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
회귀의 전설
440장. 꽃피는 봄이 오면
“여기 30년산으로 쫙 깔아봐.”
“어머~ 오빠. 오늘 진짜 화끈하시다.”
“완전 내 이상형이야~”
“경록아~ 진짜 고맙다. 난 네가 출세할 줄 알았다. 흐흐흐.”
“우리의 성공한 친구 노경록을 위해 건배!”
“건배!”
강남의 쩜오급 룸싸롱에서 질퍽한 향응이 펼쳐졌다.
넥타이를 풀어 재낀 노경록과 대학교 친구들이 반라의 미녀들을 바쁘게 희롱했다.
얼추 술값만 계산해도 벌써 수백이 넘었다.
2차 비용까지 최소 1000만 원이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개 연구원인 노경록은 거침이 없었다.
미녀들이 비싼 양주를 맥주에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연신 건네줬다.
“캬아!”
“오빠~ 상남자야. 오늘…… 나 책임질 거지?”
“흐흐. 그럼~.”
알코올 기운과 후끈한 에너지가 룸 안의 공기를 뜨겁게 데웠다.
‘인생 뭐 있어~ X나 즐기다 가는 거지~.’
노경록은 시원하게 돈을 풀었다.
학창시절 일찍 취업해 사회 일원이 된 동기들.
취업 대신 대학원생이 된 자신을 무시했던 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의 힘을 보여줬다.
중국에서 정보 제출에 대한 감사로 현금 5억을 쏴줬다.
연봉 2억까지 합치자 요즘 돈이 넘쳐났다.
돈 쓸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연구소에서도 3주간 휴가가 주어졌다.
기회가 온 만큼 친구들에게 돈지랄의 정수를 보여주고 싶었다.
헤드 업체에서 정보를 더 물어오면 대가를 더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요즘은 돈이 돈 같지 않았다.
사실 노경록은 두렵기도 했다.
자칫 잘못 걸렸다가는 산업 스파이로 몰려 모든 걸 잃을 수 있었다.
그 불안감을 털어내기 위해 더 쾌락에 함몰됐다.
마시고 즐기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사로잡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흥청망청 향응을 즐겼지만 역시 오늘도 달렸다.
이제 내일이면 3월이다.
또 다시 연구에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은 뽕을 뽑기로 작심했다.
돈의 힘 앞에 한없이 친절하게 구는 친구들이 좋았다.
그들의 목적이야 뻔히 눈에 보였지만 입속의 혀처럼 구는 게 싫지 않았다.
“오빠~ 아~.”
이곳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여성을 품에 안았다.
며칠 동안 지정으로 찍고 용돈으로 천만 원을 쏟았다.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주를 챙겨 입에 넣어줬다.
이 순간만큼은 황제도 부럽지 않았다.
콰아아앙!
그때 갑자기 룸의 문이 부셔질 듯 거칠게 열렸다.
“뭐, 뭐야!”
“X발 이것들이 죽을라고!”
술에 취한 노경록의 동창들이 호기를 부렸다.
취해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을 막아섰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돌았나!”
쫘아아앗!
가죽점퍼를 입고 나타난 일단의 사내들이 가리지 않고 뺨을 후려치고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아아악!”
“컥!”
“아아악! 아저씨들 뭐예요!”
콰다다다당.
VIP 룸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다, 당신들! 경찰 부를 거야!”
상석에 앉아 있던 노경록이 놀라 외쳤다.
“경찰? 불러라 새꺄. 크크크.”
“니가 노경록이냐?”
“당신들 뭐야!!!”
“뭐긴 뭐야. 산업 스파이 잡는 대한민국 감시꾼이지~.”
“!!!”
산업 스파이라는 말에 노경록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 이런 사람이다.”
신분증을 스윽 꺼내는 한 남자.
“노경록. 널 산업기술보호법에 의거해 산업스파이 혐의로 체포한다. 영장 여기 있고 변호사는 부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고~ 유철아. 수갑 채워라.”
“넵! 선배님!”
대기 중이던 국정원 직원이 노경록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럼 이게 다?”
“X발 새끼! 이거 스파이 짓해서 번 돈이야?”
혀처럼 굴던 동기들의 눈빛이 달라지며 벌어진 상황에 놀라워했다.
모두 다 같은 계열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스파이 혐의가 얼마나 큰 죄인 줄 잘 알았다.
“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증거 내놓으라고!”
“똥 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야! 뭐해! 저 새끼 빨리 끌어내!”
명령을 내리는 국정원 직원.
미래의 적국에 대한민국의 재산을 팔아넘긴 노경록을 매섭게 바라봤다.
***
“우아앙……. 학교 겁나 넓어.”
“과외해서 자가용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하아……. 이 봄날 정말 미치게 좋다. 흐흐흐.”
3월의 꽃피는 봄날.
화사하기 그지없는 대학교 교정.
길고 길었던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찾았다.
2년 전 호기롭게 입학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학년이 됐다.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사방에서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아무것도 몰라서 더 행복한 시절들이다.
그에 반해 재학생이나 복학생들은 긴장한 표정들이 많았다.
금융 위기 여파로 갈수록 취업문이 좁아졌다.
그 여파가 한국대까지 몰아쳤다.
과거처럼 한국대 졸업장만으로 취업하던 시절은 끝났다.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청춘들의 숙제는 모두 다 똑같은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다.
딸깍.
법학관 아니 이제는 법학전문대학원으로 변신한 학과 건물에서 캔 커피를 뽑아들고 벤치에 앉았다.
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후배가 들어오지 않았다.
재학생들 상당수가 사법고시를 위해 신림동으로 진출했다.
로스쿨 학생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들은 마지막 성골이 되기를 원했다.
그에 반해 로스쿨 생들은 자신들을 진골이라 여겼다.
“아오……. 빨리 합격해서 연수원으로 들어가던가 해야지……. 이제는 학교 오는 게 불편하네.”
“그러게 말이다. 내 학과를 학과라고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는 이 심정은 어찌 하냐.”
“로스쿨 생들 X나 싸가지 없어. 우리가 동물원 원숭이야? 왜 그렇게 꼬나보는데?”
“선배들이 난리다. 이제는 후배라고 부르지 못할 놈들이 들어왔다고.”
“로스쿨은 개뿔……. 지들이 법을 알아?”
법학과 재학생들이 한쪽에서 담배를 태우며 법학전문대학원으로 간판이 바뀐 건물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학교를 졸업한 노땅 로스쿨 생들에게 시비를 거는 눈빛을 잊지 않았다.
한국대라고 세상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저 새끼들……. 우리 무시하는 거 맞지?”
“고시에 패배한 찌질이들이 담배나 꼬나물기는…….”
“우리가 먼저 임용된다. 새끼들아~. 킬킬.”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까지 졸업한 로스쿨 노땅생들이 학과 재학생들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학교 꼴 참 잘 돌아갔다.
나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들이지만 말이다.
아니 대낮부터 구경하는 그들의 신경전이 재밌었다.
애들 노는 꼴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 대한민국 사법계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
그때 향긋한 향기와 함께 미모의 여성이 나타났다.
“노는 꼴이 재밌잖아요.”
“……능력자의 여유야?”
“능력자요? 제가요?”
남자들 시선 한 몸에 받는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내 옆에 앉는 여인.
한때는 애증의 대상이었던 나의 첫사랑 예린 선배였다.
이제 불시에 그녀를 봐도 마음이 아주 편했다.
우리는 첫눈 내리는 날 아름답게 이별했었다.
마음에 있던 앙금을 털어내며 관계를 정리해서인지 더 이상 남은 게 없었다.
그저 학교의 미녀 선배일 뿐이었다.
예린 선배도 나만큼이나 편하게 내 옆에 앉았다.
봄이 되면 학교에서 커피 한잔하자던 그 말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면접은 왜 안 봤어?”
“아 그거요~.”
“아~ 그거? 너로 인해 학교 뒤집어졌잖아. 한국대 법학과 역사상 최연소 동차 합격생이 나올 뻔했는데 깨졌다고 말이야.”
올해 스물둘이 된 예린 선배는 매력적인 여성으로 성숙해져 갔다.
이제는 고학년 포스가 절로 묻어났다.
정제된 화장 기술과 미모는 법학관을 드나드는 남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빼앗았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해 두 번의 짝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었던 이예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지만 지금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녀로부터 내 영혼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충분히 따뜻한 시선으로 예린 선배를 바라볼 수 있었다.
“뭐냐? 그 시선……. 너 나에게 흑심 있어?”
“인류애로 똘똘 뭉친 감상입니다.”
“피이~ 사랑은 아니고?”
예린 선배가 바짝 다가왔다.
“아시잖아요. 제 눈이 저 하늘보다 높다는 걸~. 그리고 저 임자 있어요.”
“나도 됐어. 떠난 사랑 붙잡는 거 아니라고 몸소 배웠다.”
예린 선배도 눈빛에서 사심을 거뒀다.
물론 살짝 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묘한 기대감 같은 건 느껴졌다.
“학교는 무슨 일입니까?”
“학생이 공부하러 왔지.”
“휴학 안 했습니까?”
“1차도 합격 못 했는데 휴학은…….”
“당당하던 예린 선배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래 나 씹고 뜯어가며 스트레스 풀고 오래오래 살아라.”
“선배는 잘 될 겁니다.”
“그럼 나 노하우 좀 가르쳐 주라?”
“노하우요?”
“소문 쫙 났잖아. 너 천재라고. 그래서 학필 선배도 합격시켰다고 하던데?”
“그래요?”
학필 선배가 내가 원하는 바를 뿌려줬다.
똑똑한 양반은 역시 달랐다.
“진짜야? 학필 선배가 네 도움을 엄청 받았다고 말하고 다니잖아. 진짜 그런 능력 있어? 그래서 3차 면접 안 본 거야?”
“순위권도 안 들었는데 어떻게 면접을 봅니까. 장태산 이름값이 있지.”
“와아아……. 너 진짜 재수 없어.”
“아직도 몰랐어요.”
“밥맛이야! 어머머.”
“한때 저도 선배에게 그런 마음 품었습니다.”
“……그건 미안해.”
“됐습니다. 우리 퉁 치죠 뭐. 같은 밥맛끼리~.”
“뭐라고! 아오오! 이예린 성격 많이 죽었다.”
예린 선배와 이렇게 노닥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통했던 과거의 추억이 있어서 더 편했다.
세상에 좋은 이별도 존재하긴 했다.
“쟤가 장태산이야?”
“맞네. 장태산. 작년에 2차까지 합격하고 3차 면접 안 본 놈.”
“저 새끼 1학년 때부터 봤는데 아주 재수똥이다.”
“왜?”
“보면 모르냐? 반반한 얼굴 믿고 여자 후리고 다니잖아. 법학과에 저 새끼 보려고 미대생들 음대생들 장난 아니게 왔었잖아.”
“예린이도 사귀다가 찼다며?”
“그래?”
“저것 봐 예린이가 붙잡고 사정하잖아.”
“인성 쓰레기네!”
“집안이 지방 졸부래. 학생 신분에 스포츠카 타고 다니고 아주 정신 상태가 개판이야.”
“그래도 실력은 있겠지…….”
“실력은 무슨! 운빨 9에 실력 1이겠지.”
한쪽에서 법학과 선배들이 수군거렸다.
예린 선배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똑똑하게 들렸다.
못난이들에게 나를 오징어처럼 씹으라고 모른 척해줬다.
저렇게라도 정신적 승리를 맛보고 스트레스 풀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악신들이 당신에게 응원의 포인트를 던집니다!
- 당신을 질투하는 인간들이 어둠의 카르마를 듬뿍 쌓았습니다.
물론 의도치 않게 부작용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죽을 때 저승사자들이 선배들을 ‘귀인’이라고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뭐해? 수업 있어?”
“아니요.”
“그럼?”
“누구 좀 기다립니다.”
“누구?”
예린 선배가 관심을 보였다.
그때!
“태산 오빠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