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
회귀의 전설
453장. 모두가 행복한 인생 (1)
“그게 정말이야?”
“맞다니까요~. 당신이 직접 확인하면 알 것 아니에요~”
“아니 요즘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어딨어? VIP 와이프도 그런 짓 못해.”
“그러니까 미친놈 맞죠.”
“흐음…….”
오늘따라 얼굴이 요염해 보이던 와이프와 방금 전 진한 시간을 보낸 서울지방국세청 청장 유광석.
침대에 누워 아내가 물어온 정보를 곱씹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또라이가 카드로 수십억을 긁었단다.
돈을 그렇게 벌었는데 아직 사찰이 없었다는 건 줄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알아봤더니 동룡 주 회장 이복 여동생이래요. 아버지가 남겨준 비자금 시효 지났다고 들고 나온 것 같아요.”
“그 집안이 무기명 채권 좋아한다는 소문은 있었지…….”
“여보. 한 번 맡아서 파 봐요. 찬병원 사모가 조국일보 통해서 도와준대요.”
“조국일보라…….”
“큰 그림 그리래요. 2년 뒤에 총선이잖아요. 여차하면……. 그쪽 공천도 노려볼 만하잖아요.”
“정치, 위험한 거야.”
“그래도 남자라면 한 번 도전해 봐야죠. 사실 당신이 뭐가 부족해요? 인물도 잘 났고 한국대 학벌에 고시까지 패스한 인재잖아요. 여차하면……. 아파트 하나 팔면 돼요.”
“이 사람이…….”
아내를 가볍게 책망했지만 유광석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청장이 VIP와 죽이 잘 맞았다.
몇 년 동안 붙어 있을 게 확실했다.
이럴 때 공천이라도 하나 받으면 지금의 직책 정도 때려칠 만했다.
어차피 세무 공무원으로는 거의 끝까지 왔다고 볼 수 있었다.
머리 위에 국세청장이 있었지만 끗발은 서울지방국세청이 더 좋았다.
대기업 본사들은 대부분 서울에 있었다.
그들에게 저승사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찬병원 사모 인맥이 넓어요. 언론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검찰도 움직일 수 있어요. 기회예요. 이번에 여론을 잘 타면…….”
욕심 가득한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이연숙.
2인자 지방국세청 청장 소리보다 국회의원 사모 소리를 듣고 싶었다.
당선되는 순간 4년 동안은 제대로 귀족처럼 살 수 있었다.
강남에서도 국회의원 사모는 장차관급으로 대우받았다.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집안이 되는 것이다.
“한 번 알아볼게.”
유광석이 미끼를 물었다.
손해 날 장사는 아닌 것 같았다.
얼마 전 장만수 장관의 지시를 받은 백성철 청장이 직접 애들을 움직였다가 피를 봤다.
TS 그룹을 손봤다가 미국에서 엄청난 항의를 받은 것이다.
이때 기회가 찾아왔다.
와이프 말을 빌리자면 상대할 자는 국내인이었다.
동룡 전 회장의 첩딸과 그 아들, 그리고 비자금.
머리에 그림이 그려졌다.
잘만 요리하면 여론을 타고 뭔가 큰 건을 터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보……. 난 당신만 믿어요.”
한 차례 뜨거운 열풍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미련이 남은 아내의 손길.
오늘따라 더 뜨거운 피가 유광석을 다시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아아…….”
그리고 이어지는 폭풍의 밤.
그렇게 파멸로 향한 음모는 베갯머리에서 싹틔워지고 있었다.
***
“보스. 사방에서 보는 눈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요?”
“경호를 더 강화해야 합니다. 겨우 눈치 챌 만큼 대부분 특수 훈련을 받은 놈들입니다.”
“하하. 제가 꿀처럼 보이나 봅니다.”
“보스…….”
가볍게 웃자 한진웅 대표가 뒷말을 뱉지 못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집에서나 회사, 심지어 학교에서도 시선을 감지했다.
워낙 주변에 적이 많아서 이제는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어제 학교에서처럼 알아서 처리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아린 선배 강단 있었다.
사법시험 패스 했다고 기고만장한 선배들을 코너로 몰아 싸다귀를 날렸다.
앞으로 그들은 찍소리 못하고 졸업해 연수원에 들어갈 것이다.
학교 선배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인생 한 방은 좋지만 쌩 양아치 짓은 사양해야 하는 법이다.
법률가가 되어도 좋은 놈들 되기는 글렀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연수원에서 지랄 떨면 바로 지옥을 보여줄 참이었다.
“러시아 파견 직원들은 확보했습니까?”
“20명 꽉 채웠습니다.”
“조건 얘기했죠?”
“다들 총기 사용된다는 말에 입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탱크나 공격 헬기 말고는 다 됩니다.”
“보스……. 정말 그 약속 믿어도 됩니까? 러시아 정부가 그걸 봐줍니까?”
“높은 연줄에 친구가 있습니다.”
“……존경합니다. 보스!”
줄도 가장 높은 줄이었다.
러시아 차르가 내 땅에서는 총기 사용을 허가했다.
탱크나 공격 헬기 말고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까지 봐준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누가 쳐들어와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A.T 씨큐리티 직원 대부분이 총기 사용이 자유로운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직원 확보는요?”
“신입 채용 공고 냈습니다. 모두 사명감 투철하고 조직에 목숨 바쳐 충성할 놈들만 뽑을 겁니다. 업계에 소문이 쫙 퍼져 서로 오려고 난리입니다.”
경호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갈수록 적들 규모가 커졌다.
국내파부터 해외파까지 장난 아니었다.
믿을 만한 인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인재는 곳곳에 넘쳐났다.
정권이 바뀌면서 정의로운 자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왔다.
옥석을 골라 내 사람으로 만들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넓고 인재는 부족했으며 자금은 넘쳤다.
“저 없는 동안 회사와 가족들 잘 부탁합니다.”
“동행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 대표님 이곳에서 할 일을 하셔야죠. 스웨덴은 치안이 좋은 곳입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철저하게 눈을 부릅떠 주십시오……. 적은 항상 가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한진웅 대표.
그를 향해 신의의 미소를 보냈다.
***
“이제 별 인사들이 다 오는군.”
볼부 자동차의 CEO 페어 라르손은 오늘 방문한다는 손님 문제로 예민했다.
지주회사였던 볼부는 회사가 분리되어 있었다.
미래에 생존이 어렵다는 1999년 볼부 회장이었던 가브리엘 요한슨 회장의 결정으로 승용차 부분이 매각됐다.
자동차 판매 순위가 세계 20위권 밖이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로 버스, 건설기계, 대형 트럭 부분만 남기고 포드에 팔렸다.
탁월한 결정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트럭 회사를 인수해 유럽 최고이자 세계 2위의 트럭 회사가 됐다.
건설 중장비 부분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볼부 자동차는 스웨덴의 자긍심에 상처를 냈다.
스웨덴 국민차로 불리며 1920년부터 생산됐던 자동차였다.
미국 포드사에 팔린 것도 자존심 상했는데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미국계 사모펀드와 지금 방문 예정인 한국 지분 투자자 소유가 됐다.
“대표님. 투자자 쪽에서 모든 전권을 위임 받은 인사라고 했습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자칫 공장을 폐쇄할 수도 있습니다.”
여비서 카리나가 차가운 금테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며 대표의 화를 누그러트렸다.
“중국인이야?”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설마 우리 기술을 빼돌려 연대에 팔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 회사보다 열배 이상 판매를 올리고 매출을 내는 연대 자동차입니다. 스파이들이 빼 갈 건 다 빼갔습니다.”
“젠장……. 그런 자존심과 명예도 없는 회사에 밀리다니…….”
대표 페어 라르손은 입맛을 다셨다.
그의 할아버지는 볼부 창업 시절 최고 엔지니어였다.
페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볼부를 사랑했다.
과거 회사가 쫄딱 망해가면서 보유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됐지만 마음만은 창업자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세계적 불경기에 연간 20만 대 판매도 벅찼다.
자동차 안전과 기술의 대명사 볼부라 불렸지만 허명에 불과했다.
스웨덴이라는 국가적 위치와 자본이 딸렸다.
디자인은 시대에 맞지 않았다.
회사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자본가들의 투자를 받아야만 했다.
“그게 현실입니다.”
여비서지만 딱딱한 북유럽 스타일의 미녀인 카리나는 현실을 직시했다.
사적인 감정은 회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새로운 투자자가 인원 정리를 원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인구를 비롯해 이렇다 할 대형 제조업이 드문 스웨덴 입장에서는 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동차 업계가 고용하는 인력이 수만 명이 넘었다.
최대한 투자자의 비위를 맞춰줘만 했다.
“언제 도착한대?”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시간을 몰라? 국제선 타고 오는 거 아냐?”
“자가용 비행기로 온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직접?”
“공항에 알아보니 대형 여객기 기종입니다.”
“끄응……. 우리 회사보다 낫군.”
볼부 본사가 위치한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공항 비즈니스 대기실에서 페어 라르손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신음만 흘렸다.
비서에게 툴툴거렸지만 그도 내심 조심스러웠다.
투자자 한 마디에 회사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비록 외국계에 팔렸지만 본사만 운영되면 됐다.
안정적인 자금이 지원되어야 새로운 모델에 대한 투자를 진행할 수 있었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20억 달러도 안 되는 금액에 팔렸습니다. 그게 우리 회사의 시장 가치입니다.”
여비서 카리나는 다시 한 번 현실을 주지시켰다.
“카리나. 남들 없을 때는 아빠인 걸 좀 인식해 줄 수 없니. 너무 딱딱해.”
“싫습니다. 지금은 공적인 자리이고 시간입니다.”
“그 고집은 꼭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집안 유전이라는 걸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대표 페어 라르손의 비서 카리나 역시 라르손 가문의 사람이었다.
특채가 아닌 직접 면접을 보고 실력으로 입사했다.
회사에서 카리나와 페어 대표가 부녀 사이라는 걸 몇몇 임원들만 아는 정도였다.
사생활에 철저한 스웨덴 문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띠리리리리리.
그때 카리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헬로.”
카리나가 부드럽게 전화를 받았다.
- 도착했습니다.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 출구입니까?”
- 3번 출구 앞입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카리나는 통화를 하는 중에도 아빠에게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자리에서 큰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는 페어 라르손.
툴툴대던 말과 달리 슈트를 단정하게 매만졌다.
동양인들은 첫 인상과 예절을 중시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저벅저벅.
북유럽 유전자를 소유해 키가 195cm에 달하는 페어 라르손과 180cm의 카리나 라르손이 빠른 걸음으로 공항을 걸었다.
금발이 보기 좋게 찰랑거렸다.
유전자가 좋은 중년 미남과 미녀였다.
“동양인이니까 키가 작겠지? 아빠가 먼저 그 녀석을 키로 눌러버릴 거야. 그리고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거지~. 우리 조상님이 바이킹이라고 하면 그 녀석이 쫄겠지. 크크크.”
유쾌한 상상을 하며 페어 라르손이 카리나에게 농담을 던졌다.
“대표님 그런 말도 안 되는…….”
“카리나……. 조국과 동료를 위해 미인계라도 펼쳐. 너라면 어떤 남자도 다 넘어올 거다.”
“대표님. 개인적인 사생활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아빠의 농담에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카리나.
뚝.
그렇게 입국장 3번 출구로 가던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무거운 여행 가방 대신 가벼운 서류 가방만 들고 있는 두 명의 남녀.
기다리던 투자자들이 확실했다.
“모델들이야?”
“우후~”
3번 출구를 지나는 사람들이 두 남녀를 보고 감탄했다.
강렬한 인상에 뒤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양인 치고 단단한 체격에 키가 큰 모델 같은 남자와 그 옆에 서 있는 그림 같은 미녀.
“아빠……. 미인계…… 써도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