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2화 (451/1,284)

 # 452

회귀의 전설

452장. 파멸의 골짜기를 파는 자들 (3)

“이 새끼 맞네…….”

도쿄도 덴엔쵸후 부촌에 자리한 3층짜리 대저택.

일본 특유의 다다미 대신 깔끔한 검정 대리석이 깔린 3층 집무실에서 성동국이 사진을 보다 인상을 썼다.

소공동에서 당했던 치욕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감히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서 손을 썼던 그놈.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한국대에 재학중인 놈입니다. 이름은 장태산. 올해 한국 나이로 스물두 살. 의문의 LOR 투자법인의 대표입니다.”

짧은 머리칼에 안경을 쓴 비서가 차분하게 일본어로 보고했다.

“아버지와 만난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독대 자리에 윤창호 실장만 있었습니다.”

“입이 무거운 사냥개가 발설할 이유가 없지.”

대화 내용이 궁금했지만 지금 성동국의 머릿속에는 장태산에 대한 복수 생각으로 가득 찼다.

복부를 강타당했던 그 순간만 떠올리면 열통이 터졌다.

그것도 종처럼 부리는 경호원들 앞이었다.

전혀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놈처럼 건방지게 행동하던 어린 놈.

성동국이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다.

그룹에 심어 놓은 인력들을 이용해 놈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다.

“돈이 좀 많다고?”

“투자의 천재라 불리고 있습니다.”

“천재?”

“얼마 되지도 않는 자본금으로 수조를 일궜습니다.”

“수조? 크크크. 미친놈 맞네.”

‘수조’라는 말에도 성동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랏데 그룹 한해 매출이 한, 일을 합쳐 100조를 넘었다.

그깟 몇조는 랏데 그룹의 재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한국에서나 먹히는 숫자였다.

“대표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팔 하나만 가져와.”

“알겠습니다.”

“아니야……. 그 새끼 이빨도 몇 개 필요해. 웃는 게 아주 재수 없었어.”

얼핏 광기를 보이는 성동국.

갈수록 몰락의 길로 내달리는 황태자의 마지막 발악 같았다.

몇 년 지나면 환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자신의 제국이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옥좌를 지키고 있는 늙은 황제.

황태자의 심성은 점점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서며 삐뚤어져만 갔다.

***

‘이 선배들 미친 거 아냐?’

선배들 소개로 신림동 식당에서 밥 먹다 몇 번 인사를 나눴던 학과 선배들이었다.

그저 그런 관계의 선배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호기를 부렸다.

얼굴도 평범한데 안경도 쓰고 키도 작았다.

사법시험 합격증으로 인해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했다.

정작 옆에 있는 장태산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재학생이라면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 리 없었다.

군대 제대 후 학교에 복학하지 않고 신림동에서 공부하다 곧바로 합격한 케이스였다.

사법시험 패스가 인생 역전이라 생각하는 전형적인 찌질이 부류였다.

당분간 학교에 드나들며 아주 개차반으로 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예린의 인상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자신을 서비스 여종업원처럼 대했다.

간이 붓다 못해 상한 선배들.

“야! 너 선배가 묻는데 대답 안 해! 몇 학번이냐고!”

외모에 자격지심이 심했던 한 선배가 장태산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은 조금 전부터 뒤쪽으로 쏠렸다.

‘명복을 빌어줘야겠네.’

이예린은 물정 모르는 선배들이 안타까웠다.

장태산은 한국대 법학과 처음이자 마지막 전설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 태산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그들의 무모한 행동에 명복을 빌어줬다.

곧 대법관에 선택될 거라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인 자신의 아버지도 우습게 보는 장태산이었다.

학교 교수님들도 장태산이라면 덮어놓고 무조건 오케이였다.

쌍둥이들을 통해 알아본 장태산의 재력은 상상 외로 엄청났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한국 재벌이나 진배없었다.

“08.”

차갑게 웃으며 짧게 대답하는 장태산.

“뭐? 08? 와아. 이 새끼가 돌았나. 지금 너 실실 쪼개냐? 아무리 법대에 선후배가 없다지만 너 싸가지 없다고 소문나면 대한민국에서 못 살아!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이 시건방진 새끼야!”

“쓰.”

“뭐라고!”

“레.”

“…….”

“기들.”

“!!!”

강의실에 또박또박 퍼지는 장태산의 한마디.

모두 웅성거리며 화들짝 놀랐다.

법학과 마지막 08학번 학생이 선배들을 면전에 놓고 쓰레기라고 말한 것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졸업 뒤 바로 연수원에 들어갈 선배였다.

그곳에서는 학과 학번으로 결집돼 미래 권력을 도모했다.

그런데 장태산이 그런 선배들과의 관계를 과감히 끊고 도발했다.

“이 새끼가 돌았나! 야! 우리 04학번이야! 이 어린놈의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지? 너, 나와 새꺄! 오늘 선배가 뭔지 제대로 알려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깡이 쌔졌다.

“개 값 미리 줄까?”

그 상황에서도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묻는 장태산.

월등한 기세에서 차이가 났다.

풍겨 나오는 기운부터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차갑게 눈빛은 마치 맹수 같았다.

“너, 너 이 새끼…….”

큰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말소리는 다소 줄어들었다.

군대에서도 후방이나 상근으로 편하게 근무한 탓에 체력 자체가 약했다.

공부만 하던 약골들과 장태산은 기운 자체가 비교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기서 물러나면 과에 찌질이라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부렸던 우쭐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요상했다.

동기들이나 학과생들 그 누구 하나 편들어 주지도 나서지도 않았다.

선배를 향한 이 정도 도발이라면 다들 어린놈을 향해 한 마디씩 해야 맞지만 다들 자신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어? 분위기가 왜 이래?”

그때 강의실로 들어선 여학생 하나.

귀여운 인상의 그녀는 두리번거리다 장태산을 발견했다.

타다닥.

빠르게 다가오는 그녀.

“태산아~ 오올~ 오랜만이네. 너! 진짜 대단하더라. 동차 합격했는데 100위권이라고 면접 안 봤다며? 으흐흐. 내 후배 중에 이런 몬스터가 나올 줄이야!”

사법시험에 떨어져 학교에 복학한 강아린이 경외의 시선으로 장태산을 바라보며 다다다 입술을 놀렸다.

“그 소문 진짜였어?”

“미친…….”

“100위권이라면 판사지망권이잖아…….”

수업을 듣던 학과생들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장태산을 쳐다봤다.

작년 사법시험생 중에 2차까지 합격하고도 3차에 면접을 안 봐 유일하게 탈락한 법학과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설마 쟤가 그 장태산?”

“……맞아요. 쟤가 우리 동기 장태산이에요.”

사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큰소리 치던 두 명의 합격생 선배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들보다 성적이 월등히 높은 녀석이었다.

거기에 동차 합격까지 일궈낸 괴물이었다.

소문을 들어서 그들도 익히 알고 소문이었다.

“너 올림픽 동메달 따서 군대도 면제라며? 너…….사람 맞냐?”

강아린은 작은 키로 장태산 앞에 바짝 다가와 올려다보며 물었다.

“학필 선배가 그러던데 네가 도와줬다며? 그래서 학필 선배가 차석했다고 소문내고 다니더라. 신림동에서 너 모르면 이제 간첩일 거다.”

법학과 선배 중에 사법시험 차석으로 합격한 전 학생회장 이름도 나왔다.

파바바밧.

대부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었기에 강아린의 목소리에 격한 관심을 보였다.

“학필 선배가 잘나서 그렇습니다.”

“무슨 소리야. 학필 선배 머리 나쁜 거 나도 알고 학생회 애들도 다 아는 건데~ 태산아……. 그래서 부탁인데 난 안 되겠니? 합격만 시켜주면……. 평생 머슴으로 살게! 응~ 노하우 좀 가르쳐 줘라~.”

강아린이 애교를 부렸다.

같은 과 학생들이 사방에서 쳐다보고 있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

강아린의 말과 함께 학과생들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장태산에게 뭔가 있을 거라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법학과 학생회장이었던 유학필의 사법시험 패스는 학과에서 계속 회자되고 있었다.

가망성이 별로 없던 그가 2009년도 사법시험에서 차석을 차지했다.

그의 앞으로 미래는 탄탄대로가 보장된 셈이었다.

그런 유학필이 인정한 공부 스승 장태산.

2차까지 합격하고도 점수가 낮다며 면접을 안 본 그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런데 선배들은 뭐죠? 우리 태산이에게 할 말 있어요?”

강아린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합격생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집안이 빵빵한 강아린은 합격생들이 별로 부럽지는 않았다.

“그게…….”

“잘하면 태산이 연수 동기생 되겠네~ 그쵸 선배님들~.”

가만있던 이예린이 거들고 나섰다.

“올해 태산이 1차는 면제고 2차에서 합격하고 학교 졸업하면 딱이네~. 연수원 동기들끼리 친하게 지내세요. 오늘처럼 찌질하게 그러지 말고~.”

그리고 마음속에 맴돌던 한 마디를 내던졌다.

“여우야 저 선배들이 태산이 깠냐?”

강아린이 인상을 쓰며 예린에게 물었다.

“네~ 선배님. 소 새끼 말 새끼라고 막 그랬어요~.”

“뭔 새끼? 와아아……. 선배들 미쳤어요? 태산이 어머님 중용대학교 이사장이에요. 그리고 태산이 친한 분들이 리앤장 하고 삼우 로펌 이사님이에요. 선배들 판사나 검사 못되면 지방에서 개업해야 돼요. 실력 있어요?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밥 먹고 살겠어요?”

신랄하게 두 합격생에게 훈계를 하는 강아린.

작은 키로 어이가 없는 듯 팔짱까지 꼈다.

강아린의 살아 있는 참교육에 두 사람의 고개는 점점 꺾였다.

“그게…….”

합격생의 여유는 흔적도 없이 사리지고 두려움의 눈빛이 된 두 사람.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 있나 보네~ 작년에 1000명, 올해 900명이나 배출된 사법시험 합격자들 틈에서 버틸 실력이라는 거죠? 나야~ 합격하면 아는 아저씨 로펌에 들어가거나 아빠 회사에 들어가면 되지만 두 분은 그런 형편 돼요? 여기 태산이 완전 부자예요~ 변호사 자격증도 취미로 공부하는 중일 걸요~.”

강아린이 무섭게 쏘아붙이자 두 사람은 이제 고개를 깊숙이 숙여 버렸다.

엿 됐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정작 장태산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선배 그만 해도 됩니다.”

“뭘 그만해~ 저 선배들 소문 아주 안 좋아. 며칠 전 여자 후배들 불러서 술 먹였죠? 합격한 선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 받으러 간 불쌍한 애들보고 얼굴이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허벅지는 왜 만져요?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고 싶어서 안달 났죠? 그죠~”

강아린이 작심한 듯 독하게 선배들을 조련했다.

사실 강아린은 문 밖에서 이들이 하는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

합격하고도 학교에 남아 후배들 분위기 흐리는 선배들이 종종 있어 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인간들처럼 말이다.

노하우 전수를 핑계로 다급한 후배들을 농락하는 치졸한 쓰레기들.

성추행 비슷하게 당한 후배들이 강아린에게 하소연을 해왔다.

강아린은 오늘 독하게 마음먹었다.

두 사람에게 뜨거운 쪽팔림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까보면 저런 부류는 노하우 같은 것도 없었다.

모두를 미래의 경쟁자로 보기 때문에 진짜 노하우는 알려줄 생각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아, 아니야!”

“술 마시다보니 취해서 그랬어! 절대 사심 있어서 그런 거 아냐!”

두 사람은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선배들 집에 재산 1000억 있어요? 아버지가 장차관이에요? 그것도 아니면 집안에서 흑자 사업체라도 경영해요?”

“…….”

“개천에서 자란만큼 눈치껏 사셔야죠. 사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요? 실력도 없으면서 어디서 개수작들이에요!”

강아린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지 쓰레기 선배들에 대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미안해…….”

“나도 미안하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두 사람.

이미 자존심은 강의실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태산이하고 여기 계신 여러 학우님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해야죠. 수업 방해해서 미안하다. 앞으로 찌그러져 살 테니 이번 한 번만 봐줘라! 이렇게 말이에요!”

‘아오! 이것들 싹 쓸어서 한강에 처넣어야 하는데!’

강아린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매섭게 쏘아봤다.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두 합격생.

멋모르고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드르릇.

그때 교수님이 출입하는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그리고 형법 교수 이상복이 등장했다.

서글거리는 인상의 교수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장태산을 금세 발견했다.

잘난 얼굴과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오! 우리 태산이 수업 들으러 온 거야?”

이상복 교수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장태산.

“수업 들을 거야? 태산이 넌 동차 합격해서 수업 안 들어도 A+야~.”

아낌없이 이상복 교수는 본심을 드러냈다.

입학 때부터 특별했던 장태산은 법학과의 보배가 됐다.

앞으로 장태산이라는 이름 덕분에 한국대 법학과가 더 날릴 거라는 걸 교수들은 모두 잘 알았다.

“그런데 뒤에 학생들은 뭐지?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 있나?”

눈치 빠른 교수의 질문.

“아닙니다……. 무슨 일은요~.”

확실한 차별을 느낀 두 합격생은 다시 한 번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 얌전히 착석했다.

일 년에 수백 명 나오는 그저 그런 한국대 법학과 합격생과 최연소 2차 패스 자에 대한 합리적 차별.

평소 교수님이 이름도 기억 못하는 두 사람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책상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

장태산의 그림자가 있는 곳은 근처도 가지 않겠다고 말이다.

또 어떤 상황에서도 찍소리 내지 않을 거라 다짐 또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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