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6화 (455/1,284)

 # 456

회귀의 전설

456장. 거래의 조건 (1)

처저저저적.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공항.

거대한 자가용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한 후 일단의 경호원들이 VIP 출구로 나왔다.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눈빛이 예리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황 경비대도 위에서 지령을 받아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은 낯선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스웨덴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국왕도 저런 식의 경호는 받지 못했다.

투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남아 있던 눈이 봄을 재촉하는 스웨덴의 봄비에 녹아내렸다.

저녁임에도 날씨는 오전보다 따뜻했다.

여자 경호원 한 명이 커다란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 안에서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늘씬한 여성이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새까맣게 선팅 된 벤츠 방탄차에 올라탔다.

부우우우웅.

빠르게 차량이 출발했다.

10여 대의 경호차량이 앞뒤를 에워싸며 도로를 질주했다.

뭔가 목적이 있는 듯 거침없이 비가 쏟아지는 도로 위를 치고 나갔다.

***

‘반반? 도대체 그게 무슨…….’

페어 라르손은 돈키호테 같은 동양 청년의 말이 계속 혼란스러웠다.

쉽게 얻으려했던 투자금 대신 혹을 붙인 격이 되어 버렸다.

나이 어리다고 얕보는 감정은 진작 사라졌다.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다니엘을 빤히 바라봤다.

“……정부 지원금을 얻어낸 만큼 지원하시겠다는 의미인가요?”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의 의중을 물었다.

“정답입니다!”

“!!!”

정답이라는 말에 페어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조선산업 몰락 당시 스페인 정부는 제조업이 망할 때 국가 재정을 투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쏟아 부어봤자 경제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런 상황에 다니엘이 재정 투자를 원했다.

“부,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십니까?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볼부는 매각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사업의 묘미가 본래 불가능한 걸 가능케 하는 일 아닙니까?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조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10억 달러 받아내면 10억 달러 지원합니다. 조선산업에도 40억 달러를 던졌던 스웨덴 정부입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고용인원을 창출해 내는 자동차 산업입니다. 법률적으로 보장도 하겠습니다. 전 거짓말하는 투자자가 아닙니다.”

“으음…….”

페어 라르손은 답을 하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다니엘의 제안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신차 라인업 몇 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당 4억 달러 이상이 필요했다.

볼부 특유의 안전 시스템을 장착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보다 개발비도 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최소 10억 달러만 유치하면…….’

정부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제안이었다.

20억 달러라면 몇 년간은 버틸 수 있는 자금이었다.

반반이라는 미끼가 제법 입맛을 자극했다.

“그리고 북미 공장도 추진할 생각입니다.”

“네? 북미 공장요?”

갑작스런 다니엘의 발언에 페어 라르손 대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볼부 판매량이 떨어진 이유는 북미 공장이 없어서였다.

관세 문제를 비롯해 운송비가 많이 붙어 경쟁력이 떨어졌다.

딜러망과 서비스망이 엉망이라 판매를 하고도 욕을 먹었다.

미국 소비자들은 AS를 중요시했지만 볼부는 서비스센터가 부족했다.

하지만 북미 공장이 세워지면 부품 수급이 원활해진다.

자연스럽게 서비스 만족도가 올라가면 판매도 뒤따르게 된다.

“안 됩니까?”

영악한 다니엘의 물음에 페어 라르손은 그만 속을 들킨 듯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안 되는 게 아니라 무조건 되게 만들어야 했다.

“정말인가요?”

카리나가 재빨리 되물었다.

“유럽 물량은 이곳 스웨덴에서 제조될 겁니다. 동시에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시장에도 노크할 생각입니다.”

“……자동차 공장은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페어 라르손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재차 확인해 왔다.

자동차 라인 한 개 증설하는 데 투자되는 자금이 천문학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볼부가 북미 시장을 노크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투자자를 못 믿습니까?”

“미국 자동차 노조는 강성입니다. 자칫 발목을 잡히면 큰일입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이번 미국발 금융 위기로 노조원 상당수가 길바닥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제야 자신들 처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 셈이지요. 앞으로 미국에 그런 강성 노조가 다시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 겁니다. 회사가 존재해야 노조도 있는 겁니다. 스웨덴은 미국 노조와 다르길 기원합니다.”

‘나이에 비해 영특하군. 도대체 모르는 게 뭐야?’

카리나는 내심 감탄했다.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대부분 선수들은 뇌까지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보통 선수들과 달랐다.

볼부 대표인 아버지를 눈앞에서 들었다 놨다 멋대로 부리고 있었다.

‘저 남자라면…….’

카리나는 심장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은 볼부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튼튼하지만 멋대가리 없는 차로 불리는 불보.

이제 그 이미지를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조조정 여파로 쓸 만한 자동차 공장이 몇 개 나왔습니다. 그걸 인수하고 미국인들을 고용하면 주에서 상당한 지원을 할 겁니다. 10년 정도는 면세를 챙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자신이 계획한 플랜을 설명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페어 라르손도 희망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북미 공장까지 가동되면 규모면에서 열악했던 경쟁력이 실현될 수 있었다.

부품 값이 하락되면 가격이 다운될 여지가 커진다.

“부품과 안전사양 모두 최고로 만들어야 합니다.”

“네?”

“럭셔리 브랜드를 지향할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희망에 부풀던 페어 라르손의 머리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AS 보장 기간은 최소 5년 10만 킬로미터입니다. 엔진과 미션은 15만 킬로미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건 너무 깁니다!”

“볼부가 갖고 있던 잔고장의 악명을 이제 떨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안전하고 튼튼하지만 볼부는 잔고장으로 유명했다.

“구매자들의 감성품질을 만족시키십시오. 자신 없다면 청산하겠습니다.”

볼부 대표 페어 라르손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맛있는 요리가 연속 서빙되고 있었지만 먹지도 못하고 입에 쓴 물이 돌고 있었다.

희망과 동시에 고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첨단 안전장비부터 시작해 오디오, 브레이크, 전장 부분 모두 최고를 지향하십시오. 투자자로서의 명령입니다.”

한 치도 물러섬도 찾아볼 수 없는 강경한 어투였다.

“그리고…….”

순간 장난꾸러기 같이 눈동자를 빛내는 다니엘.

룸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그의 눈에 빨려들어 갔다.

‘……내가 어리게만 봤어. 진짜……. 대단해.’

월가 출신 도도희는 장태산 대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처음 만날 때부터 평범하지 않았던 대표였다.

갈수록 그 능력의 끝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엄청난 재력이 있음에도 볼부 대표를 보란 듯이 쪼았다.

동시에 미끼를 던져 기가 죽지 않게 만들었다.

투자자로서는 200점짜리의 노련한 자세였다.

도도희는 오늘 이 순간을 똑똑히 기억에 담았다.

오늘의 협상은 미래 자신의 자산이 될 게 분명했다.

“새로운 차종 개발은 준비 되고 있습니까?”

“네?”

“지금 연구 중인 신차 말고 다음 차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게…….”

회사 매각이 되는 마당에 신차 말고 그 다음 차를 계획할 여력까지는 없었다.

페어 라르손은 이쯤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량 개발은 최소 4년에서 5년을 내다보고 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소비자들의 취향이 더 빠르게 변합니다. 4년 주기로 신차를 뽑아내야 합니다.”

다니엘의 자동차에 대한 박식함과 제시하는 비전에 페어 라르손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자동차는 전기 자동차입니다.”

“그건 너무 이릅니다! 아직 배터리뿐만 아니라 충전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무리입니다!”

볼부도 대비하고 있지만 아직은 개략적이었다.

그런데 과감하게 전기 자동차 개발에 대해 언급하는 투자자.

페어 라르손이 처음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투자 금액은 최소 100억 달러입니다.”

“100억 달러!!!”

“와우!”

“하아…….”

가히 탄성에 가까운 경악성이 룸 안에서 터졌다.

이 정도면 쉽게 덤빌 수 없는 큰 프로젝트였다.

“자금은 모두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페어 라르손 대표는 이번 투자 건만 처리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도 볼부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강렬한 밀림의 사자와 같은 눈빛과 일갈.

페어 라르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보스. 땅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스웨덴 말뫼를 중심으로 예테보리 땅이나 건물을 구매하십시오.”

- 알겠습니다.

“홍콩 건물 구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대형 빌딩을 비롯해 약 300억 달러가 투자 됐습니다.

“자금을 아끼지 마십시오.”

- 보스 뜻대로 되실 겁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제주도 땅도 구입하십시오.”

- 제주도요? 섬입니까?

로버트 라이언은 제주도를 몰랐다.

“네. 섬입니다. 외국 투자자에게 개방적이니 해변이 보이는 땅들을 중점적으로 매입하십시오.”

- 진행하겠습니다.

가상의 화폐를 유형의 자산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 경기침체가 끝나면 전 세계적으로 부동산 버블이 일어난다.

투자의 다변화가 필요했다.

나 또한 사모펀드를 조성해 여기저기 건물들을 구입했다.

로버트 라이언이 만들어 준 여러 사모펀드를 통한 비밀 매입이었다.

“그럼 또 연락하겠습니다.”

- 쉬십시오.

볼부 대표와는 적당한 타이밍에 대화가 끝났다.

요리는 맛있었다.

정신없이 지시를 하달 받은 페어 라르손은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일궈내야 했다.

“능력을 한 번 발휘해 보세요. 후훗.”

기회는 내일 딱 하루로 한정했다.

그런 만큼 자신들의 절박함을 나에게 보여야 할 것이다.

그깟 투자금 수십억 달러는 거대 자금 흐름에서 푼돈에 불과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볼부 자동차의 스웨덴 내에서의 역량을 보고 싶었다.

정부를 상대할 수 있는 자만이 노조와의 관계 개선에서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말뫼의 눈물로 인해 제조업 일자리가 부족한 스웨덴이었다.

투자자를 환대하지 못하면 전적으로 그들의 손해였다.

거래에는 항상 조건이 따라 붙는 법이다.

거절하면 청산 절차를 밟아 모든 노하우를 빼앗을 것이다.

“야경은 마법이야.”

호텔 룸에서 바라보는 스웨덴의 야경.

포도주를 몇 잔 마셔서 그런지 감정적 분위기가 더해졌다.

도도히 흐르는 강과 작은 배, 지상의 빛과 밤하늘의 별이 몽환적인 느낌을 만들어냈다.

또로록.

룸서비스로 제공된 최고급 와인을 한 잔 더 마셨다.

스웨덴의 밤은 늦게 찾아왔지만 진하기의 맛이 달랐다.

도시가 화려하지 않은 데 반해 작은 빛들만으로도 운치가 더했다.

오염되지 않은 북유럽 공기는 열린 창으로 시원하게 들어왔다.

스스스슷.

그때 은밀하게 느껴지는 기운.

“???”

범상치 않았다.

사방이 갑작스럽게 고요한 공기로 변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

딸깍.

잠가놓았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사박사박.

작은 발소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오는 그림자 하나.

여인이었다.

기도 숄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여인.

그녀의 주변으로 거짓말처럼 신비한 빛들이 떠다녔다.

이건 마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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