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
회귀의 전설
446장. 너구리 낚시 (3)
“언니! 언니! 저 가방 봐! 이뻐! 이뻐! 우왕! 완전 내 스타일이야~.”
“저거 살 거 아니지?”
“흐흐흐. 오빠 카드 마음껏 질러보자! 우리 오빠 진짜 돈 잘 버는 것 같아~”
“그래도…….”
“짠돌이 오빠가 카드 줬잖아. 학교생활에 필요한 거 이것저것 사라고~ 우리 과 애들 은근 돈 많아. 공부 잘하는 애들 대부분 부자라는 말 사실이었어. 다들 강남 살고 부모님이 다 원장에 사자 들어가는 직업 가지고 있는 거 있지? 그 애들이 나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부모님 뭐하시냐고 하고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어. 그래서 장주시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런 곳에서도 한국대 의대에 올 수 있냐고 말하더라. 와아아……. 완전 얼척 없어가지고…… 몇몇은 완전 밥맛이야. 오빠가 차 안 줬으면 나 근본 없는 거지라고 왕따당할 뻔했어~.”
주희가 분노에 찬 말을 다다다 내뱉었다.
“그래…… 그건 인정. 우리 과도 비슷해.”
주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 씨 집안 쌍둥이들은 랏데 백화점 본점에서 쇼핑을 즐기다 옆 건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백화점 쇼핑은 잘 끝냈다.
1층부터 돌며 알뜰하게 쇼핑했다.
고등학생 때와 달리 화장품과 향수도 필요했다.
잡화점과 향수 코너에서 처음으로 여유롭게 쇼핑을 시작했다.
캐주얼 매장에서 또래들이 입는 평범한 일상복들을 구입했다.
오빠 말대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쇼핑 도우미들을 통해 집 주소로 배달을 부탁했다.
하지만 절대 무리하게 쇼핑하지 않았다.
사람이 먼저 명품이 되어야 한다는 걸 쌍둥이들은 이미 교육을 받아 잘 알았다.
쇼핑하던 고객들이 쌍둥이를 보고 모델이나 배우가 아닐까 하고 자기네끼리 수군거렸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미모를 뽐내거나 꾸밀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지금은 가려져 있던 미모가 제때에 빛을 발하자 쌍둥이들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단 둘이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 없으니까 완전 땡큐다. 흐흐흐.”
주희가 음흉하게 웃었다.
입학 전 엄마와 함께 쇼핑을 했지만 솔직히 양에 안찼다.
부모님은 항상 겸손과 미덕을 최우선으로 강조하셨다.
하지만 훈육과 달리 엄마는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고급져졌다.
오빠가 대놓고 명품으로 엄마를 도배시켰다.
집으로는 가끔 이사장님을 찾는 전화가 왔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것저것 뭔가 사업을 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일상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는 게 없었다.
쌍둥이들은 친구들과 분식집 떡볶이를 즐겨먹었고 아이돌 가수에 열광했다.
지금도 장주시에 내려가면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떨기 바빴다.
누가 봐도 평범한 집안 그 자체였다.
쌍둥이들이 공부하는 동안에도 엄마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3학년 동안 맛있는 밥과 반찬을 차리고 뒷바라지로 이것저것 많이도 챙겨줬다.
아빠에게도 언제나 다정다감했다.
경호원 언니들도 살뜰하게 챙겨줬다.
그랬던 엄마도 오빠처럼 카드를 건네주지 않았다.
한 달 용돈 50만 원이 전부였다.
그에 반해 오빠는 생활비 카드를 만들어 줬다.
한도는 얼마까지인지 몰랐다.
일정 이상 오버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카드를 건네받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분위기가 다르네…….”
주아가 랏데 명품 백화점인 에반스를 둘러보며 살짝 주눅이 들었다.
명품 백화점은 머리털 나고 처음 방문이었다.
옆에 있던 랏데 백화점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분위기였다.
일단 사람이 거의 없었다.
1층에 깔린 우윳빛 대리석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잠깐 쉬웠다 가는 라운지에 비치되어 있는 가구들도 고품격 원목으로 엔틱스러웠다.
돈 없는 사람은 분위기에 눌러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언니 쫄지 마.”
“진짜 구입할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구입할 거야! 명품에 환장한 된장녀는 아니지만 최소 품위 유지용으로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이것들이 날 거지 취급 못하도록 만들 거야!”
주희는 씩씩거리면서도 당당했다.
O.T때 당했던 충격이 컸다.
평범한 차림으로 참석했다가 대놓고 무시를 당했다.
다행이 오빠가 줬던 차라도 있어서 다행히 거지라는 오해는 풀렸다.
명품도 없이 로션 하나 찍고 나간 것 자체가 실수였다.
외모에서 밀리는 애들이 더 난리를 치며 심하게 굴었다.
“들어가자.”
“진짜?”
명품들 중에서도 고급 제품 쪽에 들어가 있는 에르포스.
쌍둥이들은 활짝 열린 매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반 백화점 매장과 규모에서도 차이가 났다.
널따란 공간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유리장과 심플하면서도 격조 높은 실내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상품 대신 걸려 있는 현대화가 작품도 범상치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녀 직원들이 절도 있게 손님을 맞이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예의.
“네에…….”
명품 매장과 어울리는 직원들의 태도에 쌍둥이들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의 평범한 대학 신입생들에게는 낯선 공간이었다.
오빠 카드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기죽지 않을 수 없었다.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십니까?”
20대 중반의 보조개가 귀여운 여성 직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
“가방 좀 보려고 합니다.”
주희가 나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뭐지? 정말 자연미인? 얘들 뭐지?’
에르포스 직원 강가영은 미모의 두 여성 등장에 살짝 궁금증이 일었다.
명품 매장은 대부분 VIP들이 사용했다.
가끔 일반 손님이 방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격만 묻고 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돌아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게 수순이었다.
지금 들어선 쌍둥이 두 여성도 일반 손님이 확실했다.
한두 번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면 저렇게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다른 직원들도 쌍둥이를 보며 이미 눈으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얼굴은 조막만 했고 외모는 당장 연예인으로 데뷔를 해도 될 정도였다.
TV에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위한 투자지~.’
저 정도 미모에 아우라면 이곳에서 자주 보게 되리란 걸 강가영은 알고 있었다.
일단 처음 방문하는 손님이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언니. 이거 어때?”
“예쁘긴 한데……. 괜찮겠어?”
“으흐흐. 오빠에게 혼나고 말지.”
오늘 오후에 신상으로 들어온 레드 버니 와인 은장 컬렉션.
가격이 50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가격은 확인하지도 않고 그 앞에서 이 시선을 빼앗긴 쌍둥이 동생.
언니도 아직 가격표를 보지 못했다.
“이거 한 번…….”
가방을 만져도 되는지를 강가영에게 물어왔다.
“네. 마음에 드시면…….”
“지금 뭐하는 거야!”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강가영이 화들짝 놀라 뒤를 보았다.
“오늘 들어온 신상 같은데 더러운 손으로 누구 걸 만져!”
갑자기 나타난 거만하게 생긴 중년 여인과 까칠한 인상의 딸로 보이는 여성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명품으로 휘감은 딸이 인상을 팍 쓰며 막말을 뱉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강가영의 고개가 90도로 꺾였다.
백화점 VVIP 고객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개인 병원 서열 1위인 강남 찬병원의 병원장 사모 진미혜와 그녀의 막내 딸 신지은.
씩씩거리며 가방을 만지려는 장주희를 신지은이 노려봤다.
“뭐? 더러운 손? 신지은. 말 다했어!”
“흥! 시골에서 왔다면서 꼴에 보는 눈은 있나봐~.”
파바바밧.
장주희와 불꽃을 튀기는 한국대 의대 신입생 동기 신지은.
장주희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 속에서 질투의 감정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
“…….”
침묵은 금이 아니라 어색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등 뒤에서 찌릿찌릿 전기가 전해져 왔다.
윤창호 실장이 눈빛으로 날 잡아먹으려고 난리였다.
그에 반해 성경호 회장은 작은 눈으로 날 직시했다.
오래 산 너구리 할배가 어린 나를 헤집어 보려고 했다.
봐봐야 아무 것도 없다.
싱긋 미소 지은 상태로 성경호 회장과 눈을 마주쳤다.
“미친 건 아닌 것 같고……. 세상 무서운 것도 없어 보이고……. 가진 게 많은 것 같지도 않는데…….”
특유의 느릿한 말투가 귀에 천천히 박혔다.
할배가 잘 못 봤다.
나 욕심 엄청 많다.
다면 욕심 크기가 너무 커 성경호 회장의 시선을 넘겨 확인할 수 없는 것뿐이다.
호수가 감히 바다를 품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와 난 살고 있는 세계의 차원이 달랐다.
“회장님. 무시하십시오. 천일 그룹과 회장님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윤창호 실장이 천일 그룹을 지원 사격했다.
뭐 받아먹은 게 있는 것 같았다.
“가라앉는 배에 타고 계시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천일 그룹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어린 녀석이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윤창호 실장이 주인 앞이라고 막 나갔다.
“사업이 나이와 상관있습니까? 하하하.”
시원하게 한 번 웃어 줬다.
성경호 회장의 도움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흔들다 보면 그깟 천일 그룹 하나 꺾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냥 핑계를 대고 재계의 거목을 만나보고 싶었다.
몸에서 당당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이놈이…….”
윤창호 실장이 날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봤다.
“당신…… 죽고 싶어?”
성 회장 앞에서 그의 가신을 보란 듯이 노려봤다.
나름대로 선택한 차가운 경고였다.
“!!!”
윤창호 실장이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자신에게 이렇게 겁 없이 행동하는 인간은 처음 볼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주인인 회장 앞에서 말이다.
“흐음……. 그래. 그런 거였어…….”
실장과 내가 불꽃 튀기며 기 싸움을 함에도 동요하지 않는 성경호 회장이 혼자 중얼거렸다.
“회장님! 이자를 당장…….”
“나가 있어.”
“회, 회장님.”
“나가 있으라 했다.”
“……알겠습니다.”
회장의 반복된 묵직한 경고에 윤창호 실장이 이빨을 감추고 꼬리를 말았다.
조용히 소리도 없이 집무실에서 사라지는 윤창호.
“넌 나 같구나.”
뜬금없는 성 회장의 한마디.
“별 욕심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장이 뜨거워 세상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가득 해.”
“과찬이십니다.”
“겸손 그만 떨어. 세상 오래 살았지만 너 같은 애는 처음 보는구나.”
두 번 살아본 나도 성경호 회장 실물은 처음 봤다.
TV에서 보던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굵은 세월의 생채기를 온몸으로 버텨온 진정한 거목이었다.
친일 기업이라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그는 꿋꿋이 소신껏 길을 걸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진한 욕망의 향기를 그가 맡았다.
세월은 그냥 쌓고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게 아니었다.
“조건을 하나 더 걸고 싶구나.”
“조건이라 하시면…….”
보통 사업가라면 이 정도 도발에 분노하고 날뛰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성경호 회장의 반응은 확실히 달랐다.
내가 감춰 놓은 수들 중 하나 정도는 읽어냈다.
“천일 그룹 초대 회장인 재국이 형님은 나에게 한 번 큰 도움을 줬다. 오랜 세월 은혜를 갚았지만 아직도 마음의 빚이 남아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재벌들의 과거사인 듯했다.
“그 마음의 빚을 갚을 정도는 되어야 내 신념이 움직일 수 있다.”
말을 하면서도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나를 계속 바라봤다.
늙은 너구리 할배 눈빛은 여전히 초롱초롱 빛났다.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럼…….”
“두 번.”
“네?”
“랏데 그룹이 위기를 맞으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도와다오.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오! 너구리 할배 제법인데?
내 능력을 암암리에 인정한 성경호 회장.
“……제가 손해지만 그 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