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5화 (454/1,284)

 # 455

회귀의 전설

455장. 모두가 행복한 인생 (3)

‘카리나가 안다고?’

페어 라르손은 다니엘 장을 안다는 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딸은 대표 여비서의 위치이지만 해외 출장은 거의 없었다.

페어는 딸의 가까운 교우 관계부터 웬만한 사회 인맥은 모두 알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서 운동하는 게 취미인 딸이다.

그런 딸이 다니엘에 관심을 보였다.

페어가 봐도 괜찮은 녀석처럼 보였다.

동양인치고 키도 컸고 체격도 탄탄했다.

얼굴도 잘생겼다.

하지만 대놓고 미인계를 펼쳐도 되는지 묻는 카리나 취향인지는 의문이었다.

남자와 연애 경험도 없고 주변에 여자 친구들만 있기에 카리가 한때 레즈 쪽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었다.

“전 모릅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다니엘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TV에서 봤습니다! 결승점에서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거예요.”

“아!”

“팬입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었어요. 제 친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어요~.”

카리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질주하던 다니엘의 모습은 스포츠 선수였던 카리나에게는 대리 만족이 느껴질 만큼 짜릿한 영상이었다.

“친구가 절 압니까?”

“네~ 너무 멋있는 동양 남자라고 했어요.”

“누~ 구???”

“소피아요.”

“아……!”

다니엘 장이 두 번째 신음을 흘렸다.

“카리나! 소피아도 아는 분이야?”

“아빠~ 이 분이 이번 동계올림픽 크로스컨트리 메달리스트에요.”

“와우! 정말?”

“네!”

“하하. 대단한 분이셨군요. 우리 딸도 어린 시절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였습니다.”

‘메달리스트? 대단하군!’

페어 라르손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북유럽 국가에서 노르딕 스키 분야는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유럽 축구와 버금갔다.

그리고 부녀 모두 극성팬이었다.

볼부가 어려운 와중에도 북유럽 크로스컨트리 대회 후원사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페어 라르손의 눈에 다니엘 장이 다르게 보였다.

스웨덴 어도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아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에 월가의 투자자였다.

문득 이 정도면 딸 카리나와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인계…… 라.’

그리고 이어지는 사업 생각.

카리나가 좋다면 페어는 말릴 생각이 없었다.

동양인 사위도 나쁘지 않았다.

이민자가 많은 스웨덴은 다른 어느 곳보다 인종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똑똑.

룸 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다니엘이 답했다.

스르륵.

자동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하는 호텔 주방장과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사내.

‘호텔 지배인 레이몬드?’

예테보리 호텔 중 가장 좋은 팰튼 호텔 지배인이 나타났다.

같은 지역이라 가끔 볼 기회가 있어 얼굴은 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테이블을 찾아주는 경우는 없었다.

영국 귀족가문 출신이라며 제법 비싸게 굴었다.

그런 레이몬드가 호텔 총주방장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한껏 조심스런 몸짓.

‘설마?’

페어가 다니엘 장을 바라봤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텔 총 지배인 레이몬드 웨일이라고 합니다.”

다니엘 장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하는 총지배인.

“반갑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는 다니엘 장.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다들 눈치챌 정도였다.

“귀한 손님을 위해 특별히 피에르 숑 총주방장이 직접 요리를 담당했습니다.”

총주방장까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총주방장님이 최상의 예를 표했다.

페어와 카리나는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에 당황스러웠다.

팰튼 호텔을 가끔 이용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른 호텔도 아니고 콧대 높은 영국 출신 총지배인과 이탈리아 출신 총주방장이 직접 찾아왔다.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었다.

드르르륵.

말끔하게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서빙을 시작했다.

“토스카나식 빤짜랄레와 낙지와 가리비로 맛을 낸 흰콩 주뻬따, 밀라노식 미네스트로네, 레몬소스로 향초향미 된 대구튀김, 빤체타를 곁들인 양갈비, 바치 디 다마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총주방장 피에르가 요리 하나하나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많은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고마움을 표하는 동양 청년.

“프랑스 산티 와이너리에서 제조한 1999년산 아모로네 델라 발폴리첼라입니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호텔이 보유한 최고급 와인을 들고 나타난 지배인 레이몬드가 거침없이 와인병을 오픈했다.

이 정도는 호텔 사주에게나 권하는 행동이었다.

“레이디부터 부탁합니다.”

동양 청년이 카리나와 도도희를 가리켰다.

빙긋 웃으며 지배인이 그녀들의 잔에 붉은 포도주를 채웠다.

그리고 다니엘의 눈빛을 따라 페어 라르손의 잔을 채웠다.

“환대 고맙습니다.”

그제야 잔을 받는 다니엘 장.

“다시 한 번 호텔을 찾아주심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짧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총지배인과 주방장.

‘도대체…… 이 친구 위상은 어디까지야?’

호텔 지배인과 총주방장이 쩔쩔매는 동양 청년 다니엘 장의 모습은 페어가 봐도 신기했다.

월가 투자자가 괜히 전권을 보낸 게 아니었다.

최고급 포도주를 들고 페어 라르손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늘 일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모두가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포도주 잔을 들고 건배사를 제안하는 다니엘 장.

“위하여~.”

그는 즐거움으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성들의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여유로움을 한껏 만끽했다.

모두 다 맛 좋은 포도주를 비웠다.

그리고…….

“그럼 식사하면서 사업 얘기를 해볼까요?”

***

사람은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거다.

카리나가 볼부 자동차 대표의 딸이었고 그녀는 동계올림픽 노르웨이 국가대표였던 소피아의 친구였다.

세상이 갈수록 좁아져가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며 그 파장도 커졌다.

국경을 넘나드는 SNS로 모두 친구가 됐다.

일반인이 찍은 동영상이 업로드 되며 지구촌으로 묶이게 된다.

이제부터 더 조심해서 살아야 했다.

“페어 대표님.”

“네.”

호텔 총지배인이 때마침 나타나 분위기를 띄웠다.

나를 더 신비하고 어렵게 대하는 페어의 눈길.

나이 어린 동양인 청년이라 얕보고 있다가 회로가 꼬였을 것이다.

“자금이 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새로운 모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신규 투자비가 필요합니다.”

수프를 부드러운 식전 빵으로 찍어먹으려 사업 얘기를 진행했다.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투자가 이루어지면 성공할 자신 있습니까?”

“네?”

“볼부 자동차 판매 순위가 세계 자동차 메이커에서 2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간 판매대수는 30만 대 안쪽. 그런데 여기서 더 자금을 투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확 찌르는 일격에 페어가 당황했다.

볼부의 아픈 구석이었다.

“1980년대 초반처럼 연 100만 대 이상 팔 자신이 없습니까? 새로운 모델로 말입니다.”

수프에 이어 샐러드를 먹었다.

룸의 공기가 더운 편이 아닌데 페어 라르손 대표는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의 땀을 닦았다.

곤혹스러운 시간일 것이다.

“당분간은 힘들어요. 만들어도 판매할 딜러 망이 부족해요.”

조용하던 카리나가 끼어들었다.

“포드에서는 볼부의 가치를 겨우 20억 달러도 안 되게 평가했습니다. 사실 투자자 자문 그룹에서 존속가치보다 청산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예테보리에 있는 볼부 땅을 팔고 해외 자산을 매각하면 5억 달러쯤 이익이 난다고 말입니다.”

“헛!”

청산이라는 말에 페어가 순간 숨을 들이켰다.

연속된 팩트 공격에 정신을 못 차렸다.

“그들은…… 도둑놈들이에요. 투자를 약속해 놓고 스웨덴 정부 보조금만 받아갔습니다. 세계적 경영 위기가 닥치자 일체 지원을 끊었을 뿐만 아니라 협의도 없이 회사를 매각했습니다.”

카리나가 분한 듯 말을 이었다.

“예상했던바 아닙니까? 미국 자동차 회사 전매특허입니다. 각국의 망해가는 자동차 공장을 인수해 정부 지원금으로 차를 팔고 지원금이 줄어들면 바로 청산하거나 팔아버리죠. 어차피 기술 특허료나 자문료로 두둑이 배를 불린 상태니 손해날 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자본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돈이 되는 곳에 돈이 흐르는 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볼부는 돈을 유혹하기에는 매력이 부족하군요. 눈앞의 카리나 양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매우 부족합니다.”

스웨덴 미녀보다 매력 없다는 말에 페어 라르손은 눈을 감았다.

이 시기에 볼부는 중국계 자본을 지원받아 무사히 새로운 모델을 출시했다.

생각보다 대대적으로 히트를 쳤다.

제2의 볼부 전성기를 맞이했다.

난 이들의 펼쳐질 미래를 알고 있지만 저들은 몰랐다.

사람 골리는 건 취미가 아니었지만 볼부 경영진은 짜야 했다.

바짝 마른 오징어를 짜도 수분이 나오는 법이라고 했다.

어차피 뽑아낼 신자동차라면 돈이 적게 드는 게 좋았다.

괜히 막 풀어주면 호구 못 벗어나는 법이다.

거기에다 카리나 옷차림이 범상치 않았다.

대표가 자신의 딸을 비서로 채용한데 이어 이런 곳에 저런 옷차림으로 보낸 건 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도희가 불편한 시선으로 카리나의 깊게 패인 가슴골을 훔쳐봤다.

북유럽 미녀의 몸매와 피부는 생각보다 매끄럽고 보기 좋았다.

동양적 미녀인 도도희가 질투할 만했다.

“칭찬 같지만 슬픈 일이군요.”

카리나는 의외로 똑똑했다.

똑똑한 미녀는 어느 시절에든 귀한 법이다.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언제나 현실은 냉혹한 법입니다.”

또로로록.

와인 한 잔을 더 따라서 마셨다.

분위기상 셀프.

도도희는 도수도 없는 안경을 쓴 상태로 상황을 지켜봤다.

내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지금 상대를 압박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안다.

나를 보며 반짝이는 눈동자.

사실상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럼 투자는…….”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뭔가 담보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담보라 하시면???”

딸보다 눈치가 덜 빠른 페어 라르손.

얼굴을 보니 경영자보다는 기술자 쪽 관상이었다.

우직한 인상으로 보아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포도주를 마시며 시간을 적당히 끌었다.

대놓고 말하면 생 양아치 취급 받을 게 뻔했다.

카리나도 관심 있게 날 지켜봤다.

도도희는 나의 다음 말을 한껏 기대하는 눈치다.

“스웨덴 정부의 지원 같은 거 말입니다.”

“네? 정부 투자요?”

“왜 어렵습니까?”

“그게……. 아직 전 세계적 외환 위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정부가 여력이 없습니다.”

“페어 라르손 대표님은 볼부 대표가 아니라 정부 대표입니까?”

“……끙.”

자신도 모르게 앓은 소리는 내는 페어 라르손.

나를 냉혹한 해외 악덕 투자자로 오인한 것 같았다.

“동양 격언에 ‘오는 돈이 고와야 가는 돈도 곱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

스웨덴어로 재풀이한 우리나라 고유의 멋진 격언(?)

페어 라르손과 카리나가 인상을 굳히며 경청했다.

반대로 도도희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음을 참았다.

“자문료를 비롯해 법정 비용까지 합해 20억 달러가 투자 됐습니다. 그 돈이면 다른 유수한 제조업체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입니다. 지금은 돈이 주인인 시대입니다. 세계에 흑자도산 하는 회사들이 널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돈에 대해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투자자들이 청산 얘기를 꺼낼 겁니다.”

“…….”

심각한 표정의 페어 라르손이 생각에 잠겼다.

“볼부에서 고용하는 2만 명이 넘는 직원과 그 가족, 그리고 하청 업체와 그 직원들까지 합치면 10만 명이 훌쩍 넘습니다. 페어 라르손 대표는 말뫼의 눈물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

스톡홀름과 예테보리 다음의 스웨덴 대도시 말뫼.

그래봤자 인구 30만의 도시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컸다.

한참 잘나가던 스웨덴 조선산업 몰락의 산증인이었다.

연대중공업에 팔려갔던 말뫼에 위치한 조선사의 세계 최대 골리앗 크레인.

그 녀석을 두고 말뫼의 눈물이라 불렸다.

스웨덴 조선산업이 망할 때 단돈 1달러에 연대에 팔렸다.

수조가 들어갔던 스웨덴 정부의 지원에도 살아남지 못한 조선산업.

미래의 한국 모습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협박입니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페어 라르손의 목소리.

그의 파란 눈동자에서 활활 타오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화판.

“제가 건배사로 말하지 않았나요? 모두가 행복한 인생을 위하고 싶다고~”

싱긋 웃으며 페어 라르손을 바라보았다.

나를 노려보듯 강하게 마주보는 페어 라르손.

“그럼…… 그 쪽에서는 무얼 해줄 수 있습니까?”

이제야 볼부 대표다운 거래 자세를 보였다.

“반반.”

“???”

두 부녀는 나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에 반해 한국인이라 바로 알아듣는 도도희.

뭐든 쉽게 얻으면 헤프게 사용되는 법.

난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잽 한 방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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