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1화 (440/1,284)

 # 441

회귀의 전설

441장. 오빠가 전설?

“언제 봐도 대단해……. 신입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대 미대 1학년 전공 필수로 개설된 ‘서양화 기초 1’ 과목.

이마가 훤칠하고 체격이 좋은 심철수 교수가 이젤에 올려진 표구된 유화 한 점을 걸어 놓고 감탄을 터트렸다.

그의 눈은 그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 작품이지. 교수님 작품인가?’

한국대 서양화과 1학년에 입학한 장주아는 그림과 교수를 번갈아 봤다.

그림은 중세 시대가 배경이었다,

이름 모를 오래된 성과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산맥,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넓은 평원이 원근감을 잘 살려 모두 한 눈에 들어왔다.

사이즈는 100호.

특이한 그림이었다.

화가의 눈을 그대로 빌려 풍경을 보는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배경이 폭넓고 굵직굵직했지만 깃발 같은 작고 정밀한 사물들이 알맞게 배치됐다.

큰 것과 작은 것들이 조화로웠다.

화가가 맛보고 전한 감정은 평안한 안식이었다.

마치 성에서 평원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푸르게 밀이 자라는 들판을 바라보며 신께 안녕을 기원하는 화가의 신실한 감정이 느껴졌다.

화폭 안에 그려져 있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대가의 작품이 확실했다.

보는 것만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만한 역량이 갖추어져 있는 대가의 작품에서나 표현 가능했다.

“세잔의 그림 같아요. 자연이라는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낸 작품의 감정적 반응이 느껴집니다. 서로 다른 영역들이 보이지 않는 격자 구조 속에 숨겨져 화폭에 담긴 풍경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푸생에 의해 확립된 프랑스 고전학파의 전통적 특징입니다.”

장주아가 느낀 바를 솔직한 심정을 표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의 그림을 보고 자랐다.

전원의 풍경을 누구보다 잘 그려내던 엄마의 그림.

그것들을 보며 장주아도 자신만의 그림을 상상 속으로 수없이 그렸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반쯤 포기했던 미술학도의 삶이었다.

그러나 오빠의 성공으로 이렇게 한국대 미대생이 됐다.

소심했던 성격은 강단 있는 소신을 당당하게 발표할 정도의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몇 년 전 같았다면 이런 발표도 어색해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세잔? 그렇지? 자네도 느꼈나?”

장주아를 바라보는 심철수 교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네. 세잔의 ‘나무와 집이 있는 생 빅투아르 산의 풍경’ 화풍과 비슷해 보입니다.”

“오! 그 작품을 알고 있나? 자네 이름이?”

장주아는 엄마의 서재에 꽂혔던 세계 명화집 시리즈에서 봤었다.

대학교 1학년 수준이 아니라는 걸 심철수 교수는 알아챘다.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신입생이었다.

“장주아라고 합니다.”

“……아! 장주아!”

심철수 교수는 장주아라는 이름에 반색했다.

아는 학생이었다.

입학 실기 작품 중에서 눈에 띄는 묘사를 그려내어 기억했다.

비밀 평가였기에 합격한 뒤에야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기대가 크네.”

심철수 교수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학생들 모두 놀랐다.

O.T에서 선배들이 심철수 교수에게 칭찬 한 번 듣는 게 고래가 춤추는 것을 보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이 어딘가?”

“장주시입니다.”

“장주시? 어! 거기 괴물 녀석이 사는 곳인데?”

“네???”

‘장주시 괴물?’

장주아는 무슨 소리인가 의문에 빠졌다.

“이 그림을 기증한 녀석 말이야. 너희들은 모르지만 이 위대한 작품은 타과 학부생의 작품이다.”

“정말 학부생 작품이라는 겁니까? 그것도 타과생요?”

“설마…….”

“말도 안 돼…….”

한국대 미대는 한국 미술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실기능력 말고도 이론에 어느 정도 정통한 1학년들이 수군거렸다.

최소한 교수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것도 겨우 너희들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아.”

“네? 두, 두 살요?”

“화신(畵神)입니까?”

“어떤 과 학생입니까?”

“교수님 이름도 알려주세요! 아직 재학 중인가요?”

두서없는 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미술학도들답게 화신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했다.

신입생이라 그림 실력은 아직 떨어졌지만 보는 눈은 똑같았다.

눈을 통해 머리에 전달된 그림의 광채는 심장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보고 싶다면 수업 끝나고 법학과로 찾아가봐. 그곳에서 08학번의 전설 장태산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 다들 알려 줄 거야~.”

“네??? 자, 장태산요?”

장주아가 놀라 그만 큰 목소리로 이름을 반복해 물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그게……. 저희 오빤데요?”

“뭐라고? 태산 군이 자네 오빠라고?”

***

“오빠아아아아아!”

털썩.

170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에 청바지를 입은 늘씬한 미녀가 장태산에게 안겼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청바지 자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리가 반듯하게 뻗은 데다 탄탄한 허벅지 탄력과 발달된 히프는 예린이 봐도 부러웠다.

단발머리가 참 잘 어울렸다.

아직 고등학생 같은 풋풋한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지만 광택이 쩔었다.

자체 물광 피부.

눈썹은 가지런했고 오독한 콧날은 자연산이었다.

동그란 달걀 미인형 얼굴에 커다랗고 당당한 눈과 눈빛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선을 살짝 피하게 만들었다.

손에 차고 있는 얇은 팔찌와 끊어질 듯한 가느다란 금목걸이만으로도 액세서리는 제 역할을 다했다.

편안 셔츠와 대충 두른 점퍼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엿보는 것 같았다.

있는 집 자식이 확실했다.

꾸밈없는 행동 자체에서 황금 수저 집안 냄새가 났다.

그런 풋풋한 미녀가 장태산에게 달려들며 안겼다.

“휴우.”

이예린은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학교에서 봐왔던 뭇 여인들도 대단한데 새로운 여인의 등장이었다.

법대 퀸으로 불리는 이예린도 이제는 기가 꺾였다.

새로 시작하는 3월, 풋풋한 신입생에게 3학년 학생은 고목과 같았다.

“수업 끝났어?”

장태산이 다정하게 물었다.

“으으으으. 완전 죽였어. 1학년 수업이 뭐가 이렇게 빡빡해? 좀 놀면 안 돼? 인체해부학이 1학년 수업이야! 세상에……. 교과서를 봤는데 이건 고등학교 수업 내용 다 합친 것 같아. 그런 수업이 1학기에만 다섯 과목이야! 나도 언니처럼 미대나 갈 걸…….”

‘의대생이야? 저 미모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이예린은 눈앞의 학생이 의대생인 걸 알았다.

대한민국 문과에서 탑이 법학과라면 이과의 탑은 한국대 의대였다.

“다 그렇게 살아. 어디서 엄살이야.”

“뭐가 그렇게 살아! 오빠는 괴물이잖아!”

“그러니까 말이다. 괴물 동생은 괴물 아니겠어?”

“메에에에에~.”

장난스럽게 혀를 내미는 여학생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장태산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빠. 점심 쏠 거지?”

“주아 수업 끝나면 같이 먹자.”

“미대도 이렇게 빡빡할까?”

“그렇지 않을까? 주아는 실기 제출하다 날 샐 것 같다.”

“오빠가 어떻게 알아?”

“다 아는 방법이 있지~. 흐흐.”

“뭐야? 그 오만한 웃음은?”

“차는?”

“의대에 놓고 왔지.”

“선배들이 뭐라고 안 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던데? 동기생들 중에 나 말고 몇 명이 같은 차 몰고 다녀. 주차장에 대부분 외제차야.”

“다행이다. 저기 있는 우리 과 선배들보다는 통이 큰가 보네.”

“누구?”

장태산이 예쁜 여학생을 안고 있는 모습에 이미 넋이 나간 법대 노땅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와아……. 얼굴 완전 썩었어. 법대생들 다 그래?”

“오빠는 빼줘라.”

“풋…….”

거침없고 발랄한 의대생의 발언에 예린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언니 같은데…… 누구세요?”

“아 저는…….”

“인사해. 법대에 재학 중인 장주여고 2년 선배다.”

“법대생이라면……. 예린 언니?”

“어? 너도 장주여고 나왔어?”

“와아아아! 언니구나! 언니, 저 학교에서 봤어요! 언니 팬이었어요! 언니 완전 예뻐요! 흐이이잉!”

귀여운 후배가 발랄하게 손을 잡았다.

이예린의 얼굴에도 미소가 활짝 피었다.

우연한 곳에서 만난 고등학교 후배가 내심 반가웠다.

한국대 장주여고 출신들은 전체 신입생 중에 두세 명밖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런데 태산이 하고는…….”

“오빠예요.”

“오빠? 아! 그럼 그 쌍둥이???”

“어? 저 아세요.”

“당연하지. 태산이가 쌍둥이 자랑 많이 했어.”

“예린 언니 우리 오빠하고…….”

장주희가 뜸을 들이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오빠의 화려한 생활을 알고 있기에 호기심을 담았다.

“오빠가 차였다.”

“응? 오빠가? 진짜?”

장태산이 쿨하게 나왔다.

한때 썸을 탔던 이예린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니 그게…….”

이예린이 당황했다.

“진짜 잘했어요. 우리 오빠 나쁜 남자예요. 세상에 집에 누가 찾아왔는지 아세요?”

“집에?”

이예린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젠 깔끔하게 정리된 사이이지만 궁금증이 일었다.

“거기서 사적 발언 더하면 차키하고 카드 반납.”

“헙! 오빠 지금 협박하는 거야?”

“응~.”

“헐……. 쩐다. 울 오빠.”

“괜찮아. 내가 돈 버니까.”

“…….”

장주희가 입을 다물었다.

오빠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걸 주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입을 닫는 게 맞았다.

“오빠. 미안~ 헤에에에.”

바로 막내만 부릴 수 있는 애교 웃음으로 태세전환을 시도했다.

부우우우우우웅.

그때 큼지막한 수입 지프차 한 대가 법대 앞에 나타났다.

학생들은 쉽게 타고 다니지 않는 모델이었다.

덜컹.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 하나.

“어어어어…….”

“여신이다…….”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법대 재학생과 로스쿨 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튼튼하고 강렬한 빨간색 지프차에서 내린 여인은 천상 여자였다.

레드색이 섞여 있는 트위드 미니 스커트에 상의는 아이보리색 앙고라니트가 완벽하게 매치 됐다.

더욱이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새하얀 다리는 뭇 남성들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심쿵 크리티컬이 연속 터졌다.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칼은 남자들의 로망 그 자체.

또각또각.

남성미가 물신 풍기는 강렬한 차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여인은 구두 발자국 소리를 내며 법대로 다가왔다.

“오빠~.”

장태산을 향해 귀엽게 손을 흔드는 그녀.

“시바……. 또 장태산이냐?”

“저 새끼……. 나중에 제비로 잡혀오면 내가 사형 선고한다!”

“나 검사 될 거야! 저런 놈은 반드시 감옥에 처넣어야 해!!!”

눈 있는 법대생들 모두가 분노했다,

거리가 좀 있는 상황이라 정확한 관계를 몰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다만 장태산 주변으로 꽃다운 미녀 셋이 한꺼번에 몰려있다는 것 자체가 원통했다.

파바바바밧.

거리를 두고 주변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장태산과 세 여인에게 향했다.

“짧다.”

“……그래? 우리 과 여학생들은 나보다 더 짧던데.”

“오빠 기준에서는 짧아.”

“와아아. 뭐야? 그럼 여자 친구 기준이면?”

주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완벽하지~.”

“완전 못 됐어!”

“알바 할래?”

“오빠~ 사랑해요~. 난 시집 갈 때까지 저런 치마 안 입을 게요~.”

장주희의 태세 전환은 빨랐다.

“어~ 예린 언니. 안녕하세요.”

장주아가 이예린을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너 예린 언니 알아?”

“그럼~ 학교 다닐 때 3학년 언니들 중에 가장 예뻤잖아.”

“고맙다. 그런데 너도 한국대 입학한 거야?”

“네~ 미대 서양화과에 합격했어요.”

“…….”

이예린은 훈훈한 비현실 남매 비주얼과 실력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학교에서 남자들 중에 장태산보다 멋진 놈은 없었다.

동시에 이번 신입생들, 아니 전체 재학 중인 여학생들 중에 쌍둥이들보다 아름다운 여학생도 없었다.

부러운 집안 유전자였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저들 사이에 낄 수 없게 된 자신의 신세가 서글펐다.

“오빠 그런데 진짜야?”

장주아가 장태산을 보며 흥분한 눈빛으로 다짜고짜 물었다.

“뭐가?”

태연하게 반응하는 장태산.

“오빠가……. 전설이야?”

장주희가 확인하듯 물었다.

“전설? 오빠가? 그게 무슨 말이야?”

“교수님이 그러는데 오빠 그림 실력이……. 고흐와 고갱. 폴 세잔 급이래.”

“뭐라고? 누,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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