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9
회귀의 전설
469장. 사회적 기업 (1)
“회사는…… 어떻게…… 됐어.”
병원 VIP실에 누워있다 겨우 눈을 뜨며 천준용 회장이 힘겹게 물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로 주총 자리에서 당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놈은 치밀하고 강했다.
어리다고 만만하게 봤던 실수로 제대로 낭패를 봤다.
랏데 회장이 배신했을 정도라면 놈이 뭔가 큰 건을 던진 게 확실했다.
선친 때의 인연을 너무 믿고 있었다.
랏데를 통해 많은 특혜를 받았고 주총 전까지도 의리는 남아 있다고 믿었던 게 착각이었다.
기업은 이윤을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걸 망각한 게 첫 번째 패착이었다.
자신도 과거 동업자나 하청 업체를 비슷한 수법으로 무너트렸다.
연금도 마찬가지였다.
외국계 핫머니를 움직이는 미국이라는 배경을 무시했다.
지금껏 외국계 기업 누구도 천일을 욕심내지 않았다.
외국계 자금들은 한국 건설주에 대해서는 투자를 꺼렸다.
회계처리가 엉망이고 대부분 인맥 장사에다 불법이 판치는 걸 그들도 알았다.
가끔 대규모 적대적 M&A를 위해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대부분 외국인을 가장한 검은 머리 투자자들이었다.
“……죄송합니다.”
비서실장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등기이사 등록하려면 시간이…… 남았을 것이야. 그 전에 서류 정리하고…… 애들 입단속…….”
천준용은 미련이 남았다.
이대로 주총 결과에 승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5시에 모두 처리가 됐습니다. 이미 준비가 됐는지 등기이사 선임뿐만 아니라 임원들에 대한 물갈이도 대대적으로 감행됐습니다. 거래장부를 비롯해 모든 회계장부까지 동결됐습니다, 외부 회계감사법인과 로펌들이 달려들어 분석 중이라고 합니다.”
“으으으…….”
일은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까지 가 있었다.
분노에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벌겋게 충혈됐다.
“건설 대표이사가 바뀌었다는 소리에 검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놈의 힘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천준용은 그만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어떻게 쌓아올린 그룹인데 단 몇 달 만에, 그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한 놈에게 무릎을 꿇었다.
눈빛이 독한 놈이었다.
과거 젊은 시절의 선친보다도 더 냉혹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룹이 망하면 보통 비자금과 회사 몇 개는 남겨주는데 놈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핸드폰…….”
비서실장이 조용히 대포폰을 건넸다.
비서실장은 천준용 회장이 이럴 때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지 과거부터 많이 봐왔다.
길게 단축 번호를 누르는 천준용.
- 아이고~ 친구 아이가. 아프다메 괘안나?
걸쭉한 사투리를 써가며 답하는 구광필.
TV를 보고 천준용 회장에 관련한 소식을 들었다.
“깔끔하게 무기명으로 50장 주마.”
감정 없는 음성으로 천준용 회장이 용건만 간단하게 뱉었다.
- 50장~ 뭐 이리 많노~. 니 망했다는데 돈 많나?
“길게 말하게 하지 마. 구광필이…… 널 아직 죽일 힘은 남아 있다.”
- …….
잠시 통화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흐흐흐. 천준용이 아직 살아 있네~. 그래야 내 친구지~.
구광필의 목소리가 표준말로 바뀌었다.
“죽여줘. 그거면 된다.”
- 장태산이 몸값 많이 올랐다. 그래도 친구 부탁이니까 들어주마.
“그래……. 이번 부탁 반드시 들어줘라. 내가 너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준 대가라 생각하고…….”
- 은혜를 잊으면 짐승이지. 알았다. 내…… 그 새끼 한 번 확실하게 담가보마. 크크크.
“이 핸드폰도 폐기할 거다. 그러니 TV에서 소식 듣도록 하마.
- 그래. 나 구광필 한 번 믿어봐라.
뚝.
천준용은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감히 자신을 친구라 운운하는 아랫것과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망해도 부자는 삼대를 가는 법.
그동안 쌓았던 재력의 상당수를 이미 해외 비밀 계좌에 넣어 놨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너진 기업을 다시 일으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천준용은 알고 있었다.
주주총회가 불법이라 우길 수 있는 명분도 없었다.
미국계 투자자금을 견제할 수 있는 권력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순환출자의 핵심인 천일 건설이 무너졌다면 다른 계열사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져 사라질 것이다.
사업 영역이 겹치는 업종은 다른 그룹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사자는 더 이상 여우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
그동안 충성했던 일송회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부친 때부터 일궜던 모든 것들이 하룻밤 폭우에 쓸려 가버렸다.
남아 있는 건 독한 분노.
천준용은 두 손을 불끈 쥐며 눈을 감았다.
띠띠띠띠.
부착된 의료용 기계에서 심박 수치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황 대표님.”
승자는 전투 후에 만찬을 즐기는 법.
사무실에서 천일 건설 대표에 위임된 황효관 대표와 하관우 회장을 불렀다.
성실함과 친절함은 체력에서 나오고 밝은 성격과 여유로움은 통장에서 나온다는 유행어가 생각났다.
천일 그룹을 넉넉한 자금으로 수중에 넣은 만큼 눈살 찌푸릴 일이 없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모두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황효관 대표가 나를 가리켜 회장이라 불렀다.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회장이라는 말은…….”
“보스는 보스입니다.”
대웅맨들은 위아래가 확실했다.
창의적은 면은 부족했지만 명령에 저돌적이고 조직에 충성했다.
하관우 회장은 여전히 보스라고 불렀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보스라고 부르시고 공개된 곳에서는 장 대표라고 불러주십시오.”
나도 보스라는 말은 싫지 않았다.
요즘 호칭을 보스로 통일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보스.”
황효관 대표가 눈치 빠르게 보스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누가 보면 조폭 회의로 오해할 만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황효관 대표는 주총장에서 봤지만 직접 대면과 대화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관우 회장의 추천으로 몇몇 사람들 이력서가 전달됐다.
그중에서 황효관 대표가 발탁됐다.
전형적인 충성파 관상이었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 관상을 가진 이들만 옆에 뒀다.
원래 발등은 믿는 도끼에 찍히는 법이라지만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관상을 보고 선택한 인사는 성공했다.
“자료는 확보했습니까?”
“삼우 로펌에서 파견한 변호사와 회계사, 그리고 건설사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인원을 파견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한 횡령과 배임, 분식 회계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관우 회장이 믿음직스럽게 답했다.
“자료를 파악하면 바로 언론에 공개하고 검찰에 넘기십시오. 천 회장 측 지분…… 모두 회수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계열사들 주주총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국내 인수 회사들은 하관우 회장이 중심을 이뤘다.
도운중 회장이 키운 인재들을 잘 써먹었다.
“천일 그룹 순환출자의 핵심인 건설사가 타 계열사 주식 상당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투자된 주식과 합치면 무리 없이 모두 계열사로 편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효관 대표가 답했다.
“보스. 천일 그룹은 생각보다 알짜 사업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건설은 도로와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에 강점을 보입니다. 유화부분에서 생산하는 폴리에틸렌과 폴리부텐, 기유와 필름 등은 저희 TS와 합자한 여천에너지 사업부에서 원료를 공급 받아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시장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관우 회장이 알고 놀랄 정도로 알짜 사업이 많았다.
나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천일은 철저하게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우량기업이었다.
“기타 레저나 에너지, 면세점도 버릴 곳이 없습니다.”
건설사 대표가 된 황효관 대표가 계열사에 대해 말해왔다.
“그대로 인수 추진하십시오.”
“천일대학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계 쪽이지만 지분 상당수를 천일그룹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황효관 대표가 물어왔다.
천일건설의 지분이 가장 많았다.
천일대학교는 전문대였지만 학사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대학교였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교 위치가 수도권이라 입학생 수급은 어렵지 않습니다. 재학생 규모가 10,000명 단위라 수익 면에서 괜찮습니다.”
하관우 회장은 수익적 측면에서 접근했다.
“장점이 많은 학교입니다. 품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효관 대표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합당한 이유를 들어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세상은 IT를 넘어 4차 산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변화에 한국 대학교들은 적극적으로 대처를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학교를 돈을 버는 사업체나 명예를 추구하는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게 설립자들의 발상입니다. 교수들도 전임이 되는 순간 자기개발에 소홀해져 사회발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바뀌어야 대한민국의 지속성장이 가능한 인재들이 창출됩니다. 천일대학교는 그런 점에서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확고한 교육관을 품고 있는 황효관 대표였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생각보다 현장중심의 실용 교육이 실천되는 몇 안 되는 대학교입니다. 취업률도 높고 산학협력 및 직업교육기관으로서 역할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맞춤 실무형 교육을 강화한다면…… 산업체나 학교, 학생 측면에서 엄청난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황효관 대표 좋은 남자였다.
저런 인물을 알아보는 하관우 회장의 안목이 대단했다.
“저도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기업은 다양한 산업체 현장실습을 제공하고 학교는 사회적응력 향상과 업무 파악 증진 교육을 통해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의를 표했다.
“이사회를 열어 이사장을 비롯해 천일 그룹 방계들을 모조리 정리하십시오. 그리고 경력 개발을 할 수 있는 취업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청년 실업을 해결해야 합니다. 적어도 천일대학교 졸업생이라면 각 기업체에서 원하는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십시오.”
지시사항을 더했다.
“알겠습니다.”
천일대학교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원하는 학생 전원 기숙사에 입실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말은 계속 이어졌다.
“???”
“국가 장학금에 연계해 학교 장학금도 확충했으면 좋겠습니다. 반수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장학금 규모는…….”
“학생 반절 정도는 전액 면제입니다.”
“!!!”
“학교는 이익 창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널리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공간입니다. 중용대학교와 더불어 천일대학교 졸업생은 TS 그룹과 천일 그룹 우선 채용 기회를 일정 이상 줄 겁니다.”
파격적 발언이 이어졌다.
“물론 이 혜택이 전부에게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정확한 학점관리를 통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할 생각입니다. 부정한 청탁이나 이권거래가 있다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황효관 대표와 하관우 대표가 힘차게 답했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공학과 출신들은 자동차 회사 정규직에 임용할 생각입니다.”
“……보스.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는 정규직을 거의 뽑지 않습니다. 대부분 비정규직이거나 용역업체 소속입니다. 강성 노조로 인해 특히 생산직에서는 거의 정규직을 뽑지 않습니다.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노조 자녀들을 우선 채용하는 실정입니다.”
하관우 회장이 현실을 한 번 더 짚었다.
다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노조 자체도 신규 직원 채용을 꺼려하거나 자신들 손을 통해 입사시키려 합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는 1억 정도가 필요하다는 게 정설입니다.”
황효관 대표도 덧붙였다.
이 또한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과거에는 없는 이들의 대변자였던 노조가 언제부터인가 기득권이 되어버렸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양심과 정의를 가차 없이 패대기쳤다.
물론 일부에 해당하는 문제이지만 대한민국 양대 노총은 썩은 물이 됐다.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이권에 개입했으며 사회적 문제를 핑계로 수시로 정부와 기업을 압박했다.
“기존 자동차 회사 입사가 목표가 아닙니다.”
“???”
순간 두 사람 다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참신한 헛소리냐 하는 표정이었다.
“마침 좋은 매물이 나왔더군요.”
“설마…… 삼룡은…….”
황효관 대표가 미리 놀라며 물었다.
현 정권의 뜨거운 감자 같은 곳이 삼룡 자동차였다.
짱개 기업의 먹튀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던 삼룡 자동차.
작년 구조조종에 대항해 벌인 파업에 국가는 공권력을 사용했다.
피가 난무하고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회사가 망하면 당연히 일자리도 사라지는 법이다.
냉혹한 경제 법칙이었다.
“보스. 삼룡은 중국 자본이 기술력을 모두 탈취한 상태입니다. 해고된 노조도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괜히 매입했다가는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투자처입니다.”
하관우 회장이 흥분하며 말렸다.
“앞으로 삼룡은 미래차 개발의 주역이 될 겁니다. 비정규직 채용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노조에 휘둘릴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정도로 가는 길을 막아서면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겁니다.”
일자리가 곧 국가의 경쟁력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계속적으로 제조업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중공업 분야의 발전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미국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바뀐다.
금융산업이 허상이라는 걸 깨닫고 산업 기업들을 다시 국내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복안이 있으십니까?”
하관우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볼부와 합작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삼룡은 볼부 삼룡이 될 것이며 일반 서민들이 애용할 수 있는 차를 제조할 겁니다.”
“!!!”
볼부라는 말에 두 사람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제 친구가 볼부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보스…….”
“역시! 보스십니다!”
막연하지만 볼부라는 말에 두 사람은 나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삼룡에 부족한 메이커 효과와 기술을 커버할 수 있는 핵심재료가 바로 볼부였다.
자본이 받쳐준다면 새로운 세계적 대형 자동차 메이커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본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핵심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분은 건설 회사를 이용해 땅을 좀 매입해 주십시오.”
“네?”
“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