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
회귀의 전설
450장. 파멸의 골짜기를 파는 자들
“방법이 없는데……. 하아, 이 새끼. 뭐가 이렇게 철저해?”
강남 하나회 이사 황종석은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회장의 직접 명령이 하달됐다.
구광필의 테스트였다.
조직의 2인자 자리에 있었지만 늘 입지가 불안했다.
밑에서 후배들이 마구 치고 올라왔다.
과거와 달리 주먹만 믿는 놈들이 아니라 대학교 물 먹은 놈들이 속속 조직에 몸을 담아왔다.
학벌에 자격지심이 넘치는 구광필이 나서서 놈들을 중용했다.
이럴 때일수록 넘버2라는 위치를 각인시키고 입지를 더 단단히 다져야 했다.
“장태산……. 이 새끼 물건이야. 싸움도 잘하는데 돈도 많아. 거기에 FOB 소속사 이사 신분에……. 이놈만 무너트리면 다 끝인데.”
연예기획사 하나 무너트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뒤를 봐주는 놈들이 없다면 그야말로 그들은 하루살이였다.
문제는 장태산이라는 놈이 만만치 않다는 것.
슥. 슥. 슥.
장태산과 주변 인물들 사진을 천천히 살폈다.
장태산 빼고 가족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경호원들에게 밀착 경호를 받고 있었다.
경호원들은 한눈에 봐도 대단한 수준의 실력파들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전직 특전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재벌 회장도 이렇게는 못 사는데……. 이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뭔지. 지가 대통령이야? 어이가 없네…….”
가족 경호원들 숫자가 수십 명을 훌쩍 넘었다.
어지간한 조폭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잔머리를 굴리는 황종석.
인상을 쓰며 쓱쓱 사진과 밑에 기록된 정보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턱.
그리고 한 장의 사진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렇지만 이렇게 찾다보면 요런 월척도 있지~.”
장태산은 자기 사람을 아낀다고 들었다.
가족들 말고도 그의 주변에 노릴 만 한 자가 많았다.
척 봐도 대단한 미모를 소유한 여성의 얼굴 사진 한 장.
장태산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장태산……. 놈만 유인하면 다 끝이야. 흐흐흐.”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미끼로 쓰기에 훌륭했다.
황종석은 이를 드러내 놓고 일이 다 마무리 된 듯한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놈만 끌어낼 수 있다면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욕심 많고 어설픈 한동철과는 일을 처리하는 수준이 다르다고 자부했다.
머릿속에 착착 그려지는 완벽하게 설치될 덫.
황종석의 입가에 더없이 음흉한 미소가 진하게 번졌다.
***
“원 샷!”
“잇빠이!”
어이없는 시선으로 두 여인을 바라봤다.
찰랑거리는 소주를 겁도 없이 연거푸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캬!”
친구 먹더니 이제는 막 나갔다.
소주를 털어 넣고 빈 잔을 놓으며 숟가락으로 매콤한 순댓국을 떠 입에 넣었다.
“바로 이 맛이야!”
“스고이데스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매워서 양념을 눈곱만큼 풀었던 두 사람은 이제 애주가 포스로 순댓국을 먹었다.
진한 양념장을 풀어 뜨끈한 국물로 알코올 기운을 씻어냈다.
누가 보면 엄청난 주당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거 아가씨들 참 복스럽게 먹네~ 허허허.”
“일본 아가씨가 순댓국도 먹을 줄 알아? 별일이 다 있어~ 하하하.”
옆에서 퇴근 후 순댓국에 소주잔을 기울이시던 어르신 두 분이 웃음을 터트렸다.
“태산아 고맙다. 지난겨울 방학 동안 쌓았던 원한은 이걸로 퉁 쳐줄게.”
조신한 국문과 여학생 고연지가 동창생처럼 굴었다.
“태산 상. 고맙습니다! 오늘도 맛있습니다!”
껌딱지처럼 따라온 코하네도 귀여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강의실에서도 말했지만 바빴다.”
“그래 인정. 국위 선양을 위해 메달 땄는데 친구가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왜 그래? 너랑 나랑 썸 타는 사이도 아니고.”
“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정도면 훌륭하지 않아? 얼굴도 예뻐~ 성격도 좋아~ 학벌도 괜찮고~ 집안도 빵빵하잖아. 어디 내놓으면 초특급 신붓감이야. 시간 지나면 못 잡으니까 지금 눈앞에 있을 때 잘해.”
“방학 때 약 먹기 시작했냐? 취한 건 아니지?”
“와아아……. 이 남자 성격 쿨한 거야 바보인 거야?”
“태산 상은……. 나쁜 남자입니다. 그래서 매력 있습니다! 으히히히.”
소주 몇 잔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코하네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날 나쁜 남자라 손가락질했다.
“그래서 매력적인가? 정말…… 갖고 싶단 말이야.”
알코올 기운을 빌려 날 빤히 바라보는 고연지.
술에 점점 취해가는 미인은 늘 위험했다.
적정선을 스스로 허무는 모습이 매혹적이지 않다면 그게 이상했다.
지난 생 같았다면 황공하다고 발아래 바짝 엎드려 깔고 살았을 것이다.
“재벌이라도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몸값이 비싸~.”
“얼만데?”
“엘자 그룹 다 넘겨줘도 모자라.”
“뭐라고? 그룹도 모자란다고? 와아아아아아……. 나쁜 남자가 욕심도 많으시네~.”
“엘자 그룹이 큰 건 아니잖아?”
“……우리 아빠 그 소리 들으면 또 화내시겠다. 나름 재벌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데~.”
“아버님 잘 지내시지?”
넌지시 근황을 물었다.
야밤에 찾아가 귀한 술대접까지 받았다.
건방진 소리에 축객령을 받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재벌들 중에서도 사람 축에 드는 엘자 사람에 대한 배려였다.
“몰라. 요즘 매일 저기압이셔……. 전자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일절 말하지 않으시니까.”
고연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 자손의 경영을 불허하는 가풍답게 집에서도 사업적 대화 상대가 안 되는 것 같다.
“4학년인데 졸업하면 뭐할 거야?”
“너에게 시집갈까?”
“지참금으로 엘자 그룹 가져오면 생각해 볼게.”
“……됐어! 그럴 거면 내가 먹고 만다!”
재벌 딸이라고 다 편하게 사는 건 아니었다.
뭐 다른 집보다는 낫겠지만 삶을 사는 건 비슷비슷했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재벌 경영자들도 권력자 앞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깨갱이다.
“도와주면 먹을래?”
“……뭘?”
“엘자 그룹~”
큰 눈동자를 동그랗게 치뜨며 나를 바라보는 고연지.
사정없이 눈빛이 흔들렸다.
나의 발언에 놀라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노, 농담이지?”
“진담 같은 농담.”
“저 주세요! 제가 먹겠습니다!”
술에 취한 코하네가 뭔지도 모르고 본인한테 달란다.
저 말은 농담 같은 진담처럼 들렸다.
코하네…… 위험한 여자였다.
평범하지 않다는 걸 직감하기에 이 순간이 더 재밌었다.
코하네는 나름 감췄다 생각하지만 관상을 비롯해 여러 가지 정황으로 신분 추측이 가능했다.
“코하네는 나중에 일본 기업 하나 사 줄게.”
“정말요???”
“내 편인 게 확인되면요~.”
“……전 언제나 태산 씨 편이 되고 싶습니다.”
코하네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고민스러움이 가득한 눈빛.
이럴 때 보면 또 진짜 정체 모를 여자였다.
“몰라! 일단 마시자. 지난 몇 달 동안 순댓국에 소주 생각나서 힘들었어~.”
“바보냐. 다 큰 성인이 혼자 이걸 못 먹어?”
“나 같은 미모의 여인이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
“내 앞에서 취한 건 뭐야?”
“바보! 성인이 아직도 그것도 몰라!”
됐고요!
피식 웃어넘기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소주가 좋아하는 취향의 술은 아니지만 가끔 마실 만했다.
“언제 시간 돼?”
“시간?”
“아빠가 놀러 오래.”
“고 회장님이? 왜?”
“몰라.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
자존심 때문에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딸을 통해 접촉을 시도하려는 고자룡 회장.
스마트폰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바빠.”
“와아아아아. 장태산 씨! 우리 아빠 엘자 그룹 회장님이야. 일개 학생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그건 다른 사람들 얘기고. 나도 누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설사 그게 대통령이라고 해도 말이야.”
“…….”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연지.
그녀는 몰랐다.
나 쉬운 남자 아니다.
미국 대통령도 은밀히 나를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가 튕기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른다.
***
“어머~ 정말 오늘따라 더 피부가 고와지신 것 같아요~. 사모님은 워낙 바탕이 좋아서 조금만 시술하면 금방 달라진다니까요~.”
“고마워~. 내가 우리 신랑에게 사랑받으면 다 진 여사 덕분이야. 호호호호~.”
프로포폴 한 방 맞고 황금 리프팅 시술을 받은 여인이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국세청장 서열 바로 뒤인 서울지방국세청장 사모 이연숙.
팽팽하고 말끔해진 피부와 프로포폴로 개운해진 몸 상태에 만족해했다.
권력이 있을 때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강남 찬병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 아니었다.
사회 고위층이 되어야만 스페셜 코스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비밀스런 연회비만 1억이었다.
가격은 일반 의료보험 수준만 지불하면 됐다.
강남에서 방귀 좀 뀌는 사모들이 대기 중이었지만 원장 부인인 진미혜의 간택을 받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연숙은 기분이 좋았다.
이번 정권 들어 남편이 차기 국세청장 후보 1순위인 서울지방국세청장이 됐다.
사방에서 알아서 뇌물과 기타 등등 고가의 선물이 들어왔다.
지금껏 뒤로 챙겼던 자금보다 더 액수가 컸다.
절대 탈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나 먹는 돈.
현찰이나 이런 티 나지 않는 뇌물만 골라 받으면 됐다.
“그래 진 여사. 이제 말해 봐. 도대체 누가 탈세하면서 재산을 축적했다는 거야?”
최고급 루이보스티를 마시며 우아를 떠는 이연숙이 넌지시 물어왔다.
오고가는 게 있어야 서로 돈독해지는 관계였다.
탈세라 말했지만 찍어내고 싶은 자를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존재는 없었다.
“사모님 혹시 중용대학교 이사장 바뀐 거 아세요?”
“얘기는 들었어. 전 동룡 회장 딸이라고 하던데.”
강남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탓에 신데렐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말은 안 했지만 대부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재벌 집 후손에게 비자금은 항상 존재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 소멸시효로 추징할 수도 없는 자금이었다.
“맞아요. 그런데 이상해서 알아봤더니…… 꿍쳐놓은 돈으로 장난을 친 것 같아요. 새파랗게 젊은 아들 녀석이 한국대 법대 재학 중인데 그 녀석 이름으로 자산이 엄청나요~.”
진미혜가 과장된 액션까지 더하며 말을 꺼냈다.
“자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관심을 보이는 이연숙.
“내가 방금까지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세상에 조 단위가 훌쩍 넘는데요.”
진미혜는 ‘조’를 강조했다.
청장 마누라도 듣고 눈이 뒤집힐 만한 액수였다.
강남 상류층들도 배 아파 할 만한 단위였다.
“뭐? 조???”
이연숙이 예상했던 대로 깜짝 놀랐다.
조 단위라는 액수는 꿈의 숫자였다.
이연숙도 이제 겨우 100억대 자산을 만졌다.
부글부글 심장에서 알 수 없는 질투가 올라왔다.
행정고시를 패스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남편도 어렵게 이 위치까지 왔다.
승진을 위해 뿌린 돈이 10억 대가 넘었다.
돈 있는 것들의 행태를 잘 알기에 자격지심이 많았다.
청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순간 개털 수준이 되는 걸 알기에 무엇보다 돈에 욕심이 많았다.
입성한 강남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찬병원 와이프 같은 인물과 인맥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주식 투자로 벌었다는데 말이 돼요? 이제 스무 살 갓 넘은 녀석이 투자 회사 대표라는 것도 웃긴데 ‘조’라니요……. 이건 명백한 탈세예요.”
“증거는 있어?”
“제 눈앞에서 블랙카드로 에반스 백화점 에르포스에서 수십억을 긁었어요. 세상에 신상도 아니고 에르포스 상품 전부를 카드로 결제하는 게 가능한 일이에요?”
“아니 그게 사실이었어? 졸부가 에르포스 매장 상품을 전부 구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맞다니까요. 제가 직접 봤다니까요. 얼마나 국세청을 우습게 봤으면 카드로 수십억을 긁었겠어요……. 이건 나라를 위해서도 반드시 엄벌을 내려야 합니다!”
애국자라도 되는 양 침까지 튀겨가며 떠들어대는 진미혜.
‘잘하면 이거…….’
순간 이연숙 눈알이 반짝였다.
다음 대 국세청장을 위해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어야 했다.
어차피 정치적인 문제라 뒷배경도 필요했지만 이런 사건도 적잖이 도움이 됐다.
고액 자산가와 탈세자를 때려잡으면 일단 일반 시민들이 좋아라 했다.
“청장님…… 큰일 하셔야죠. 요즘은 국회의원들도 다양한 전문성을 요구하잖아요.”
큰 그림을 그려 밑밥으로 던지는 진미혜.
반짝이는 이연숙의 눈동자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도와줄 거지?”
“물론이에요~ 조국일보 둘째 사모와도 얘기가 됐어요. 청장님이 시작하면……. 언론이 대대적으로 지원사격할 겁니다~.”
“난 이래서 자기가 좋다니까~ 진 여사 앞으로 잘 부탁해~.”
“당연하죠……. 우리가 한두 해 볼 사이가 아니잖아요~.”
이연숙의 남편이 서울지방국세청 국장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낸 두 사람.
오가는 눈길 속에서 딜을 하며 완벽한 거래를 완성시켰다.
‘넌 죽었어! 건방진 새끼!’
진미혜는 확신을 가졌다.
장태산이라는 어린놈이 파멸의 깊은 골짜기를 헤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역시 두 여인도 미처 몰랐다.
그 파멸의 골짜기를 누가 걷게 될 것인지를 말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운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