 버스에서 제일 예뻤습니다. 물론 성격은…….”
“……장태산! 그만! 넌 진짜 나쁜 남자야.”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입니다.”
“아오!!!”
법학과 얼짱 예린 선배였다.
해묵은 감정이 사라진 상태라 대화가 편했다.
간간이 그녀의 눈빛 속에서 그리움이 읽히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무시했다.
한 번 날아간 비행기는 다시 탈 수 없는 법이다.
딸깍.
캔 커피를 땄다.
방금 뽑아온 듯 따뜻했다.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고개를 돌려 예린 선배를 바라봤다.
“으흐흐. 내가 학교에 정보원이 많아.”
음흉하게 웃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늘은 제법 날씨가 쌀쌀한데 얇은 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버스에서 봤던 과거의 첫사랑도 어느새 완숙한 여인이 되어 갔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상당히 걷어낸 듯 표정이 밝았다.
그 밝음은 또 다른 화장이 되어 예린 선배를 커버했다.
“그냥 왔을 리는 없고…… 말해요. 오늘 기분도 좋은데 웬만하면 승낙해 드리겠습니다.”
사법시험 준비하느라 바쁜 예린 선배가 그냥 나타났을 리 없었다.
“눈치가 뭐 그렇게 빨라?”
“대학교에 왔더니 눈치만 늡니다.”
“흐흐. 그게 바로 나이 먹어간다는 증거다.”
“그건 동감입니다.”
“밥 먹어야지? 지금 갈까?”
“뭐죠? 커피에 밥까지? 뇌물은 안 먹습니다.”
“먹어줘라~. 나 돈 많아~.”
“알고도 먹으면 바보죠.”
“다른 남자 애들은 밥 얘기만 해도 황송하다는 표정인데 넌 왜 그래?”
“일반인의 범주에서 전 빼주십시오.”
“잘났다. 장태산!”
“그것도 인정~.”
“와……. 밥맛이 뚝 떨어졌어.”
학교에서 이렇게 평범한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국회의원을 만나고 세계적 사업가들과 골치 아픈 두뇌 싸움을 하는 것보다 나았다.
“말해 봐요. 커피 한 캔으로 충분하니까.”
“옛 첫사랑 특혜야?”
“그건 진작 계산 끝났습니다~.”
“그래. 내가 나쁜 사람이다.”
“오오! 그것도 인정!”
“장태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예린 선배가 갖고 있는 긴장감이 공기를 타고 전달돼 왔다.
“말해요. 기회는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저기…… 태산아…….”
예린 선배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왜……. 선배도 학필 선배처럼 합격시켜드려요?”
“!!!”
직구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예린 선배는 연애보다 시험 합격이 더 간절할 것이다.
“질문이 너무 노골적인가요?”
파르르 떨리는 예린 선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처음 볼 때처럼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맑게 빛났다.
“……맞아. 네 도움이 필요해. 그때처럼…….”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예린 선배.
“무슨 말입니까? 제가 신도 아니고~.”
튕겼다.
“합격만 한다면…… 너를 따를게…….”
생각지 못한 강한 조건을 다시 제시하는 그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장태산……. 네 계파가 된다는 소리야.”
예린 선배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결심이 확고했다.
많은 걸 조사하고 생각 끝에 이 자리까지 찾아온 것 같다.
“계파라……. 그럼 나중에…… 제가 지시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 따를 수 있습니까?”
“응! 그게 뭐든 다 할 수 있어!!! 무조건!!”
“선배 아버님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는데 그 지시도 따르시겠습니까?”
“……뭐,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