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7화 (466/1,284)

 # 467

회귀의 전설

467장. 때려잡기 좋은 날 (3)

“거수기도 아니고……. 젠장.”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본부장 안준규가 사인한 서류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미국 코널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땄던 청춘 시절에만 해도 지금을 꿈꾸지는 않았다.

월가 투자회사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으며 일했었다.

하지만 작년 금융위기 때 잘렸다.

마침 그때 한국 정부의 콜을 받았다.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팔자에 없는 공무원이 됐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법으로 조국을 위해 나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도 냈다.

욕심에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의 조직 생활이 쉽지가 않았다.

수백조가 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을 모두 책임지는 본부장직이지만 생각보다 권한이 약했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압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재계와 연결된 정치권 압력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국민연금 이사장은 현 정권 창출에 공을 세운 공신이 낙하산으로 박혔다.

금융에 관해 쥐뿔도 모르는 이사장은 골프 치고 돈 챙기기에 바빴다.

그걸 알면서도 안준규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들과 딸이 미국 사립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명예만 바라기에는 돈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 공직 사회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앉아서 용돈이나 벌라는 의미겠지.”

사인을 마친 서류는 바로 넘어갈 것이다.

오늘 천일 그룹 주주총회에 연금은 회사 측 손을 들어줘야 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바라지도 않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 내가 장기판 졸도 아니고…….”

안준규는 입 안이 쓰고 답답했다.

자금의 주인인 국민을 위해 성실히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되고 싶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단순한 주식 보유와 의결권 행사에 참여하는 건 연기금이 가진 도덕적 목적과 부합되지 않았다.

잘못된 의사 결정을 내린 대표에게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물어야 했다.

선진국에서는 적극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는 아직 한국에서 요원했다.

이사장이 명을 내렸다.

천일 그룹 사주를 위해 무조건 거수기를 들라고 말이다.

사인하고 나면 해외 비밀 계좌로 1억이 입금될 것이다.

이사장은 그 이상의 자금을 받을 것이며, 그 윗선도 짭짤하게 한 몫 챙길 수 있었다.

외국계 자본에 회사가 날아가는 것보다 싸게 먹히는 방법이었다.

“천일 그룹을 왜 인수하려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투자자 입장에서 천일은 외국인들에게 매력 있는 회사가 아니었다.

주식의 변동성도 크지 않았고 대주주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주식도 시장에 풀린 게 없었다.

장기적 투자처로서는 매력가치가 10%도 안 됐다.

“건설이 성과가 좋지만 관급 공사가 주인데……. 이걸 인수하면 당연히 관급 공사 수자가 떨어질 텐데…….”

외국계 기업에 관급 공사를 줄 정도로 이 나라 권력자들이 공평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게 있겠지.”

설명하기도 힘든 정치역학 관계였다.

안준규는 호기심을 접고 인터폰을 들었다.

천일 건설은 이 서류 하나로 오늘 위기를 벗어날 것이다.

삐리리리릿.

마침 인터폰이 울렸다.

- 본부장님, 이사장님입니다.

“연결해 주세요.

- 안 본부장, 나요.

전직 국회의원이자 이번 정권에 일등 공신인 이사장의 구수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이사장님.”

- 오늘 천일 건설 이사회 건 있잖소.

“방금 사인했습니다. 직원들 바로 보내겠습니다.”

- 됐어. 보내지 마요.

“네?”

- 됐다고. 안 보내도 돼요.

“아니 그게 무슨…….

- 허어, 이 사람아. 내가 됐다고 하면 된 줄 알아!

급기야 이사장이 버럭 화를 냈다.

나름 해외파라고 대접해 주던 평상시 모습과 달랐다.

“…….”

안준규는 입을 닫았다.

연금과 기금운용을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의 막말은 엘리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 미국 대사관에서 위로 연락이 왔다고 해.

아니나 다를까 본모습을 보이며 이사장이 반말을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무슨…….”

- 미국 투자자의 이익에 반하는 연금의 주주총회 참석과 의결권 행사를 미국정부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해왔대.

“아!”

‘이거 큰 건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

미국 정부를 움직일 정도의 힘이 개입됐다.

‘천일 그룹……. 도대체 뭘 잘못한 거야?’

- 그런 줄 알고 일체 행동 조심해. 밑에 애들 단속 잘하고 천일 쪽 연락은 패스해.

이사장이 깡패 보스처럼 말했다.

“알겠습니다.”

- ……눈치껏 움직이세요.

“…….”

다시 ‘요’자를 붙이며 통화를 끝내는 이사장.

용돈이 날아간 것에 있어 짜증이 치밀어 오른 것을 애써 감추는 눈치다.

“천일을 노리는…… 누구. ……오랜만에 재밌겠는데?”

안준규는 입맛을 다셨다.

천일 그룹에 대한 자료를 다시 살폈다.

그리고…….

“앞으로 기금 주식 비율을 더 높여야겠군.”

뭔지 모르지만 촉이 말해 주는 천일 그룹의 미래.

안준규는 날아간 용돈보다 천일 그룹에서 벌어지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

“주주총회가 곧 개회될 예정이오니 주주 분들은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울렸다.

분위기 참 안 좋았다.

정기 주주총회 기간도 아니고 대표이사와 이사를 비롯해 감사 해임, 그리고 새로운 대표 임명까지 내용이 살벌한 임시 주총이었다.

구경 나온 소액주주들과 인상 팍팍 구기는 천일 그룹 대주주들.

그리고 해외 투자자를 대표한 로버트 라이언이 보낸 외국 투자자와 그들의 변호사, 나와 삼우로펌 조 변호사님을 비롯한 국내 투자자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건설 회사라 그런지 그룹 빌딩이 제법이다.”

“가지실래요?”

“줄 거야?”

“로펌이 월세 많이 내면 빌려드리겠습니다.”

“됐어! 우리 로펌도 자가야!”

조윤태 변호사님과 농담 따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를 향해 경계와 질시, 살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적지였다.

“한 대 팰까요?”

예민한 한진웅 대표가 나의 눈치를 보며 나섰다.

씨큐리티 직원들 20여 명이 안에 함께 들어왔다.

내 주변 중심으로 사방에 포진했다.

주식 100주씩을 지급해 소액주주로 둔갑시켜 놨다.

합법적으로 당당하게 등장하자 그룹 경호원들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밖에는 수십 명이 대기 중이었다.

정확하게 인수가 이루어진다면…… 오늘 내로 모두 쓸어버릴 참이었다.

“한 대표님, 여기 사업하는 자리입니다. 느긋해야죠~ 우리는 점령군인데.”

“흐흐. 알겠습니다.”

한진웅 대표 얼굴이 많이 폈다.

요즘 계속 좋은 일만 있었다.

“누나와는 잘됩니까?”

“……가을쯤에는 좋은 소식 들려드릴 것 같습니다.”

드워프 공장 미녀 누님과 연분이 난 한진웅 대표는 내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늦은 나이에 대박을 쳤다.

귀인을 만난 대가였다.

“부럽습니다.”

“……보스께서 그러시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진웅 대표도 많이 컸다.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주변에 여자가 많았지만 아직 난 임자가 정해진 몸이 아니다.

“그렇지. 장 대표가 부러워하면 안 되지. 난 세상에서 장 대표가 제일 부러워~.”

“저도 보스가 제일 부럽습니다!”

“왜들 이러십니까. 다들 청춘 때 저만큼 노셨잖아요.”

“그건 그거고 지금은 지금이지.”

“맞습니다. 그때는 그때죠.”

“두 분이서 계 묻었습니까?”

“계는 무슨~.”

“맞습니다. 순수하게 우리는…….”

말을 돌리지만 나 없는 사이에 뒷담화 좀 깐 거 같다.

“두 분 다 올 여름 휴가는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자가용 비행기와 숙박, 그리고 다른 일체 모두를 지원할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변호사님 월급도 많이 받는데 자비로 여행 하시죠~. 제주도가 좋더라고요. 중국인들도 많아서 어학 공부에도 도움이 되고, 가족들끼리 펜션 얻어 오붓하게 삼겹살도 구워 드시고 말도 타고~ 그림 좋네. 한 대표님은 평범한 연인들처럼 일본 여행 다녀오세요. 이코노미석이 작아서 앉을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네.”

“자, 장 대표! 아니 대표님! 그럼 안 되죠! 울 마누라가 이번 여름휴가를 자가용 비행기 타고……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 가는 게 꿈인데……. 나 좀 살려주라.”

조 변호사님은 바로 깨갱.

자가용 비행기 맛을 본 분들은 일반 비행기 쉽게 못 탄다.

이게 바로 중독의 미끼다.

그리고 가진 자의 갑질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한진웅 대표에게 향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아직 항복 전?

“신혼여행은 월세 방이 제격이죠. 저희 부모님들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표인데 회사 대출 받으면 모양이 그렇죠? 저축 많이 하셨죠?”

“그게…… 부모님이 연로하시고……. 주변 어려운 동료들이 많아서…….”

한진웅 대표는 사람이 좋았다.

군대 시절 인연들이 손을 벌리면 거절하지 않고 앞장서서 도와준다고 그랬다.

부모님도 연세가 많아 돈벌이를 하지 못했다.

한진웅 대표 그들을 도와주느라 노후재산을 상당히 날렸다.

약점을 사정없이 건들었다.

아무리 부하 직원들이라 해도 반항기를 보이면 가차 없이 싹을 다듬어야 하는 법!

“보스! 살려주십시오!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뭘요?”

“절대! 조 변호사님 말에 동조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언제나 대표님이 최고입니다!”

“와아아……. 한 대표. 나랑 술 마시며 장 대표님 주변에 여자분들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할 때는 언제고!”

“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아, 아닙니다! 조 변호사님이 보스를 두고 다시 태어나도 부러운 희대의 바람둥이라고 하셔서……. 그만 장단을 맞추다가…….”

“한진웅!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남자는 의라라며!”

“변호사님…… 저도 살아야죠!”

남의 회사 주총장에 와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킥킥…….”

“크크크.”

옆에 앉아 있던 씨큐리티 직원들이 두 사람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들……. 돌아가서 보자! 내가 휴가 못가면 너희들은 편할 거 같아? 다 같이 러시아로 가서 죽자!!!”

곰이 으르렁거렸다.

처저적.

언제 그랬냐는 듯 직원들이 웃음기를 지우고 각을 잡았다.

갑질은 갑질을 부르는 법.

짧은 농담에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물론 나와 동행한 사람들만 그랬다.

찌리리리릿.

사방에서 레이저가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우리만 행복해 보이는 게 꼴사나울 것이다.

“회장님 입장하십니다.”

스스슥.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느린 걸음으로 천일 그룹의 주인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친일파 가문의 현재 가주.

천준용 회장.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지만 몸은 정정했다.

아들과 손자를 감옥에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얼굴에는 미소를 띠었다.

눈이 크고 몸이 볼록한 게 독 두꺼비 상이었다.

느린 것 같지만 한 번 타깃을 노리면 상대를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관상.

욕심도 엄청 많아 보였다.

자기 것에 대한 집착도 보통 사람보다 컸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나를…….

찌리릿.

옆에서 속삭이는 비서의 말을 듣고 나를 쳐다보는 독두꺼비 천 회장.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빛에 드러난 살기가 장난 아니었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 회장이 씨익 웃었다.

자신만만한 모습이 오늘의 승리를 예상하는 눈치였다.

김칫국 혼자 원 샷 하고 온 표정을 보니 웃겼다.

귀빈석에 자리를 잡는 천준용 회장과 그 일행단.

그룹 규모에 비해 화려했다.

“후후후.”

냉소적으로 흘러나온 웃음.

“좋은가 보구나?”

그리고 뒤쪽에서 들려온 반갑지 않은 낯익은 음성 하나.

본능적으로 뒤를 향해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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