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9
회귀의 전설
459장. 거래의 조건 (4)
“대표님. 이 상황은 뭐죠?”
“뭐가 말입니까?”
“스웨덴 국왕과 약속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변수란 인생을 살아가는 또 다른 양념이죠. 매일 계획한 길로만 다니면 재미없죠~.”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장태산의 모습에 도도희는 할 말을 잃었다.
볼부 대표를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들던 그가 오늘은 스웨덴 국왕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아무리 명목상의 왕이라지만 유럽에서 왕실은 노블레스의 상징과 같았다.
아직도 귀족가문끼리만 결혼하는 집안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약속도 없던 스웨덴 국왕이 점심에 초청했다.
일국의 대통령 정도 되는 신분의 사람에게나 가능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아침에 볼부 대표의 연락을 받고 자가용 비행기로 스톡홀름으로 이동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실에서 보낸 시종이 공항귀빈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착륙하자마자 경호원들이 나타나 신속하게 모든 절차를 마쳤다.
외교관처럼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진짜 시종이야?’
도도희는 이쪽에 인사하는 머리 희끗한 신사를 보며 내심 놀랐다.
절도 있는 동작과 기품 있는 모습에 작위를 받은 고위 시종이라는 걸 느꼈다.
“반갑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폐하가 보내신 의전차량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가 죽어 한 마디도 못하는 도도희와 달리 대표는 모든 면에서 자연스러웠다.
왕을 만나는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해 본 듯 어색한 모습이 없었다.
‘우리 대표님…… 정말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니까.’
도도희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장태산 대표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국왕과의 면담이 실로 믿기지 않았다.
처저적.
덩치 좋은 왕실 경호원들이 빈틈없이 호위했다.
예포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의전이 확실했다.
삐뽀 삐뽀 삐뽀.
리무진 차량에 올라타자 경찰 오토바이가 에스코트했다.
도도희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신문에 날 일이군요.”
“조용한 게 좋은 겁니다.”
“이제는 놀라고 싶지도 않아요.”
“앞으로도 그런 자세 쭉 유지하십시오.”
“그런데 어젯밤에 찾아온 그분은…… 누구세요?”
도도희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깊은 밤이었다.
이것저것 볼부에 관한 서류를 정리하다 문득 술 생각이 났다.
기회였다.
화장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은은한 향수를 뿌리고 장태산 대표의 방으로 찾아갔다.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젊은 청춘들의 일탈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는 사람이 드문 해외에서 장태산과 짜릿한 추억 하나 정도 만들고 싶었다.
헤픈 여자는 아니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장태산은 매력이 넘치다 못해 터지는 사람이었다.
물론 주변에 여성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아빠도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
매력 있는 남자 곁에 아름다운 여성은 항상 넘치는 법이다.
강한 자에게 여성의 유전자는 저절로 끌렸다.
바람둥이 나쁜 남자에게 여성들이 빨려드는 이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도도희는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그사이 밤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문 앞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씁쓸한 마음만 안고 돌아섰던 도도희.
나름 용기를 내서 물었던 것이다.
“중요한 손님이었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늦은 밤에 찾아와요? 그것도 여성이?”
“죽다 살아났습니다. 많은 걸 묻지 마십시오~ 도도희 상무님~.”
죽다 살았다는 말에 도도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좋았기에 저런 표현을 쓸까 상상해 보았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거 아니니까 상상하지 마십시오.”
“피이~ 됐어요. 저도 알 건 다 아는 나이거든요!”
장태산 대표의 말에 발끈하는 도도희.
미국에서도 대표 주변에 미녀가 꼬였다.
어디를 가나 잘난 남자.
‘설마 오늘 공주도?’
스웨덴 공주 역시 아직 미혼이라고 들었다.
또다시 상상력을 발휘하는 도도희.
‘에이 설마~.’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고 진도를 빼도 너무 뺐다.
***
“바트시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웨덴에서 바로 비행기에 오른 로리아나.
그녀를 따르는 가문의 종이 물어왔다.
야훼 바트 로리아나의 말 한 마디에 한 남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암살자를 써서 제거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제거할 수 있었다.
지금껏 차일드 가문이 그래왔듯 말이다.
‘내가 예쁘다고…….’
자꾸 그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치명적 실수였다.
마음이 흔들렸다.
단 한 번 본 남자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하게 대놓고 로리아나를 향해 아름답다고 말한 사내였다.
와인에 취하기도 했다.
충분히 겁을 줬다 생각했기에 승리의 잔을 비웠다.
그러나 남자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로리아나에게 아름답다 말하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로리아나는 심장이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운 불의 눈동자에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명백한 패배였다.
야훼께서 아무런 신호도 내리지 않았다.
마법은 어떻게 아느냐 물어보지도 못했다.
와인 두 잔을 더 마셨다.
바로 눈앞에서 남자와 마시는 술에 빨갛게 볼이 달아올랐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남자의 몸에서 맡아지는 날 수컷의 체취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의 향취에 취해 버렸다.
어떻게 방에서 빠져 나왔는지 생각도 안 났다.
더 이상 머무르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문 밖까지 친절하게 배웅하던 남자는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로리아나의 볼을 스치듯 손으로 만졌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경호원들이 봤다면 총을 쐈을 상황이었다.
‘야훼께서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그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보통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야훼는 마음에 불쾌감을 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낯선 신의 침묵.
“바트시여…….”
“피곤하군요.”
피곤하다는 말에 조용히 사라지는 가문의 종.
‘이웃집 개를 때려잡는다……. 일본? 아니면 중국?’
한국의 이웃집 개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앙숙처럼 지냈다는 걸 로리아나도 익히 알았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해……. 둘 다 만만치 않아.’
점점 더 국력이 강해지는 세계 대국들이었다.
야훼 바트도 마음처럼 그들을 징벌할 수 없었다.
자칫 운영하고 있는 큰 판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빌려달라고…… 나의 힘을…….’
대놓고 차일드 가의 힘을 빌려 달라 말하던 뻔뻔한 남자.
“후후훗.”
로리아나 입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자칫 잘못 손을 잡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차일드 가였다.
그런데 겁 없이 빌려 쓰고 돌려주겠다고 건방진 발언을 하는 남자의 말이 밉지가 않았다.
“거래의 대가를 가져와 봐요……. 신과 제가 만족하다면…….”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는 로리아나.
날을 새운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깊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
“와우! 진짜……. 왕궁이에요.”
도도희가 놀라워했다.
“여름 궁전이었던 곳입니다.”
“알아요. 예전 왕가의 궁전은 시내에 있어요. 가 봤는데…… 정말 컸어요.”
바닷물이 흐르는 강이 보였다.
그곳에 큰 정원을 깔고 앉아 있는 색 바랜 녹색 지붕과 연한 황금색 궁전.
어제 밤새 내린 비로 3월의 초록이 대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왕궁 정문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궁전 로비 앞까지 차가 이동했고 내리자마자 안으로 곧장 연결됐다.
왕실 경호원들과 저 멀리 근위병들이 보였다.
지구에서 직접 보는 진짜 왕.
왕은 왕이었다.
보이지 않는 왕궁의 기세는 남달랐다.
이계에 있는 내 성보다 보기 좋았다.
성벽 같은 것은 없지만 왕궁 터가 넓었다.
“떨려요~.”
“뭐가 말입니까?”
“대표님은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습니다.”
“와아아아아. 전생에 대귀족이라도 돼요? 왜 이렇게 담담하세요.”
전생이 아니라 현생 백작이었다.
마법사도 없는 지구 왕 전혀 부럽지 않았다.
내 성에는 성수를 제조하는 신전도 몇 개나 있었다.
스르르르륵.
왕궁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역시!”
도도희가 또 감탄했다.
궁전 내부는 화려했다.
거대한 로비는 황금빛과 하얀 색이 대비를 이뤘다.
벽과 천정에 걸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모두 명화였다.
오직 왕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의 극치였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도 왕실의 역사를 구입할 수는 없었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시종장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도착한 공간.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차를 내오겠습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연회장인가 봐요.”
도도희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대기실 같습니다.”
궁전 안은 조용했다.
커다란 벽화와 황금 테두리가 둘러진 차 탁자, 의자가 세트로 품격을 더했다.
눈에 담아뒀다.
나중에 이계에서 먹고 살만 하면 인테리어를 이렇게 바꿔도 될 것 같았다.
“벽면에……. 이 그림 비싸겠죠?”
“대충 100만 달러쯤.”
“그거밖에 안 해요?”
“화풍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습니다. 왕실 소속 화가가 그린 작품입니다. 시대상을 반영하고 왕실 소유임을 감안한 가격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어머니가 미술관 관장입니다.”
“아! 맞아! 대표님 어머님 화가셨죠~.”
도도희와 짧은 시간을 이용해 수다를 떨었다.
남자 시종이 나타나 홍차를 준비해줬다.
“맛있어요~.”
도도희는 홍차와 함께 나온 쿠키를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한국 여성이 유럽 왕실에서 차를 마시고 쿠키 먹는 일이 흔한 상황은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시종장이 우리를 인도했다.
왕실이라 모든 게 법도에 따라 움직였다.
사업가의 움직이는 시간은 돈으로 환산되었지만 이곳의 시간법칙은 달랐다.
시종장을 따라 황금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하얀 문 앞.
안에서 자연스럽게 문이 열렸다.
“들어가십시오.”
시종장이 나를 먼저 입장시켰다.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푸른색 원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카리나가 눈에 들어왔다.
건강해 보이는 한 여인과 함께 서 있었다.
“카리나, 저 남자야?”
“응~”
“우후~ 좋은데?”
두 사람은 속삭인다고 속삭였지만 나의 귀에 쏙쏙 들렸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이렇게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어 라르손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직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실 소 연회장.
10인 이상 앉을 수 있는 탁자가 중앙에 놓여 있었다.
시종 여섯 명이 나비넥타이를 메고 대기 중이었다.
왕을 기다리는 듯 모두 기립해 있는 상황이었다.
“아돌프 16세 구스타프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왕의 등장을 알렸다.
뚜벅 뚜벅 뚜벅.
들려오는 차분한 발걸음 소리.
고개가 왕이 들어서는 문을 향해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자한 인상을 한 중년의 한 남자.
스웨덴 국왕의 등장이었다.
파바밧.
그와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 바이킹들의 두목과 접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