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5
회귀의 전설
435장. 사랑에 빠진 마법사
“영주님은 아직인가?”
“……소식이 없습니다.”
“정찰병들은?”
“어두워져 모두 돌아왔습니다.”
“하아…….”
기사 카르스는 병사의 보고를 받으며 돌아오지 않는 영주를 기다렸다.
영지가 안정기에 들긴 했지만 과거 기준에 비하면 겨우 남작 가문급 정도에 그쳤다.
특히 마력을 다루는 기사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체가 모호한 여자 마법사는 실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능력이 뛰어난 영주가 혼자 산맥으로 향했다.
의연히 마차를 끌고 성을 나서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주군…… 어디에 계시나이까.”
성벽 위에 서서 어둠에 싸인 산맥을 카르스는 바라봤다.
영주가 향한 곳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주군을 목숨처럼 섬기는 기사는 소식이 없는 영주 때문에 속이 탔다.
동행을 요구했지만 기어코 거절당했다.
특히 겨울 산맥에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마수들도 수시로 출몰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자칫 큰 사고라도 당했다면 영지 운명은 장담할 수 없었다.
“카르스 경. 걱정하지 말게. 주군은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마른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탈만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영지 사정상 어찌 기사 신분이 되긴 했지만 전직 용병의 때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탈만은 고상한 칼질보다 육포를 씹고 빵을 수프에 푹푹 찍어 먹는 게 편했다.
서로 존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기사에게도 가벼운 반말을 했다.
오직 이곳 영지에서만 가능한 방식이었다.
고리타분한 기사들이 텃새를 부리고 죽치는 다른 영지와는 달랐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마음처럼 안 돼.”
카르스도 이런 탈만에게 빨리 적응했다.
기사 가문 출신에 명예까지 갖춘 카르스였지만 허식을 버렸다.
“맥주 한잔할까?”
“주군이 돌아오시면…….”
“크크. 주군이 애도 아니고~.”
“다우링 산맥은 언제나 위험해.”
“지금껏 조용하잖아.”
“항상 그럴 때마다 사고가 크게 났지. 덱턴 요새에 마수가 나타나 경비하던 기사와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도 있어.”
“걱정 마. 우리 주군 강해.”
“휴우…….”
한숨을 크게 내쉬는 카르스.
시선을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성벽 안쪽으로 안정적이게 과거 모습을 되찾아가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빵 굽는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 올라왔다.
“믿기지 않지?”
탈만이 카르스와 같은 시선으로 마을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환상 같아.”
충실한 기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답했다.
“대륙에 이런 영지는 없지.”
한때 용병 신분으로 대륙 곳곳을 여행했던 기사도 꿈꾸듯 대꾸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상상해 왔던 완벽한 이상형의 영지였다.
영주는 강하고 착했으며(?) 능력자였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진심으로 영주를 아꼈다.
영지민들도 하늘이 주신 성자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맞아. 이런 영지는 대륙에 없지. 1년 만에 폐하가 된 백작 영지를 이렇게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주군 같은 능력자는 없지.”
카르스도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주군이 없다면 불가능해. 이 평화가…….”
탈만도 뼛속 깊숙이까지 주군의 능력을 인정했다.
베커 영주 홀로 일궈낸 평화의 상징이 된 영지였다.
그가 없었다면 이곳은 이 많은 영지민들은 맛있는 먹잇감이 되기에 딱 좋았다.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이웃 영주가 이 평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그래서 하루에 세 번 신께 기도하잖아. 우리 주군 만수무강해서 황제까지 해 드시라고~.”
“…….”
탈만의 농담에 카르스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머릿속에서 똬리를 풀며 꿈틀거리기 시작한 거대한 욕심 하나.
주군이 혼란한 대륙의 정세를 잠재우고 위대한 황제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허접한 기사나부랭이 몇 명과 조잡한 병사들로는 이곳 영지 하나를 지켜내기도 벅찼다.
“아! 내가 말 했나?”
“뭐 말인가?”
“마법사님이 사라졌어.”
“어? 어, 어디로?”
“흐흐. 꼭 말해야 알아?”
“???”
의문을 표하는 카르스.
“아우! 뜨거운 사랑의 경험이 있다는 기사의 말은 뻥이었어?”
“아!”
카르스는 그제야 탈만의 말을 이해를 했다.
“사랑 참 좋은 거야~. 연인이 걱정되어 성벽 위에 오매불망 서 있다가 훌쩍 날아가 버린 한 마리 새 같은 마법사. 젠장……. 난 언제나 그런 사랑 받아보냐~.”
부러움을 내비치면서도 주군과 마법사가 만났을 산맥 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탈만.
유쾌한 말과 달리 그의 눈동자에도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인어야 수고했어~”
촤아아아앗.
수고했다는 말에 기분 좋은 듯 성벽에 물을 한 바탕 뿌리는 귀여운 물의 정령.
오크들은 아주 똥개새끼들이었다.
세상에 요새 곳곳에 똥을 얼마나 많이 쏴놨는지 치우는 데 한참 걸렸다.
빈 공간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건 아무 곳에나 싸질러 놨다.
먹다 만 온갖 뼈다귀는 치워야 할 쓰레기 중에서도 양반 축에 들었다.
마법사와 전사를 구성해 다닐 만큼 조직적인 놈들이 청결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었다.
신선한 고기까지 썩혀 별미로 즐긴다는 놈들답게 면역저항력이 뛰어났다.
물의 정령을 불러 더러운 요새 곳곳을 청소했다.
흙저씨는 온갖 쓰레기들을 깊게 파고 들어가 묻었다.
바람의 정령이 구석구석에 쌓인 묵은 먼지를 날렸다.
화룡이는 습기 쩐 곳곳을 화기로 말렸다.
완벽한 정령들의 청소 덕분에 해질 무렵이 돼서는 요새가 보기 좋게 깨끗해졌다.
말끔하게 드러난 고풍스런 성벽 돌들이 멋졌다.
내공이 쭉쭉 소진돼 갔지만 보람이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오크 대전사 몸에서 마력석도 추출했다.
“좋다아~.”
제법 차가운 겨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추위에 둔해지기 시작했다.
산맥 요새답게 불쑥 솟아 오른 높은 탑 위에서 저녁을 맞이했다.
빠르게 황혼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뒤덮기 시작한 하늘의 별빛 축제.
“아…….”
정령들은 어느새 자기들이 맡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고 없었다.
어둠 속에 잠긴 요새는 불빛 하나 밝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에는 달도 없고 오직 별빛만 쏟아져 내릴 듯 반짝였다.
이런 광경,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매일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반복되는 하루였지만 이런 여유로움은 드물었다.
두 세계의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허락된 축복 같았다.
지구에서 봤던 은하수와 별의 흐름이 달랐다.
길게 흐르던 은하수와 달리 약간 십자의 형태를 띤 은하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더 이상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별의 향연에 온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처절하게 아름답네.”
자연 앞에 언제나 고개 숙여야 하는 인간 존재의 작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길 없는 위대한 자연 앞에 실로 겸손해졌다.
꼬로로로록.
다만 뱃속 사정만은 달랐다.
하루 종일 열심히 달린 위장에 보상을 허락하라고 난리였다.
“파이어!”
준비한 장작에 불을 붙였다.
문명의 도움이 없이도 말 한 마디로 단박에 불길이 타올랐다.
“캠핑에는 고기가 제격이지.”
아공간에 잘 정리된 암컷 멧돼지 고기가 저장되어 있었다.
꼬치에 끼워 소금과 후추 살살 뿌려 구워냈다.
아무도 없는 이계 깊은 산골 요새.
아우우우우우우우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나무 맥주통도 꺼냈다.
이런 날을 대비해 영지제일주점 할머니의 보리 맥주를 저장해 놨다.
고기가 지글지글 기름을 토해내며 익어갔다.
치이익 소리까지 맛있게 났다.
기름이 장작 위에 떨어지며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꿀꺽꿀꺽.
나무 맥주통 뚜껑을 뽑아내고 시원하게 한잔 들이켰다.
지구에서처럼 깔끔하게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보리향이 알싸하게 풍겼다.
까칠하지만 풍미 가득한 맥주를 길게 마셨다.
“캬아~”
숨이 넘칠 때까지 삼키다 숨을 뱉었다.
“바로 이 맛이라니까~.”
돼지꼬치 구이를 입에 물었다.
소금과 후추가 다였지만 잡내가 전혀 나지 않아 맛이 끝내줬다.
별 하나에 맥주 한 잔, 별 하나에 고기 한 점.
홀로 앉아 마셔도 세상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게 행복이지~.”
콰아앙! 쾅! 쾅!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안빈낙도를 노래하던 그 순간 갑자기 예기치 않은 폭음과 시퍼런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음파에 담겨 있는 강력한 힘의 파장.
마수였다.
그것도 최소 중급 이상의 마수.
쿠아아아아아! 쿠아아! 쿠아아아아아아!
“뭐야? 사람 쫄리게 야밤에 날뛰고 지랄이야?”
겁나는 건 아니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시의 마수와의 대결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살짝 긴장하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확인했다.
“어? 저곳은…….”
낮에 오크들을 떼거리도 쓸어버렸던 장소였다.
아무래도 마수가 피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퍼어엉! 퍼버버버버버벙!
그때 눈에 들어온 거대한 불꽃.
“마법? ……고서클???”
한밤중에 외진 요새에서 마법을 본다는 게 황당했다.
“헛!!!”
번뜩 스치는 불길한 생각과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하나.
“아공간!”
아공간을 열어 화살과 창을 챙겼다.
파앗! 주저할 사이도 없이 요새 성벽 위를 박찼다.
퍼버버벙! 펑!
다시 한 번 더 터지는 마법.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잔뜩 흥분한 마수의 울부짖음 속에 배어 있는 진득한 살기.
쇄애애애애애애앳.
몸은 성벽 밑 우거진 나무를 걷어차며 화살처럼 어둠 속을 가로 질러 날아갔다.
***
“헉헉……. 헉”
아린은 숨이 턱까지 막혀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나를 무리하게 뽑아낸 후유증이었다.
마나가 넘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렇게 고갈이 되면 육체적 능력까지 급속도로 기능을 상실한다.
‘방심했어…….’
그가 걱정되어 성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금껏 지켜본 영주 베커는 너무 바빴다.
영지민들의 세세한 상태까지 챙겨주는 세상의 유일한 영주였다.
그는 누가 봐도 착하고 듬직했으며 성실했다.
이렇게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드워프와의 계약을 위해 마차까지 끌고 떠나던 그의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따라나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걸 후회했다.
종일 성벽에 서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아직도 영지민 모두 다 아린을 어려워했다.
다만 영주만이 아린을 있는 그대로 대했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가 없는 영주성은 마치 텅 빈 감옥과 같았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마음이 안정이 안 됐다.
아린은 플라이 마법을 펼쳤다.
마력으로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며 빠르게 날았다.
앉아서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7서클 마법사가 되었기에 웬만한 마수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아니 한 번쯤 부딪쳐 보고 싶은 호승심도 일었다.
영주의 흔적을 찾아냈다.
산 밑에 위치한 돌로 만든 방어탑에 마차와 말이 있었다.
그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은 요새로 향하고 있었다.
과거 사용했던 돌길이 보였다.
주저 없이 길을 따라 산 속으로 향했다.
서클이 올라 마력이 넘쳤다.
플라이 마법을 펼쳐도 지치지 않았다.
그렇게 베커를 찾아 이동하던 중에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내려왔다.
혹시 베커가 부상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앞뒤를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의 아린이었다면 신중을 기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급히 땅에 내려와 사방을 훑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다가오는 살기를 느꼈다.
급한 대로 메모라이즈 해뒀던 실드를 펼쳤다.
거대한 발톱이 사정없이 실드를 두들겼다.
6서클급 마력이 담긴 실드가 쩍쩍 금이 갔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수였다.
그것도 중급 이상의 새카맣고 거대한 마수가 실드를 무자비하게 앞발로 후려쳤다.
평소의 생각과 달리 몸이 덜덜 떨렸다.
실드 밖에서 노려보는 맹렬한 살기 번뜩이는 눈동자에 몸이 굳어 버렸다.
실드가 깨지려는 순간 놈을 향해 마법을 펼쳤다.
마력을 계산하지 않고 강력한 6서클 공격 마법들을 뿌렸다.
마법을 알고 있는 듯 놈은 잘도 피했다.
몇 번의 고서클 마법을 난사하면서 아린은 지쳤다.
아니 마나가 바닥을 쳤다.
플라이 마법을 쓰면서 보온 마법에 은근히 빠져나간 마나가 많았던 것이다.
고서클 공격에 충전하지 못한 마나 홀은 그새 텅 비어 갔다.
쿠르르르르르르…….
아린의 상태를 아는 듯 더 거세게 으르렁거리는 마수.
지쳐가고 있는 맛있는 인간 마법사를 지켜보며 침을 뚝뚝 흘렸다.
난생 처음 마주한 마수의 살기에 당황한 아린은 벌벌 떨기만 했다.
마력이 없는 마법사는 일개 병사만도 못한 신세였다.
플라이 마법을 펼칠 마력조차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앙!
그 순간 마수가 자리를 박찼다.
인간 마법사가 플라이 마법을 펼친 것을 알고 도망갈 길을 미리 차단하는 영악한 행동이었다.
마수의 커다란 입이 쩍 벌어지며 단숨에 아린의 목을 노렸다.
“아…….”
공포에 질린 아린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순간에도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봤으면 싶은 그의 얼굴.
오늘은 그와의 만남 333일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