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7화 (436/1,284)

 # 437

회귀의 전설

437장. 믿음과 배신 (1)

“안 추워?”

“네…….”

추울 리가 없었다.

따가닥 따가닥.

짐이 가득 실린 마차에 올라 영주와 나란히 붙어 앉았다.

마법을 통해 추위는 차단했다.

마차는 강력한 경량화 마법을 걸어두어 매우 가볍게 이동했다.

소복하게 쌓인 눈밭에서도 씩씩하게 마차를 끄는 말을 바라보며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 옆으로 더 바짝 붙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러고 싶었다.

꿈같은 하룻밤이 지났다.

두 사람은 요새에서 밤을 보냈다.

따뜻한 장작이 주위의 추위를 물리는 동안 영주는 숯불에 고기를 직접 구워주었다.

세상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아린으로서는 추억 하나를 더 만든 셈이다.

맥주도 한 잔 마시면서 영주가 불러주는 감미로운 노래도 들었다.

음유시인이 따로 없었다.

영주 목소리와 타닥거리는 장작 타는 소리에 절로 눈이 감겼다.

잠깐 존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그의 품에 안겨 깊이 잠들어 버렸다.

살아오는 동안 기억에 남은 모든 잠들 중에 가장 편안한 잠이었다.

마수의 살기에 바짝 긴장해 있던 마음도 진정이 됐다.

새벽에야 잠에서 깼다.

자신을 품에 안은 채 그도 잠에 빠져 있었다.

아린은 눈 감고 잠들어 있는 그를 아무 말 없이 하염없이 바라봤다.

사랑스러웠다.

마수와 대적해 싸울 때 보였던 모습과 또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많이 영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느꼈다.

그를 앞에 두고 보고 있으니 그 생각이 더욱 절실했다.

그를 생각만 해도 심장이 뜨거워졌다.

하루하루 그와 쌓는 추억들을 되새기다 밤을 샌 적도 많았다.

어제처럼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삶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아린의 가슴 속에서 여러 감정들이 동시에 소용돌이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마음을 다시 다잡고 결심했다.

마법사가 된 이후 어제 같은 위험은 처음 맞닥뜨렸다.

급작스럽긴 했지만 마수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강해질 거야.’

아린은 잠든 영주를 바라보며 그를 위해 더 강한 마법사가 되기를 소망했다.

지금 실력으로는 그를 돕는 것은 희망일 뿐 한계가 있었다.

7서클 마법사였지만 마법 운용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자신은 이제 겨우 마나 서클 정도가 완성된 초짜 7서클 마법사였다.

스스로에게 남겨진 비밀스런 가문의 무게도 이제는 벗어던져 버리리라 결심했다.

정작 기억 하나 없는 가문의 핏줄이었다.

위대한 가문을 부활시키라는 스승의 유언은 실현 불가능했다.

7서클 마법사가 되어서도 스승의 유언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공간은……. 아는 분에게 선물 받았어.”

“……네.”

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그 아는 분이 드래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과거 가문을 일으켰던 조상도 드래곤의 가호를 받았었다.

아공간이라는 마법의 총아는 인간 한계인 7서클 마법사부터 다룰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마법으로 비틀어 자기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을 만들어 가질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다.

아공간을 만들어 다른 이에게 넘겨 줄 수 있는 자는 8서클 마법사부터나 가능했다.

그러니 그 아는 분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절대 평범할 리가 없었다.

그것 말고도 영주에게서 느껴지는 비밀은 많았다.

분명 바로 곁에 있는 동안에도 어떨 때는 분위기가 확 바뀔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아린은 깜짝깜짝 놀랐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숨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 나이에 저 실력은 말도 안 됐다.

자신도 엄청난 특혜를 받아 이 경지에 올랐지만 영주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마법도 할 줄 알아.”

“알고 있어요.”

“언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영주가 이것저것 마법을 알아볼 때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마법사의 상식으로는 영주의 행동이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영주가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됐다.

마법사만이 풍기는 마나 향기가 그에게서 진하게 풍겨왔다.

기사와 달리 마법을 품고 사는 마법사에게서나 풍겨 나오는 달큰한 마나의 향기.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마나 운용 능력이 말도 안 되게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다.

고서클 마법사들처럼 말이다.

“나 괴물 아니야.”

“네…….”

괴물은 차라리 아린 자신이었다.

영주를 만나기 전까지 거울을 볼 때면 아린은 스스로를 괴물이라 생각했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조건으로 행해진 저주의 마법.

그 마법이 풀리기 전까지 그녀는 괴물의 얼굴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세상에 단 한 명 베커 영주만은 아린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말 안 한 비밀도 있어. 그건 말 못 해. 이해해줘.”

“저도……. 비밀이 있답니다.”

“그래?”

영주가 살짝 놀란 눈으로 아린을 봤다.

영원히 말 못할 비밀로 묻힐 수도 있는 그런 비밀.

씨이익.

그가 따뜻하게 웃으며 아린의 허리를 가만히 안아왔다.

굳이 말 안 해도 서로를 신뢰하고 있는 눈빛.

아린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정말 좋은 여자였다.

위험한 곳임을 알면서도 나를 찾아왔고 나의 말을 모두 믿어줬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비밀도 나라는 사람이 이계인이라는 비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따각따각.

마차는 눈 쌓인 길 위를 수월하게 나아갔다.

아공간에서 꺼낸 스테인리스 접시들이 빼곡히 실렸다.

마법은 여러모로 정말 편리했다.

아공간의 정체를 알게 된 아린은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신뢰를 가득 품은 눈빛으로 나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런 아린이 좋았다.

지구에서의 인연들과 좀 달랐다.

이곳에서는 나 또한 그녀만 생각할 것이다.

얼굴에 남은 흉한 흉터 따위는 감춰진 그녀의 내적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그녀의 감춰진 내면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좋냐? 좋아?

오랜만에 알파닥이 시비를 걸어왔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하급 마력석과 대단히 뛰어난 중급 마수의 마력석을 획득했다.

마수 가죽은 덤이었다.

아공간에 차곡차곡 쟁여진 수확물은 생각만으로도 배부르게 만들었다.

어젯밤도 무척 행복했다.

여친과 캠핑을 온 것 같았다.

이계의 낯선 성에서 모닥불 피우고 여친과 보내는 긴 밤은 아름다웠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또 별을 세보기도 했다.

생각만으로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와 어깨를 맞대고 보내는 밤.

다시 생각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알파닥! 질투하면 지는 거야! 흐흐흐.

- 아오! 나쁜 새끼. 너랑 말을 섞으면 내 격이 떨어진다.

달달한 염장질에 걸려들어 질투하는 알파닥이 안타까웠다.

부러우면 너도 여자 친구 만들어~

- 나 남자 좋아한다고!!!

응?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래?

알파닥 너 혹시 게…….

- X신! 쪼다! 말미잘…….

알파닥과 말따먹기를 하며 눈길을 나아갔다.

바쁠 것 하나 없었다.

한 팔에 안긴 아린의 가느다란 허리.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을 스치는 그녀의 향기는 특급 조향사가 제조한 향수와 비교가 안 됐다.

하늘은 맑았고 겨울 태양은 눈이 아플 만큼 밝았다.

아무도 걷지 않은 흰 눈길 위를 천천히 나아가는 마차와 그 위에서 영화 한 편 찍는 나와 아린의 모습.

명화의 한 장면에 쓸 만한 목가적 풍경의 결정판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그때 저 멀리 구릉에서 눈 먼지가 일었다.

일단의 말을 탄 무리들이 달려왔다.

거리가 좁혀지자 마차를 발견하고 그대로 내달려오는 무리들.

“주구우우우우우운!”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영지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었다.

***

“미친…….”

TS 큐셀 연구원 노경록은 최종 보고된 수치에 경악했다.

비밀 연구 중인 김재열 수석 연구원에게 수없이 아부를 했다.

정성이 통했는지 비밀 연구 합류를 통보 받았다.

연구는 회사에서 극비로 진행됐다.

집에 가는 것도 금지됐다.

일체의 통신, 핸드폰을 비롯해 메일도 통제를 받았다.

새로 투입된 경호원들이 주변을 더욱 삼엄하게 감시했다.

모든 실험은 은밀하고 빠르게 진행됐다.

실험에 드는 모든 비용은 무제한으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연구 끝에 획득하게 된 엄청난 정보.

1차 개략적인 연구가 마무리됐다.

지난 몇 달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보안구역 안에서 연구만 했다.

자신이 처음 봤던 자료가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됐다.

연구를 거듭할수록 확인하게 되는 기술적 수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스르르릇.

연구실에 딸린 숙소에서 한숨 자고 나온 수석연구원 김재열이 들어섰다.

“하암~ 경록아 한숨 자고 오라니까.”

연구를 끝낸 김재열이 기지개를 켜고 다가왔다.

그동안 친해져 형, 동생하는 정도의 관계가 됐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흐흐흐. 나도 사실 그래. 이건……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될 마법의 열쇠야. 이름 하여 울트라 슈퍼 커패시터!”

연구원이자 과학자인 김재열의 목소리에는 감동이 가득 담겼다.

자신이 개발한 물질은 아니지만 분해하고 맛보면서 느꼈던 희열은 그 어떤 감각보다 짜릿했다.

“맞습니다. 울트라 슈퍼 커패시터……. 세상을 바꿀 혁명입니다!”

노경록도 맞장구를 쳤다.

“이거 상용화되면 리튬계열 밀던 배터리 업체들 싹 망한다. 충전 복잡한 전기차? 그런 건 개나 주라고 그래.”

“개도 안 받아 갈 겁니다. 흐흐흐.”

‘진짜 미친 거야. 이건…….’

노경록도 진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차세대 에너지 저장 장치인 슈퍼 커패시터 계의 파란을 일으킬 연구 결과였다.

지금 연구 중인 그래핀 계열이나 칼고겐화합물, MXene 같은 2차원 나노물질 슈퍼 커패시터는 망할 것이다.

축전기라 불리는 커패시터는 전기를 임시 저장한 뒤 일정한 전압으로 공급해 주는 전원장치를 말했다.

개중에서 콘덴서의 전기용량 성능을 중점 확대하고 강화해 전지 목적으로 사용되는 슈퍼커패시터라고 불렀다.

일반 배터리는 느린 전하 속도로 높은 주파수의 에너지를 저장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슈퍼커패시터는 아니었다.

지금 개발한 녀석은 50에서 10,000 헤르츠 주파수 영역에서도 에너지 저장 기능을 보였다.

가루를 내어 만들 수 있기에 물성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도 있었다.

동시에 이론적으로 5만 번 이상의 충, 방전이 가능했다.

지금껏 개발한 거대 용량이 필요한 슈퍼 커패시터와 달리 수천 배 이상으로 용량을 줄일 수 있었다.

리튬배터리를 차 바닥에 깔지 않아도 빠른 충방전과 영구적 이용이 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재활용성 및 환경오염 문제도 해결됐다.

“맞아. 개도 안 물어 갈 거다. 방전과 동시에 전압이 떨어지지 않는 괴물의 탄생이니까…….”

김재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갑자기 얻게 된 물질 특성은 아직도 파악 못했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확신했다.

자신의 손으로 확인한 물질은 세상을 뒤바꿀 신이 주신 혁명적 물질이었다.

단박에 모든 걸 집어삼킬 것이다.

모든 전기차는 이걸로 대체될 수 있었다.

2차 전지의 에너지 밀도와 안정성을 확보했기에 에너지 저장 소재의 끝판왕을 먹을 게 확실했다.

빠른 충전과 안정적 출력, 자가용 같은 경우에는 1회 충전으로 수천 킬로를 주행할 수 있었다.

주유소를 비롯해 배터리 업계에 사망 선고가 내려질 것이다.

자가발전, 신재생 에너지, 서물 인터넷, 전기차, 전자소자를 비롯한 전 산업 분야에 적용 가능했다.

극복 못할 것 같았던 에너지 저장 장치의 물성 딜레마를 극복한 원천 기술이었다.

미래 시장 기치는 수백, 아니 수천 조가 넘을 것이다.

이런 게 상용화 된다면 TS 그룹은 세계적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뀔 게 뻔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노파심에서 다시 하는 말이지만 경록이 너 어디서 입도 뻥긋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왜 겁주고 그럽니까. 그리고 저 그런 놈 아닙니다. 엄청난 연봉에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는데 어디다 이걸 뻥긋 합니까.”

“그렇지? 우리 이거 연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앞으로 10년 치 일감은 확보했다.”

욕심이 소소한 김재열.

연봉이 무려 10억이 넘는다.

한 달에 1억 가까이나 되는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회사에서 집과 차도 제공됐다.

대기업 연구소도 이런 대우는 드물었다.

“형님만 믿겠습니다!”

아부를 떠는 노경록.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과 눈빛이 달랐다.

‘흐흐흐. 그런 푼돈은 너나 가져 새꺄~.’

이미 중국 쪽과 말이 되어 있는 노경록.

착용하고 있는 두툼한 안경을 통해 모든 기록들이 저장됐다.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산업 스파이 행동이었다.

최소 100억이 보장된 자신의 미래.

노경록의 탐욕에 젖은 눈동자는 두려움도 없이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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