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
회귀의 전설
444장. 너구리 낚시 (1)
그런 당신은 뭔데???
성동국은 하도 어이가 없어 뒷골이 당겼다.
아버지에게 혼난 것도 분통 터지는데 나이도 어려보이는 놈의 말투가 몹시 건방졌다.
한눈에 봐도 얼굴만 믿고 날뛰는 애송이었다.
한마디로 재수 없었다.
호텔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는데 잘못 찾아 탄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 사과 한 마디 없이 도리어 뭐냐고 싸가지 없는 태도를 보였다.
“빠가야로!”
주저 없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온 일본 욕.
평소 안하무인격으로 인생을 살아왔던 재계의 황태자가 성동국이었다.
10년 전 오정의 임준형에게 타이틀을 빼앗겼지만 그전까지 성동국은 대한민국 재계 황태자로 통했다.
이제는 왕년의 역사 속으로 묻히며 늙고 권력을 다시 쥘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자존심만은 아직 끝장을 달렸다.
성동국 스스로 자신 머리 위에는 부모 말고 아무도 없다고 자부했다.
“빠가야로? 대낮부터 약을 처먹었나! 어이~ 당신 나 알아?”
후두둑 쏟아져 나오는 거친 일본어에 성동국이 당황해 눈이 커졌다.
일본 표준어인 정확한 관동 발음을 구사했다.
“닥쳐 새꺄! 어린놈의 새끼가!”
일본어지만 한국 스타일의 욕이 터졌다.
“어이가 없네. 어이 아저씨~ 나 크는 데 밥값이라도 보태줬나?”
전혀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는 애송이.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이곳은 랏데 제국의 심장부였다.
당장 경비를 부르면 이런 애송이쯤은 끌어낼 수 있었다.
성동국의 목소리 데시벨이 점점 올라갔다.
“그러는 당신은 나 알아?”
애송이 놈이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피식 웃었다.
“이런 건방진!”
쇄애앳.
성격 급한 성동국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위로 치고 올라갔다 공간을 가르며 내려왔다.
터억!
하지만 손바닥은 목적을 상실하고 중간에 붙잡혀 버렸다.
“어이 형씨. 팔목 아작 나고 싶어?”
우두둑.
잡힌 손목에 가해지는 강력한 압력.
“아아아아악!”
성동국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명을 토했다.
태어나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귀하게 자라서 남에게 함부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잡혀본 적도 없는 성동국이었다.
“엄살은~”
휘릭.
놈이 잡고 있던 손목을 뿌렸다.
“무슨 일입니까!”
타다다닥.
코너 쪽 회장실 앞에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이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너희들 뭣들 하는 거야! 회장님 계신 곳에 이런 얼빠진 새끼를 들여보내면 어떡해! 모두 짤리고 싶어!”
성동국이 괜한 경호원들을 향해 미친 듯 고함을 쳤다.
경호원들 모두 일본어에 능통했다.
랏데 가족 구성원 모두 보통 일본어를 사용했기에 입사를 할 때 필수 외국어였다.
그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회장보다 더한 성동국의 갑질은 그룹 전체에서 아주 유명했다.
그런 이유로 성동국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었다.
자신과 가족 말고는 다들 소모품 같은 물건 취급을 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해도 언제나 을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 정도 비위 맞추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새끼 치워!”
“넵!”
경호원들이 다가갔다.
“빨리 내려요! 이곳은 함부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있는…….”
“어~ 나 외부인이 아니라 회장님 하고 미팅 약속이 되어 있는 손님인데~.”
“!!!”
경호원들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 실장으로부터 손님이 찾아올 거라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혹시 장태산 님…….”
“맞아요. 제가 장태산입니다.”
“아!”
“뭐, 뭐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국어를 조금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성동국도 당황했다.
아버지 손님이라는 뜻을 빠르게 유추해 냈다.
‘이 어린놈이 아버지 손님?’
연세가 90세 가까운 아버지였다.
증손자뻘 되는 녀석을 불렀을 만한 이유가 빨리 떠오르지 않았다.
“성동국 씨 맞죠?”
놈이 아는 체를 해왔다.
“너……. 누구야?”
“처음 뵙겠습니다. LOR 투자법인 대표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뭐! LOR!!!”
성동국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눈과 귀가 있어 한국 정치권이나 경제에 대해 나름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갖고 있었다.
요즘 핫 하게 재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슈 내용이 LOR 투자법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TS 그룹의 전신인 안아 그룹 해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최근 이슈가 된 천일 그룹 주주총회도 LOR 투자 법인이 개입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오정을 비롯해 각 그룹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유명 투자법인.
그 대표가 이런 어린 애송이일 줄 성동국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못 믿는 눈친데 명함 깔까요?”
실실 눈웃음을 치는 장태산.
“……건방진 새끼!”
성동국 성질은 어디 가지 않았다.
겨우 투자법인 대표 따위가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고 건방을 떤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한참 나이 어린놈이다.
눈빛에 두려움이나 공손함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 말 듣기 거북한데 사과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사과? 크크크크크. 집에 가서 사과나 처먹어 새끼야. 확 밟아 버리기 전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버지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과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성동국이었다.
경호원까지 옆에 기립해 있자 호기가 치솟았다.
“후회할 텐데…….”
“냄새나는 기무치 같은 새끼가 어디서 개소리야!”
“나중에 피눈물 좀 흘리겠네~”
“피눈물? 그래~ 나 피눈물 나게 좀 해줘라. 이 어린놈의 새끼야!”
“쯧쯧. 쓰레기.”
혀를 차고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기는 장태산.
“쓰레기? 이 새끼가 뒈질라고!”
경호원들 믿도 장태산의 뒤통수를 후려치려 폼을 잡는 성동국.
퍼어억!
그 순간 갑자기 아랫배에 꽂히는 주먹 하나.
“웩…….”
복부에 충격이 가해지며 장이 뒤틀리더니 위로 치솟아 오르는 굵직한 건더기.
입을 손바닥으로 막는다고 막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우웩…… 웩.”
성동국은 강렬한 고통에 그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저녁에 먹었던 스시를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적당히 까불어라. 재활용도 불가능하게 되기 전에…….”
경고를 날리며 피식 웃는 장태산.
그 모습에 경호원들도 순간 얼어붙었다.
이곳은 랏데 그룹 회장이 거주하는 호텔의 최상부였다.
회장의 장남을 저렇게 취급할 수 있는 용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냉정하게 말해 여기서 평범한 사람 한두 명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몰랐다.
그럼에도 장태산이라는 사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쁜 사람입니다. 회장님께 안내 부탁드립니다~.”
경호원들에 부드러운 어조로 안내를 부탁하는 장태산.
경호원들은 쓰러진 성동국과 장태산을 번갈아 바라보며 순간 고민에 빠졌다.
“뭣들 해. 손님 오셨는데.”
어느새 나타난 윤창호 실장이 경호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도련님 아래로 모셔다드려라.”
“넵!”
“으으으……. 너 이 새끼…… 내가 너 죽인다…….”
입가에 건더기를 잔뜩 묻힌 채 장태산을 노려보는 성동국이 살기를 뿌렸다.
“꺼져. 쪽발아~.”
꺼지라는 말 다음에 성동국을 향해 무음으로 쪽발이라 말하는 장태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그 의미를 아는 성동국의 분노에 찬 비명이 호텔 복도에 짐승처럼 울려 퍼졌다.
***
마호가니색 두툼한 문이 앞을 막아섰다.
호텔 최상층을 홀로 사용한다는 성경호 회장.
뒤에 나이 지긋한 실장이 따라왔다.
경호원들은 성동국을 데리고 사라졌다.
TV에서나 간간이 노출됐던 성경호 회장의 장남은 실제로 더 엉망이었다.
관상이 개 후졌다.
처음 보는 순간 안하무인(眼下無人)을 느꼈다.
태어난 순간부터 있는 집 자식으로 살아서 그런지 사람 귀한 줄 전혀 몰랐다.
차갑고 뾰족한 인상은 그가 얼마나 덕이 없는지 말해줬다.
안하무인에 덕까지 없으니 그룹 총수가 되는 일은 오래 전에 물 건너간 셈이다.
기껏해야 허접한 사장 자리 하나 꿰차고 여생을 살아야 할 팔자였다.
여기서 욕심을 더 내는 순간 닭장에 갇혀 영 나오지 못할 것이다.
관인상생(官因相生)의 운명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치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사업하는 자는 무릇 관(官)과의 인연이 필수로 따라야 하고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필연이었다.
이 당시에 큰 아들을 내친 성경호 회장은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됐다.
적어도 그의 뒤에 빼어난 관상가가 있음이 확실했다.
“회장님을 보필하는 윤창호 실장입니다. 안에 들어가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윤 실장이라 밝힌 이의 경고.
회장의 장남을 함부로 대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주희가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부셔버리라고 했다.
어차피 열 받으면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할 말 하고 사는 성격인데.”
“……이곳은 랏데의 심장입니다.”
나름 실장이라는 사람의 의미심장한 경고.
“그래봐야 대한민국 땅 안이죠. 여기 다 합쳐야 몇 조 정도 되나요? 소소합니다 그려.”
“…….”
나의 말이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지 뒤에서 입을 닫고 대꾸가 없었다.
“위험한 친구군.”
그러다 갑가지 윤창호 실장이 말을 놓았다.
말투가 몹시 불편했다.
“몰랐나 보네. 오정 회장님과 엘자 회장님도 나를 그렇게 부르던데. 참 위험한 놈이네~ 하고 말이야.”
이럴 때는 거리낌 없이 말은 같이 까줘야 제 맛이다.
어디 일개 비서실장 따위가 함부로 나를 평가해!
“오늘 일은 다음에 계산하지.”
“청구서 주소는 알지?”
으드득.
가볍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손님 접대하는 기본도 모르는 자가 무슨…….”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어차피 인생은 기세 싸움이다.
랏데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내 발로 찾아오지도 않았다.
“참고로 말하지만 나 랏데 대주주야. 폭락장에서 열심히 긁어모았더니 이게 돈이 좀 되네~. 흐흐”
사람 염장 지르는 데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나였다.
상대가 호의적이지 않고 스스로 적이 되겠다고 하면 그 순간부터 전쟁이다.
“조심해. 난 나이 먹었다고 봐주는 그런 예의 바른 청년이 아니거든.”
딸깍.
대꾸 없이 조용히 문을 여는 윤창호 실장.
예기치 않게 일이 복잡해져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랏데의 장남 성동국도 본인 손에서 경호원을 통해 처리하는 랏데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이고 또 어림도 없었다.
이깟 랏데 매출 정도는 나의 호주머니 쌈짓돈 수준에 불과했다.
스르릇.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공간은 넓은 거실이었다.
그 뒤 큰 창 너머로 펼쳐져 보이는 서울의 야경.
나의 사무실 전경만은 못했지만 봐줄만 했다.
“안으로.”
화를 누르며 길게 말을 섞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는 윤창호 실장의 기세가 느껴졌다.
저벅저벅.
푹신한 양탄자를 밟으며 거실 안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밖을 배경으로 거대한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늙은 거인이 보였다.
랏데의 황제 성경호.
그가 나를 바라봤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강렬한 호기심이 깃든 노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깊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목례.
“LOR 투자법인 대표 장태산. 회장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