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3화 (432/1,284)

 # 433

회귀의 전설

433장. 싫어

[동계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 동양인인 대한민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동시에 같이 출전했던 장태산이라는 무명의 선수도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스키 강국으로 발전한 것을 본받아 우리 선수들도…….

띠릭.

시끄러운 아나운서 목소리를 더 이상 듣기 싫어 TV 전원을 꺼버리는 남자.

“하아아…….”

창밖의 홍콩 앞바다를 바라보며 리장창은 깊은 한숨을 내쉬웠다.

하늘도 무심하게 이번 계획도 실패했다.

어렵게 섭외한 아사신이라는 자들도 지옥으로 사라졌다.

정확한 정보는 전달돼 오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아사신 실패에 대한 모든 정황들이 차단됐다.

장태산이 메달을 딴 것으로 그간의 계획과 작전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쇠탈의 후예가 맞겠지……. 치우의 자손……이 부활했다.”

리장창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가장 우려했던 바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서 떠벌리거나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떳떳하기 위해서는 아사신을 이용한 모든 정황은 죽어서도 비밀로 묻혀야 했다.

아사신의 가장 강력한 적이 기사단이었다.

자칫 천지회가 아사신에 청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지금껏 쌓았던 모든 기사단과의 동맹은 자동으로 파괴될 것이다.

위험한 도박이었던 것에 비하면 얻은 것이 없었다.

더구나 원하는 걸 얻지도 못했다.

리장창 인생의 오점이 됐다.

“이제 어떻게 한다…….”

아사신에서는 청부가 끝날 때까지 놈을 노릴 것이다.

그래서 1억 달러를 놈들의 계좌로 입금했다.

자체 살수 조직이 있지만 너무 많이 노출이 됐다.

아직 최고급 살수들은 투입되지 않았다.

회의 최후 보루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대로 놔둘 수도 없고…… 하아.”

리장창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믿음직한 부하 제갈유랑도 회의 일로 북경에 가 있었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이 창문을 두들겼다.

오늘따라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홍콩 바다가 격정으로 출렁였다.

리장창은 답답함에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똑똑.

그때 리장창 집무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아빠 저예요.”

“들어오너라.”

끼이이이익.

리장창은 언제 깊은 시름을 품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이 맺어진 인연으로 탄생했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여식이었다.

멀고 먼 프랑스로 시집을 갔고 잠시 돌아왔다.

들어서는 클라라의 배는 눈에 띌 만큼 살짝 부풀어 있었다.

딸이 어느새 성인이 되어 이제는 곧 엄마가 된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니~”

“아닌데……. 분명 말 못할 고민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클라라가 배시시 웃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다 모여 있는데 고민은 무슨~. 그래 오늘 저녁은 뭐가 먹고 싶더냐?”

“아직 생각 없어요.”

“홍콩에 있을 때 다 먹고 가렴.”

“프랑스에도 다 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하. 그게 애비 마음이란다.”

리장창은 딸이 더 애틋했다.

회의 일로 사랑을 버리고 가문을 위해 몸을 던진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중국몽만 완성된다면 클라라와 손주에게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었다.

“아빠…….”

“왜? 할 말 있더냐?”

클라라가 리장창을 바라보며 조용히 불렀다.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 보이는 딸의 말투와 행동이었다.

“그를 그만 놔두세요.”

“응? 누, 누구?”

리장창이 당황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괜히 저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게 싫어요. 배 속의 아이도 원치 않아요.”

특정 주어는 없지만 그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두 사람 다 알았다.

리장창은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늦었다.”

“아빠!”

“이제는 너와 내 문제만이 아니다. 그 녀석은…… 회에 위험한 존재다.”

“……다니엘이 뭐가 위험해요? 그는 친절하고 예의도 발라요. 비록 인연이 안 됐지만 좋은 추억만 남겨준 남자예요.”

클라라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그를 변호했다.

“됐다. 그 문제는 이제 내 손에서 떠났다.”

리장창의 입장은 단호했다.

“…….”

클라라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빠의 저런 표정은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마. 그리고 놈 하나로 마무리 지으마.”

리장창의 말에 질근 입술을 깨무는 클라라.

이제 더는 그와의 추억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한때는 괴로웠지만 배속의 아이를 위해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했다.

다만 인연의 끝이 안타까웠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안전한 삶을 살았을 다니엘.

‘미안해요……. 다니엘.’

그저 미안함에 가슴 깊이 아파할 뿐이었다.

***

[유나 킴~!]

“와아아아아아아!!!”

“퀸! 퀸! 퀸이인!”

“유나! 유나! 유나!”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퀸을 연발하는 팬들의 함성이 아이스링크 장에 가득 울렸다.

시상식을 마치고 유나를 찾아갔다.

그녀와 약속했었다.

메달을 따서 응원 오겠다고 말이다.

“저 남자……. 동메달 땄던 남자 아냐?”

“어머! 맞네. 맞아.”

“실물 진짜 잘생겼다…….”

“시상식 때 잠깐 봤는데 모델인 줄 알았어.”

“유럽 미남 선수들도 발라버리던데?”

“그런데 왜 자세히 안 나왔지?”

“동메달이라서 그런가 봐.”

뒤에서 두 명의 한국 여성 관객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모두 다 내가 계획한 일들이었다.

금메달리스트 조영준만 쭉 띄워줬다.

동메달을 딴 나는 잠깐 화면에 비춰지고 끝났다.

하루 종일 조영준 특집이 방송됐다.

무명의 스키 신인은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메달은 흥 넘치는 국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 TS 그룹 명의로 5억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아는 인맥을 동원해 언론에 더 센 바람을 일으키도록 부채질 했다.

동시에 나에 대한 기사는 모조리 차단했다.

검색해도 간단한 프로필 정도만 나올 뿐이었다.

군 문제는 메달로 해결이 됐다.

2010년 지금만 하더라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4주 군사훈련을 끝으로 면제가 됐다.

2015년 후에 재정된 봉사활동도 없었다.

“보스.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로버트~.”

로버트와 함께 로얄석을 차지했다.

올림픽 표 예약을 미리 부탁해 놓은 덕분이었다.

유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도 다시 보고 싶은 명장면을 TV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눈에 직접 담았다.

나만을 위한 호사였다.

경기 종목이 끝났기에 협회에서도 터치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폐막식까지 자유였다.

귀국해도 상관은 없지만 바쁠 게 없어 이곳에 머물렀다.

동계 올림픽 기간이라 볼 게 많기도 했다.

다시 이런 곳에 선수로 참가할 수 없는 만큼 청춘을 즐기고 싶었다.

소피아는 내가 내민 소원 조건에 기겁을 했다.

자신과의 하룻밤 정도를 생각했던 소피아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쳤다.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띠이잉~♪ 따라라라라라라라라~♬.

유나가 자세를 잡는 순간 거슈인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가 울려 퍼졌다.

푸른색 드레스에 깔끔한 은빛 보석밴드를 목에 착용한 유나는 빙판 위의 푸른 요정 같았다.

배경음악도 유나를 닮아 깔끔하고 신선했으며 우아했다.

그리고 시작된 그녀의 본격적인 연기.

한 마리 새처럼 가볍게 날았다.

유나의 장기인 트리플 럿츠와 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이 완벽하게 펼쳐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

“휘이이이이익~.”

사방에서 탄성과 함께 박수가 터졌다.

“와우!”

로버트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젯밤 유나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너무 아름다웠다고 말이다.

유나는 오빠를 위해 더 멋진 연기를 펼치겠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난 유나의 클린 연기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수십 년 깊은 동굴에서 수련한 무림 고수가 세상에 나와 무지막지한 초식을 뿌리는 것처럼 유나는 모든 것들을 압도했다.

앞서 봤던 아사다 마유의 귀여운 연기와 비교가 많이 됐다.

은반 위에서 유나는 그 자체로 빛났다.

장중한 피아노 협주곡에 맞춰 유나는 변신을 거듭했다.

우아한 공주가 날개를 펴고 접었다 하며 지상의 것들을 희롱했다.

그녀의 손끝과 눈빛, 동작에 모두가 빨려 들어갔다.

실수는 없었다.

더블 콤비네이션과 플라인 컴비네이션 스핀, 스파이럴 스퀀스…… 플라잉 싯스핀까지…….

모든 동작들이 음악에 맞춰 물 흐르듯 펼쳐졌다.

짧고 근육질 넘치는 유럽 여자 피겨 선수들 사이에서 유나는 홀로 여왕이었다.

비교 자체가 안 됐다.

유나만이 풍겨 내는 고귀함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누구라도 빨려 들어갔다.

유나가 연기를 이어갈수록 행복함이 밀려왔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그리고…….

쿵쾅! 쿵쾅~♩ 따라라라라라라라~♫

격렬한 북소리에 이어지는 영롱한 피아노 소리에 맞춰 그녀의 마지막 연기가 펼쳐졌다.

체인지 풋 콤비네이션 스핀.

푸른 빙판 위의 요정이 천천히 멈춰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유나! 유나아아아아!”

“퀸! 퀸! 퀸!”

짜자자자자자자자자자자작.

동시에 터지는 엄청난 함성과 기립 박수.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유나를 위해 박수를 쳤다.

태어나 가장 열렬하고 뜨겁게 여왕에게 찬사를 보냈다.

“원더플! 퍼펙트! 엑셀런트!!!”

로버트도 일어나 탄성을 질렀다.

유나가…… 방판 위를 돌았다.

그녀 눈가에 비치는 은빛 물방울.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올림픽 메달 작전의 가장 큰 추억은 유나와의 시간이었다.

***

“하아아…… 하아.”

유나는 선수 대기실에서 아직도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잠시 후 메달 시상식이 열렸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마지막 동작이 끝났을 때 쏟아지던 눈물은 그녀의 모든 역경의 시간과 억눌렸던 감정을 대변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오늘 받게 될 영광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쇼트와 프리 합계 점수 220을 가볍게 넘었다.

지독히도 괴롭혔던 심판들과의 악연도 끝났다.

누구도 뭐라할 수 없는 클린하고 완벽한 연기.

다시 뛰라고 해도 오늘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수고했다……. 딸.”

엄마가 유나를 안아줬다.

“수고했어……. 엄마.”

“내가 뭘…….”

유나가 금메달을 확정할 때부터 눈물을 쏟아냈던 예민정의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엄마만이 느낄 수 있었던 딸의 위대한 여정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을 거쳐 금메달을 따낸 딸은 세상 누구보다 존경스러웠다.

“축하해. 유나.”

어설픈 영어가 들려왔다.

그때 아사다 마유가 다가왔다.

오늘 아쉽게 은메달을 땄지만 두 사람은 경쟁자이자 동료였다.

“고마워. 마유.”

“아니야. 넌 충분히 메달을 받을 자격이 있어.”

고집스럽지만 귀여운 마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나를 인정했다.

“네 덕분이기도 해.”

세상 둘도 없는 경쟁자인 마유가 있었기에 외로운 선수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나 부탁하나만 해도 돼?”

“응? 부탁?”

평소 길게 말을 하지 않던 마유였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알려줘.”

“뭘?”

“전화 번호.”

“내 꺼?”

“아니……. 호빠 번호.”

“!!!”

얌전하던 아사다 마유가 며칠 새 변했다.

마유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호기심과 깊은 감정.

유나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유나도 충분히 느끼고 짐작할 수 있는 그 눈빛.

그리고…… 유나는 단호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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