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8화 (447/1,284)

 # 448

회귀의 전설

448장. 강의하다 (1)

“성 회장님과 독대를 했다고?”

“어제 밤에 소공동 집무실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성 회장님 스타일이 아닌데 별일이군.”

“모종의 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딜?”

“장태산 군이 요즘 작업 중인 천일 건설 지분 문제일 거라 사료됩니다.”

“흐음……. 천일 건설이라 이거지”

강남 오정 빌딩 내 회장의 집무실.

오정 그룹의 주인 임성철 회장이 장한수 그룹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았다.

요즘 장태산과 관련된 정보는 가장 1순위 보고였다.

그는 막내딸 임윤아와 준 연인 관계였다.

그리고 임성철 회장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눈여겨보던 장태산이 랏데 그룹 회장을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무서울 것 없는 임성철 회장도 성경호 회장만큼은 꺼려졌다.

선친 때부터 인연 있는 재계의 산증인이었다.

지금이야 오정에 밀려 있지만 한때 랏데는 대한민국 재벌의 상징과 같았다.

“천일 그룹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수촌에서 천 회장 손자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까지 출동한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럼 천일 그룹을 노리는 게 그 손자 놈 때문이라는 거야? 단지 그게 이유라고?”

“……제 짧은 소견으로는 90% 정도 그게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국정원보다 정보력이 뛰어나다는 오정의 정보 수집 능력이 뒤에 있었다.

장한수 비서실장은 접수된 정보를 바탕으로 사건 전반을 유추해 냈다.

“오정도 그랬다며?”

“네.”

“허어,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녀석이군.”

“드러난 자본이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로버트 라이언과도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더 끈끈한 유대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폭락장에서 주식 쓸어 담았다고 하지 않았나?”

“저희 오정뿐만 아니라 몇몇 대기업과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매집했습니다. 지금 원금의 세 배 이상 이득을 봤습니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놈이야……. 상상할 수 없는 미래 예견력에 과감한 투자 성향까지……. 내가 다 무서움이 느껴져.”

“아직……. 회장님에 한참 못 미치는 자입니다.”

“무슨 소리야. 녀석은 스마트폰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때 무시하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겠지.”

임성철 회장은 입맛이 썼다.

아들을 믿고 방관한 사이 장태산의 예견대로 스마트폰 시장이 금세 세상을 뒤덮었다.

순식간이었다.

IT 업계의 1년은 과거 산업시대 수십 년보다 더 빠른 변화의 바람을 업계에 만들어 냈다.

애플이 스마트폰으로 우뚝 서서 강자가 됐다.

나름의 재력과 권력을 사용해 한국 내에 풀리는 것을 막고 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와 있다.

부랴부랴 연구소를 쥐어짜 스마트폰을 만들어 냈다.

소프트웨어적인 건 어쩔 수 없지만 하드웨어적인 부분에서 오정이 밀릴 일은 없었다.

어차피 애플에 들어가는 반도체 상당수가 오정 전자 제품이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도련님이 잘 하고 계십니다.”

“아쉬워서 그래.”

“회장님도 미리 보셨다시피 이번에 출시되는 갤루시는 대단한 돌풍을 일으킬 겁니다. 그룹 경제연구소도 몇 년 안에 스마트폰 분야 세계 1위를 찍을 거라 보고가 됐습니다. 엘자나 다른 기업들은 따라오기 벅찹니다. 반도체부터 시작해 생산 체계가 일원화 될 수 있는 기업은 세계적으로 저희 오정밖에 없습니다!”

장한수 실장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있는 임성철 회장의 뚝심으로 이뤄낸 패권이었다.

그동안 서러움을 많이 당했다.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타깃이 됐다.

그걸 막기 위해 오정 장학생을 만들어 냈다.

기업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 온 몸부림이었다.

정권을 잡은 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짓거리가 경제인들 주머니를 터는 게 관례처럼 굳어졌다.

“그렇겠지……. 그런데 아쉬워. 놓친 게 많아.”

욕심이 많은 임성철 회장은 연신 쓴 입맛을 다셨다.

격변하는 세상.

새로이 대통령이 된 자는 사기꾼이었고 대한민국 밖은 본격적으로 경제 전쟁에 돌입했다.

하청이나 받던 중국 제조업 성장세가 무서울 만큼 커지고 있었다.

미국은 FTA를 통해 무역 압박을 시작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벌어질 변화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자칫 한 발자국 잘 못 딛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들이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과거처럼 정권에 돈을 주고 살아남는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정의 경쟁자들은 대한민국 재벌이 아니라 세계적 공룡들과 그 뒤에 있는 선진국 정부였다.

“모든 일들이 회장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고마워 장 실장. 나 때문에 아직도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회장님 덕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태산이 그 녀석 주변에 그렇게 여자가 많다고? 고자룡 딸도 달고 다닌다는 말은 무슨 말이야?”

“……고연지라는 국문과 여학생과 지난해에는 자주 어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보에 의하면 몇몇 외국 여성들과도…….”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장한수 실장.

“흐흐흐. 부러워. 국제화 시대에 그 정도는 기본이지~.”

오성철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윤아 양이 있는데…….”

“장 실장 솔직해지자. 내가 이렇게 머리 아픈 경영에 힘을 쓰는 이유도 다 그거 아니겠어. 부와 명예,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게 꽃다운 여인들과 눈치 안 보고 사랑을 나누는 거잖아. 그게 야망을 자극하는 원동력이고 본능적인 남자의 욕망이야.”

“…….”

임성철 회장의 직구에 장한수 실장은 그만 입을 닫았다.

재벌들에게 세컨드를 비롯해 미모의 여인들이 꼬이는 건 필연인지도 몰랐다.

눈앞의 오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윤아도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그 녀석은 내가 찜했으니 누구에게도 못줘.”

인재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임성철 회장.

장태산을 생각하며 강렬한 욕심을 드러냈다.

***

“헐……. 쟤 뭐야?”

“우리 학교에 저런 남자가 있었을 리 없잖아!”

“모델이야?”

“어떡해……. 내 이상형이야.”

수업을 받기 위해 법학과에 찾아왔다.

법대가 법학 전문대학원으로 바뀌었지만 법학과 수업은 남았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한국대생들이 많았다.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법학 학점이 제법 됐다.

타과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법대생이라면 1학년 학기 초에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헌법의 이해’라는 2학점 과목.

08학번 중에 이수 못한 법대생은 나밖에 없었다.

F학점을 맞지 않는 한 법대 예비역이 이 수업을 들을 일이 없었다.

법대생 중에 나만 이 수업을 듣게 됐다.

주변에 동기들 대신 타과생들 천지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됐다.

워낙 인기 강의라 법대에서 가장 큰 1층 대강의실에서 수업이 진행됐다.

수업 정원은 약 120명 정도.

교탁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계단식으로 자리가 마련된 강의실이었다.

뒷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여지없이 쏠렸다.

워낙 학교를 조신하게 다닌 탓에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동안 도장 깨기 했던 미대나 음대, 공대 쪽 학과생들은 대부분 법학과 수업은 듣지 않았다.

“저거 다 명품이지?”

“그냥 짝퉁 아냐?”

“……하긴 몸매와 얼굴이 명품이니 옷빨이…….”

“번호 물어볼까?”

“애인이 넘치고도 두 명은 더 있겠는데?”

한국대 여학생들도 여자였다.

나를 돌아보며 온갖 추측을 남발했다.

날씨가 포근해 청재킷에 가벼운 면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명품 타령으로 수군거렸다.

개인적으로 명품 안 좋아한다.

찬병원 모녀를 찍어 누르기 위해 어제 75억 정도를 긁었다.

수십만 원부터 수천만 원까지 에르포스 가방은 가격대가 다양하게 형성돼 있었다.

창고에 있던 물건 값까지 모조리 결제했다.

찬병원 모녀는 에르포스 가방 중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소유한 힘의 차이를 그들 수준에 맞게 낱낱이 보여줬다.

어마어마한 양이었지만 어차피 집은 전부 수용해도 남을 만큼 널널했다.

쌍둥이들에게 건물 2층을 내줬다.

각자 개인 방 말고도 방이 여러 개 남았다.

오늘부터 드레스룸 공사를 시작했다.

가방을 진열해 놓을 공간을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여학생들이기에 액세서리는 많이 필요했다.

주아와 주희는 어제 일로 나에 대해 더 깊은 경외심을 품었다.

이제야 오빠가 어떤 남자인지를 제대로 깨달은 것 같았다.

동생 콧대 세워주기 위해 수십억을 카드로 긁어주는 남자는 세상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다.

찬병원 모녀는 블랙 카드를 보는 순간 입을 닫고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동생들에게 그렇게 거한 선물을 안겨준 사람이지만 나는 평범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평범한 일반 브랜드 옷을 입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이렇게 끌었다.

대학노트를 펴고 이것저것 끄적거렸다.

“가방 좀 치워주면 안 돼?”

그때 익숙한 향기가 훅 풍기더니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방학 때 얼굴 한 번 못 봤다고 친구 얼굴 잊어버린 건 아니지?”

“네가 왜?”

“나도 사시 보려고~. 팽팽 놀던 너도 합격하는데 잘난 내가 못할까~.”

“뭐?”

친구 먹기로 했던 고연지가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

사법시험 본다는 얘기는 농담인 게 확실했다.

지금껏 인문대에서 평범하게 살던 고연지가 사시를 볼 일은 없었다.

몸매가 아낌없이 드러난 벨벳 롱스커트에 레이스가 달린 하이넥 인디핑크 프릴 블라우스가 고연지를 더 화사하게 보이게 했다.

고학년답게 스타일로 강의실 안에 있는 모든 여학생들을 압도했다.

“회사 들어가기 전에 법률 쪽 소양 좀 쌓으려고 신청했어. 그런데 태산이 네가 딱 있네~. 아이 좋아라~.”

장난스럽게 딱딱 끊어서 말을 하는 고연지.

“뒷조사 했어?”

“어머~. 나 그렇게 한가한 여자 아냐. 긴긴 방학 때 연락 몇 번 없던 남자 사람 친구에게 화 같은 거 내는 사람 아냐. 알잖아. 나 쿨한 여자인 거~.”

인문대 퀸카의 등장에 강의실은 반강제적 침묵에 빠졌다.

“누구야?”

“인문대 퀸카……. 그리고 엘자 그룹 회장 딸.”

“뭐, 뭐라고?”

“에휴……. 잘난 것들은 잘난 것끼리 살아가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

사방에서 고연지를 알아본 학생들이 2차로 수군거렸다.

“말투에 가시가 많다.”

“어머~. 그걸 이제 알았어요? 순댓국과 소주의 비밀을 알려줬으면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미모의 친구가 처량하게 순댓국집에서 자음자작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시죠?”

경어까지 사용하며 눈웃음을 짓는 고연지.

“하하.”

그녀의 말투에 웃음이 터졌다.

“어머…….”

“어쩜 남자 미소가…….”

아직도 곁눈질로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오늘 저녁 쏠게.”

“응? 정말?”

고연지 태도가 바로 돌변했다.

“친구가 소원풀이 해주마.”

“으흐흐흐. 작전 성공!”

시를 발표하고 난 뒤 내 품에 안겨 울던 고연지는 아직도 처음 순간처럼 순수했다.

시간이 흘러도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재벌집 딸이긴 하지만 갑질이나 계급질을 행사하는 걸 본 일이 없었다.

엘자 그룹의 가풍을 제대로 이어 받은 것 같았다.

“나도~ 끼어주시무이다.”

“???”

그 순간 등 뒤 쪽에서 들려오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상한 발음의 말.

“어! 코, 코하네!”

고연지의 당황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크게 울렸다.

귀여운 일본 유학생 코하네의 등장이었다.

“나도 이 수업 신청했습니다. 태산 씨 보고 싶었습니다. 메달 축하합니다.”

코하네가 자연스럽게 비어 있던 나의 왼편 빈자리에 앉았다.

인문대 국문과 수업 시간의 포지션이 반복되고 있었다.

고연지를 비롯해 수상한 코하네의 동시 등장.

오늘 수업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드르르륵.

마침 교수님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등장했다.

주태열 헌법 교수.

한국대 법대뿐만 아니라 전국 법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한 권쯤은 구입해야 할 헌법학원론서의 저자였다.

나와도 인연이 깊었다.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 희끗한 노교수가 강단에 섰다.

몸은 가냘팠지만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휘어잡는 포스가 장난 아니었다.

제자들 중에 판사와 검사, 변호사, 정치인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저벅저벅. 턱.

교단 교탁에 출석부를 올려놓은 교수님.

“이번 학기 헌법을 가르칠 주태열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생들도 자신들을 향해 고개 숙이는 교수를 향해 힘차게 인사를 올렸다.

“이번 학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씩씩한 것 같군요.”

교수님은 학생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활짝 웃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법학과가 사라지면서 3학점 과목이 2학점이 되었습니다. 가르칠 내용이 많지만 시간 관계상 조문 위주로 헌법에 대해 간략하게 파악하며 나가겠습니다. 어차피 법조문이 많지 않은 헌법이라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간략하게 다룬다고 하지만 헌법은 추상적인 개념이 많아 다른 법 과목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다들 헌법의 정립 원리나 이념이 궁금해서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맞지요?”

“…….”

사법 시험이 목적인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교수님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법시험 2차까지 동시에 합격한 인생 선배 강의 한 번 들어볼까요?”

응?

갑작스런 주태열 교수님의 말.

“동차 합격생?”

“여기에 그런 분이 계셔???”

학생들 사이가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동차 합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법을 조금만 아는 이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었다.

씨익.

먼 거리였건만 금세 나를 발견하고 씨익 웃는 주태열 교수님.

“장태산 군. 나와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강의 한 번 해보겠나?”

장난스럽게 장난스럽지 않은 말을 뱉는 교수님.

강의? 뭐, 그까짓 거!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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