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
회귀의 전설
438장. 믿음과 배신 (2)
“다니엘 장……. 아니 한국명으로 장태산……. 한번 만나보고 싶은 친구야.”
파리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교외에 위치한 대저택.
저택 집무실에서 한 남자가 보고서를 보며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윤기가 남다른 금발에 훤칠한 키.
입가에 맴도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손목에 차고 있는 최고급 명품 시계.
가볍게 걸치고 있는 옷차림만 봐도 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상급 아사신을 혼자 처리했다 이거지……. 도대체 정체가 뭘까?”
남자는 성전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기사 가문의 장자 루이스 발루아였다.
그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보고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가문의 기사들도 처리하기 힘든 놈들이 아사신들이었다.
그런데 홀로 여동생을 구하더니 이제는 동계 올림픽에서 테러리스트들까지 정리했다.
핵심은 아사신을 처리한 그의 방식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는 점에 있었다.
“마법사라…….”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시체를 처리했던 기사들이 보고한 내용은 한결 같았다.
“정체 모를 무기도 있고……. 이거 뭔가 있어. 뭔가가…….”
루이스의 눈빛이 짐작하기 힘들 만큼 깊어졌다.
다니엘 장이라는 자와는 안면은 없었지만 인연이 깊었다.
다들 쉬쉬 하지만 비밀 정보를 통해 여동생 비비안과 썸을 탔었다는 것까지 알았다.
그 녀석 때문에 여동생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도 있었다.
파리에서 빠져나가 그와 짧은 여행을 했던 행적도 파악됐다.
그리고…….
“클라라의 전 연인이었지. 후후.”
루이스 발루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뭔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타나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지금껏 유럽의 보이지 않는 왕자로 살아왔다.
영국 옥스퍼드뿐만 아니라 미국의 MBA 코스까지 마쳤다.
운동에도 두각을 나타내 뭇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느 분야에서든 실패를 모르고 살았다.
그런 루이스 발루아는 정보서류에 딸려온 몇 장의 사진을 매서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가볍게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눈빛은 몹시 차가웠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한참 격이 떨어지는 동양인에 불과했지만 기분이 나빴다.
놈은 여동생뿐만 아니라 아내까지 좋아했던 사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질투라는 감정이 맞았다.
심장을 타고 느껴진 스트레스는 묵직한 둔통으로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처음에는 정략결혼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라를 보고난 후 마음을 빼앗겼다.
얼굴만 믿고 사치를 즐기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동시에 미모도 못지않게 받쳐주었고 가문도 좋았다.
동양 혼혈이라는 게 다소 걸렸지만 프랑스 귀족 가문의 핏줄이었기에 희석됐다.
만나보고 더 좋은 여자라는 걸 알았다.
대화가 잘 통했고 우수에 젖은 눈빛에 끌렸다.
최근까지 만나본 여성들 중에서도 단연 독특한 분위기를 소유한 최상의 미녀였다.
루이스도 진심으로 클라라가 좋았다.
결혼 후에 신혼의 밀회를 마음껏 즐겼다.
도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클라라는 루이스의 의견에 잘 따라주었다.
그런데 우연히 알게 된 그녀의 과거.
루이스가 느끼는 일방적인 질투심과 함께 찝찝함이 밀려왔다.
계속해서 그 녀석과 자꾸 엮이는 점이 불편했다.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200억 달러를 홍콩상행은행에 던졌고 그게 수익률이 나쁘지 않았다 이거지. 정말 투자의 귀재란 말인가?”
로버트 라이언과 친구 사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세계적으로 달러가 품귀 현상을 보일 때 로버트 라이언으로 하여금 홍콩상행은행에 200억 달러를 투자하게 만들었다.
그 힘으로 홍콩상행은행은 유동성 위기를 돌파했다.
투자금은 다른 투자금을 불러왔다.
문제는 그때 체결한 계약으로 인해 로버트 라이언이 단시간에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는 것이다.
무려 100억 달러를 더 벌어들였다.
로버트 라이언은 금융대여가 아닌 주식 투자계약서를 작성했다.
이자는 그 당시 기준으로 저렴했다.
홍콩상행은행에서 발행한 주식 중 약 20%가 담보로 잡혔다.
폭락하는 시장가로 구입했지만 기간을 정하지 않고 1년 뒤쯤 스톡옵션처럼 아무 때나 그 당시 시장가로 은행이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위기가 지나가자 은행 주식이 치고 올라갔다.
당시에는 자금이 필요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배가 아팠다.
벌써 시세 차익이 엄청났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홍콩 결혼식 날 장인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중국 살수들의 손이 잔인하다는 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물처럼 짜인 모든 위기를 돌파하고 그 틈에서 살아남은 장태산.
루이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놈은 보통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난 직후부터 가끔 클라라가 창밖을 바라보고 멍해지는 걸 봐왔다.
당시에는 루이스는 그 모습이 클라라가 가진 분위기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과거를 잊지 못한 아내.
그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뱃속의 아이로 인해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자꾸 그녀의 과거 흔적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한 때는 쿨한 남자의 대명사였던 루이스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했다.
결혼 후 클라라가 배신한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믿음이 흔들렸다.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가문에서 내려오는 예지력도 소용없었다.
놈에 대해 생각을 집중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인간으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대단한 비밀을 가진 듯한 다니엘 장.
루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자국이 남을 만큼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갔다.
***
“레드 체리, 야생 산딸기, 블랙 베리……. 그리고 은은한 우드향이 가미된 산뜻한 맛이 느껴지는데 어떻습니까?”
“……아몬드 향과 스모키 향도 나는 것 같아요. 품종은 코르비나 맛이 나요.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의 와인 맛 같아요.”
“빙고. 대단한 평가입니다. 맞습니다. 이 녀석들은 베네토 지역의 코르비나 품종을 참고해 만들어진 와인입니다. 대형 오크 베렐에서 숙성시켜 본연의 맛과 향뿐만 아니라 섬세한 스타일의 와인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지역에서 직접 공수해 온 체리와 아카시아 나무로 제작되었습니다.”
“귀한 와인을 접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 방문해 줘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웃었다.
사라 요한슨은 남자의 웃는 모습에 미소로 화답했다.
남자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사라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테러리스트를 처리했다.
가문에 도움이 많이 됐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은 가문이 확장하고 있는 사업에 악영향을 끼칠 요소였다.
예기치 않은 변수 중 하나였다.
기대했던 대로 위험요소를 처리하고 메달까지 딴 남자는 한국으로 떠났다.
만남을 기대하고 있던 사라는 연락을 주지 않은 그에게 실망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초대장을 보내왔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대형 와이너리와 별장으로 그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대우는 생각했던 것보다 극진했다.
저녁을 들기 전에 가볍게 와인을 시음했다.
겨울임에도 따뜻한 캘리포니아였다.
초가을 날씨 같은 분위기에 야외에서 마시는 와인은 맛이 끝내줬다.
선선한 바람과 어울리는 대지의 감미로움이 느껴지는 포도주.
저물어가는 붉은 석양이 멋스러운 안주가 됐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마시는 와인의 맛은 배가 됐다.
사라는 한 잔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동안은 하룻밤 스쳐 지나가는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다니엘.
그런 그의 대한 생각이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신이 내린 미술가적 재능은 물론 바이올린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월가의 전설이 되어 가는 로버트 라이언의 동료이자 이제는 동계 스포츠 메달리스트였다.
또한 테러분자들을 홀로 처리해 낸 강자였으며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로맨티스트였다.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오늘은 일에 관련한 얘기 좀 할까요?”
“네? 일요?”
“투자자 다니엘 장과 차일드 가문과의 대화 자리입니다.”
손을 깍지 낀 채 사뭇 다른 표정을 짓는 다니엘.
“어떤 일인지…….”
공적인 자리라고 말하지만 이미 사라는 다니엘에게 감정적으로 포로가 된 상태였다.
“제가 이번에 배터리 사업에 공장을 설립하고 직접 투자할까 생각 중입니다.”
“직접 투자요?”
“네. 그래서 미국 쪽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배터리라 하면 어떤 쪽인가요? 리튬 계열인가요?”
사라도 일에 있어서는 알 만큼 알았다.
자신 있게 말하는 다니엘의 말에서 흥미가 느껴졌다.
가문에서도 미래 유망 사업에 대해 종종 보고를 받았다.
화석 연료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대신해 서서히 전기차 시장이 발돋움하고 있었다.
사물 인터넷과 결합한 전장산업과 동시에 자동차 배터리 분야는 미래의 확실한 먹거리였다.
가장 대표적인 배터리가 리튬이나 리튬 혼합물 전지였다.
차일드 가문이 세상의 군림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선견지명이 뛰어나서였다.
지금은 직계와 방계가 화합하지 못하고 있지만 어느 때나 공통의 적이 나타나면 공동대응태세를 갖췄다.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먹잇감을 다른 경쟁자들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그게 바로 차일드 가문의 저력이자 전통이었다.
“슈퍼 커패시터입니다.”
“슈퍼 커패시터요? 그건 아직 단가도 비싸고 용량이 커서 대량화하기 힘든 분야 아닌가요? 투자 시장도 작은 걸로 알고 있어요.”
“단점을 극복하면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사업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껏 인류 역사가 증명했듯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에서 대박이 터지는 겁니다.”
“아!”
사라는 남자의 확신 가득한 말에 감탄했다.
다니엘이라는 저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내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그 말씀은…….”
사라가 급히 물었다.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다니엘이 간략하게 정리한 보고서 하나를 내밀었다.
“뭔가요?”
“제가 준비하고 있는 슈퍼 커패시터에 대한 1차 연구 보고서입니다. 흥미로울 겁니다.”
와인을 다시 마시는 다니엘.
‘뭐지? 도대체 뭔데…….’
보통 월가의 투자자들은 대부분 간접적 투자 방식인 주식이나 선물, 환율 시장에 뛰어 든다.
직접 투자는 엔젤 투자가 대다수다.
공장이나 사업 경영은 인수합병 뒤 매각이 아니면 손대지 않았다.
넘쳐나는 사업이 많은데 굳이 제조업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은 강제적으로 금융시장이나 주식시장을 개방해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그게 미국의 방식이고 힘이었다.
세계 각국 대기업들 중 상당수는 미국 자본의 힘에 의해 주식을 넘긴 상태다.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 이유는 각국 정부와 여론을 상대하며 피곤하게 싸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주식이라는 형식적 물량만 있다면 통제하기가 쉬웠다.
꿀물만 빨아 마시면 됐다. 꿀통은 관심 없었다.
지금도 미국 행정부는 각국과 양자간이나 다자간 협상을 통해 금융 시장을 개방시키고 있었다.
사락사락.
사라는 보고서를 천천히 넘겼다.
경영과 과학에 대한 기초 지식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보고서는 슈퍼 커패시터에 대한 내용이 맞았다.
‘울트라 슈퍼 커패시터?’
제일 앞장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다.
흥미를 가지며 사라는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용 역시 흥미로웠다.
새로 개발된 물질을 이용한 슈퍼 커패시터에 대한 연구 보고서였다.
사라는 내용에 빨려 들어갔다.
시시각각 인상이 변했다.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내용들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50에서 10,000 헤르츠 주파수 영역에서도 에너지 저장 가능, 물성의 다양성을 추구 가능, 5만 번 이상의 충방전이 가능, 수천 배 이상으로 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이게 말이 돼!’
“!!!”
사라는 눈에 보이는 수치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뭔가요?”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봤다.
“보시다시피.”
“이런 말도 안 되는…….”
“됩니다.”
“다니엘……. 이 정도라면 엄청난 산업적 파괴력을 발휘할 거예요. 이건 사업 정도가 아니라 인류 과학 문명과 산업계에 혁명적 사건이 될 게 분명해요…….”
사라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얼토당토 않는 보고서였지만 다니엘이 건넨 만큼 믿음이 갔다.
온몸이 떨렸다.
시장 가치는 측정 불가능했다.
당장 자동차 분야에서 슈퍼 커패시터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직 연구 단계지만 이게 실현된다면 석유 사업은 된서리를 맞이할 게 확실했다.
화석 연료로 작동되는 모든 엔진들이 전기로 굴러 갈 것이리라.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파란을 일으키겠죠.”
“특허가 없는 것 같은데……. 이 물질이 뭔가요?”
“그거요. 영업비밀인데~”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말을 흐렸다.
공적인 만남으로 사업에 관한 대화를 하는 중이지만 제약 없이 행동했다.
그만큼 사라를 편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자료를 저에게 보여준 이유는 뭔가요?”
사라는 진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메가톤급 폭탄이 될 연구 보고서였다.
“사라, 당신이라면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게 이유라면…… 믿겠어요?”
다니엘이 더 없는 따뜻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의 눈빛은 말처럼 확신에 차 있었고 흔들림이 없었다.
또로록.
갑자기 사라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원하던 상황과 분위기는 절대 아니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네……. 전 믿어요. 당신의 말이라면……. 그게 어떤 말이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